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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소개

박영복(지호) 2006. 4. 10. 20:03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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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대의 석조건물로 지은 사원으로 이집트의 피라밋, 중국의 만리장성와 더불어 세계 8대 불가사의인 건축물이다. 이 수많은 돌을 어떻게 우반하였는지 절로 감탄이 나오는 "앙코르 와트"가 세계에 알려진 것은 1980년 프랑스 탐험가 앙리 모어가 밀림속의 유적을 발견함으로 시작되었다. 앙코르와트는 1119-1150년 사이에 쇼바만2세에 의해 약 2만 5천의 인력을 동원 30년간 걸쳐 지은 850m-1,050m의 크기를 가진 인류최대의 사원이다. 12-3세기에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번성했던 앙코를제국은 당시 인구 100만의 거대한 도시였다.
   1.5Km-1.3Km의 인공호수를 둘레로 사방 약 1Km에 걸쳐 축조된 인류 최의 석조 건물인 "앙코르 와트"는 500년 동안의 영화를 이제 유적으로 인대류에게 남겨 놓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원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중 동남아시아에 있는 "앙코르 와트", 그 웅장하고 거대한 사원은 관광객의발을 묶어 놓기에 충분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캄보디아말로 사원은 "와트"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말은 형용사가 뒤에 붙기 때문에 "와트 앙코르"해야지 앙코르사원이 된다. 그러나 유일하게 앙코르와트만 이 순서가 바뀌어져 있다. 이 말은 앙코르와트가 단순하게 사원을 의미하는게 아니라는 뜻이다. 앙코르는 "도시"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국가들이 대부분 도시국가의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도시는 국가라는 말과 동일 시되었을 것이다. "와트"는 사원이니까 앙코르와트는 도시사원이라고 해석이 된다. 즉 도시와 사원의 기능을 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앙코르 와트 전경 공중에서 본 앙코르 와트
  앙코르와트를 가는 길은 옛날 유적지를 찾아 가는 길처럼 자그마한 길이 아니다. 아마 밀림을 뚫고 길을 냈을 것이다, 아름드리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서있고 자로 잰 듯이 계획된 도로가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위풍당당한 왕이 지나갔을 것이며, 수많은 군사가 보무당당하게 진군을 했을 것이다. 또 당시 동남아의 대부분 국가들이 조공을 싣을 수레를 줄이어 끌고 이 길을 지났을 것이다. 밀림을 지나면 확 트이는 호수가 나오고 멀리 앙코르와트가 보인다. 이렇게 앙코르와트는 수백년을 숨겨져 있었고 또 은둔하고 있었다. 마치 신비의 신전처럼...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유적지 중 가장 큰 사원이며 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크메르 건축 예술의 극치를 이루는 역사적인 예술품이다.
  이 사원의 구성, 균형, 설계 기술, 조각과 부조 등의 완벽함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앙코르 와트는 석조 건축물로 만들어진 우주의 축소판으로 지상에 있는 우주의 모형이다. 사원의 정 중앙에 세워진 중앙 탑은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을 상징하며 5개의 탑은 메루산의 5개의 큰 봉우리를 나타낸다. 성벽은 세상 끝을 둘러 싼 산맥을 뜻하며 둘러싼 호수는 우주의 바다를 상징하고 있다. 따라서 앙코르와트가 지니는 건축적의미는 3층 중앙 탑들이 있는 곳은 천상계, 2층은 인간계, 그리고 1층은 축생계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 이 사원은 Suryavarman II의 장례를 치르기 위한 사원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것은 해가 지고 죽음을 뜻하는 서쪽으로 출입구가 나 있기 때문이다. 양각 부조 또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며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도 힌두교의 장례식의 절차에 쓰이는 법도이므로 이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왜냐하면 무덤으로 쓰이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고 외곽의 모습으로는 왕궁의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전부 다 소멸되어 버렸지만 주변에 산재해 있었을, 금색으로 빛나는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목조건물의 대열을 상상해 보라 과연 이곳이 무덤의 기능만 할 곳인가? 또한 내부에는 도서관과 같은 기능을하는 곳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단순히 문이 서쪽으로 나 있다는 것만을 가지고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캄보디아에서 왕이란 지상에서 신의 대신하여 신의 능력을 부여받아 국가를 보호하고 국민을 통치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것은 '우주의 지배자인 왕'이라는 종교적 호칭에서 우리는 쉽게 알 수가 있다. 이 신앙이 데바라쟈교다. 이 신앙은 쟈야바르만 2세에 의해 국교로 지정되었고 전후 힌두교나 불교가 들어 와서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기본적으로 캄보디아인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이 신앙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신앙을 중심으로 크메르 민족이 뭉치고, 왕은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점에서 왕궁과 신전의 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앙코르 톰 남문
앙코르 와트를 왼쪽으로 돌아 약 1.7㎞쯤 가다 보면 놀라운 위용과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문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앙코르 톰으로 들어가는 남문이다.

   앙코르 톰은 한 변이 약3㎞인 정사각형의 성곽도시이다. 자야바르만(Jayavarman) 7세에 의해 12세기 말에 조성된 불교 사원인데 우리나라 고려의 최씨 무신정권 시기에 해당된다. 앙코르 톰 일대에는 승려나 관료, 군인들의 거주지가 광범위하게 분포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목조건물 이어서 세월과 함께 소멸되었다. 인근에는 약 100만 명까지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에 해당된다. 높이 약 8m, 길이 약 12㎞의 성벽을 쌓고 그 밖에 폭 100m의 해자를 둘렀는데 커다란 악어들이 살았다고 한다.
앙코르 톰에는 5개의 문이 있는데 각 방향마다 1개씩 있고 동쪽에는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왕궁의 중앙 단상과 연결되는 승리의 문이다.
  문 위에는 4개의 얼굴을 가진 아바로키테스바라(Avalokiteavara)신이 올려져 있는데 메루산에서 4방향을 지배하는 신이다. 해자를 건너는 다리의 왼쪽에는 54명의 선신들과 오른쪽에는 같은 수의 악신들이 뱀인 배수키(Vasuki)를 껴안고 다리의 난간을 구성하는데 이는 영생의 우유를 제조하는 신화의 한 장면이다. 이 다리는 중생들의 사바세계와 신의 세계의 연결을 상징한다. 이러한 양식은 각 문들의 공통적이다.
           
  해자를 건너는 다리를 지나야 남문으로 들어설 수 있었는데 다리의 양쪽 난간 에는 그 유명한 '우유바다 휘젓기'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우유바다 휘젓기'란 신화는 선과 악의 투쟁에 관한 것이다.
선의 상징인 수라가 악의 상징인 아수라들을 이기기 위해 브라마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 의 지시에 따라 비슈누는 우유바다에 있는 감로수 아무리타를 찾도록 한다. 바다를 저을 수 있는 젓개로 만다라산이 필요하다. 이 일을 위해 수라의 무리와 아수라의 무리가 난타, 혹은 아난타로 불리우는 뱀의 수장과 함께 힘을 합쳐 만다라산을 뽑고 가루다가 그 산을 날라 온 다. 그 산을 머리가 아홉인 바수키라는 뱀으로 동여 매서 한 쪽 끝은 수라의 무리가, 다른 한 쪽은 아수라의 무리가 잡아 마침내 우유바다를 휘젓는다는 것이다.
 
 
 
바이온 사원
앙코르 톰의 위대한 건축자인 자야바르만 7세가 12세기 말에 건립한 앙코르 톰의 중심사원으로 약 50개의 탑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다. 거대한 바위산 모양의 이 사원은 앙코르의 유적 중 유일하게 우물을 갖추고 있다.

   바이욘 사원 탑에는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한 자야바르만 2세의 웃는 얼굴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부처와 동일시된 왕의 위력을세계에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화랑의 벽면에는 그 당시 크메르인들의 역사적 사건과일상생활의 부조로 새겨져 있다. 건설 직후의 바이욘은 황금빛으로 찬란하였다고 한다. 앙코르 톰에서 만난 관세음 보살을 뒤로하고 시원한 숲길을 달리면 그 유명한 바이욘 사원이 나온다. 원래 출입은 동문으로부터 해야 했지만 지금은 파괴되어서 어느 곳에서나 들어갈 수 있다. 바이욘사원은 수수께기에 싸인 사원이다, 아직까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정확히 알려져있지를 않다. 이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 톰의 중심에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이욘사원은 크메르 우주론의 메루산를 상징한다고 한다.

  처음 바이욘을 만나면 놀라움보다는 돌무더기를 보는 듯한 실망감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왜 이곳에 이러한 것을 이토록 많이 만들었을까하는 상상을 가지고 자세히 보면 우리는 그곳에서 쉽게 발을 뗄 수가 없을 것이다. 얼핏보면 모두 비슷하지만 서로 조금씩 다른 우리의 인생이 반추되는 듯한 숨결을 느낄 것이다. 앙코르유적은 기본적으로 시간을 요하는 곳이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다보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수백년에 걸친 대역사를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시간의 변화와 날씨에 따라서도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바이욘 사원에 있는 관세음보살의 미소를 앙코르의 미소"라고 부른다.
       
바이온 사원 공중에서 본 바이온사원 바이온 얼굴

  바이욘 사원은 12C후반 - 13C초 사이에 지어졌고, 불교 사원으로 지어졌다. 당시 왕이었던 자야바르만 7세는 최초로 대승불교를 들여왔고, 스스로를 중생을 구제하는 로케쉬바라( 관세음보살)로 믿고, 대승불교를 장려하기 위하여 갖가지 사원과 빈민구제시설 등을 많이 지었다고 전한다. 역사적우로 본다면 자야바르만 7세는 정통후계자가 아님 방계였다. 이런 그는 정치적으로 기존의 계급제도를 인정하는 힌두교보다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직접 정치를 하는 과정에서 대승불교를 들여오고 스스로를 관세음보살로 자칭하면서, 대승불교를 권장하는 한편 많은 빈민구제 시설들을 건설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그는 바이욘 사원, 앙코르 톰, 프레아칸, 닉뽀안, 따 프롬 등 많은 사원을 모두 세웠다. 또 1200년대 초 앙코르 왕국을 괴롭혔던 베트남의 참파국을 복속시켰고, 태국 북부 지역도 다스렸으며 라오스의 브양트얀 부근에서도 그의 비문이 발견될 정도로 세력을 확장했었다. 정확한 국경선을 밝혀지지 않았지만 상당히 넓은 지역을 통치했으며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끝없이 뻗어나간 도로였다. 자야바르만 7세는 탁월한 군사력, 정치력, 그리고 자신을 관세음보살과 일치시키며 신격화시킬 정도로 능력있는 왕이었으며 앙코르 왕국을 번영시킨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이런 그의 치세도 그가 죽고 나자 사그라들고, 종교는 다시 힌두교로 바뀌며, 국력은 급격하게 쇠퇴하게 되었다. 급기야 15세기 중엽에는 지금의 꼼뽕 츠낭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앙코르 제국의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된다
 
 
 
 
*타 프롬(TA PROHM)
 
12세기에 왕의 조상을 모시기 위해 "브라마의 조상"이라는 이름의 불교사원, 앙코르 톰의 외곽에 있으며 정글에 오는 듯한 기분이 느껴지는 곳이다.
자야바르만 7세 때 건립되었으며, 당시에는 3천명에 가까운 승려들이 살던 대사원이었으나 그 후에 방치되었다. 이제는 돌기둥과 천장이 무너져 고색창연한 기운이 감돈다. 앙코르 유적 중 가장 신비로운 맛을 풍기는 곳으로 꼭 들려야 하는 곳이다. 어떤 안내서는 이곳을 인디아나존스에 나오는 미지의 공간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자연의 힘앞에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가를 한눈에 보여주는 곳이다. 수많은 사람들, 특히나 이 공사에 동원 되었던 노예와 징발된 국민의 피와 땀이 한낱 나무 뿌리에 의해 파괴되어 버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 프롬으로 가는 길은 앙코르유적중 가장 고대의 냄새가 나는 곳이다. 오래전 앙코르제국 그 시절 처럼 작은 오솔길을 따라 가면 전통음악을 연주하는 약사가 보이고
무엇인지는 몰라도 마구 빌어주는 사람들, 마구 비는 사람들이 눈에 띤다.
 
  이곳으로 가는 길을  이처럼 방치한 것은 자연이 어떻게 사원을 무너지게 했는지 그 과정과 결과들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하여 일부러 복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관광객들은 정말로 열대 무화과나무들과 가지로부터 뿌리가 내려와 땅에 박히는 보리수나무 등이 어떻게 사원을 덮을 수 있었고, 이 나무들이 무너지면 사원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돌에 새겨진 기록이 아직도 선명히 이 사원의 역사를 말해준다. 타 프롬은 당시 3140개의 마을을 통치하였고, 79,365명이 이 사원을 관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8명의 고승과 2,740명의 관리들과 2,202명의 인부들과 615명의 무희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원에 남아 있는 재산 중에는 500Kg이 넘는 황금 접시 한쌍과 35개의 다이아몬드, 40,620개의 진주, 4,540개의 보석, 876개의 중국에서 온 커튼, 512개의 비단 침대 그리고 523개의 양산이 있다. 이러한 숫자가 비록 왕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과장된 것들이기는 하지만 Ta Phrom 사원의 중요성과 의미를 잘 말해주고 있다.
 
 
*쁘레아 칸(PREAH KHAN)
 
쁘레아칸 으로 가는 길은 좌우에는 거인과 신들이 반긴다.
 
 
힘이 넘치는 얼굴로 지키는 경호원같이 보여지는 무게가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입구부터 다른 곳과는 다른 이곳은 왕궁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커다란 뱀을 잡고 있는 이 구조는 앙코르 톰에서 보았던 양식이다.
 
쁘레아 칸이란 "신성한 검"이란 뜻이다. 이 신성한 검은 자야바르만 2세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왕자에게 주었다는 보검으로 그 이후 이 신성한 검에 의해 나라가 지켜진다은 전설의 검이다.
 
 앙코르 여행에서 빠져서는 안될 곳 중의 하나로 자야바르만 7세가 12세기에 세웠다.  이 사원은 자야바르만 7세가 처음부터 만든 것이 아니라 얼굴상이 없는 조각이나 불교식과 힌두교식이 혼재한 것으로 보아 이전의 건물을 개축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이 사원을 관람할 때 주의 사항은 사원의 중앙으로 들어 갈수록 문의 높이가 낮아지는 것이다 이것은 왕이 있는 곳으로 갈수록 복종의 의미로 자연스럽게 머리를 숙이게 설계된 것이라고 한다.
4개의 큰 통로가 사원으로 연결되며, 경계에는 큰 뱀을 갖고 있는 거인과 신들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앙코르 톰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건축구조는 왕궁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원은 1177년 짬족을 물리친 후 왕궁을 새로 보수하는 동안 자야바르만 7세의 임시 왕궁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쁘레야 칸은은 타 프롬과 비슷한 점이 매우 많다.
사원의 대부분이 매우 심하게 손상되어 있으며, 일부 복원된 것도 건축 구조상 매우 복잡하게 된 것도 비슷하다.
 
*니악 삐안 (Neak Poan)
 
니악 삐안은 프레아칸을 지나 300m를 가면 나오는 자그마한 인공호수 공원이라고 보면 된다. 울창한 숲사이를 걸어 이 작은 사원(?)에 오면 그 자체가 매우 기분이 좋다.12세기 후반에 자야바르만 7세가 만들었으며 중앙에 아미타불을 상징하는 탑이 있다.
 
 
 영문으로는 닉핀이라고 하는데 캄보디아인들은 니악 삐안(뽀안)이라고 한다. 니악 삐안이라는 말은 또아리를 튼 뱀이라는 뜻이다.
캄보디아에는 머리가 7개 달린 뱀 형상이 아주 많다. 이 코프라같은 뱀을 나가스라고 하는데 자기가 사는 곳과 비가 오는 곳의 번영을 좌우한다고 한다.
 
  원래 이곳에 들어가려면 배를 타고 가야 했으나, 프랑스가 이 제방을 쌓았다고 한다. 이 사원은 다른 사원들의 구조나 상징 등과는 매우 동떨어진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사원은 원래 순례자들이 와서 이 물로 몸을 씻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에 있는 연못은 우주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히말라야에 있는 커다른 호수인 아나바타파를 의미한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호수는 지구상의 4개의 커다란 강의 기원이라고도 한다.
 니악 삐안 사방에 있는 4개의 동물이 조각된 조그마한 암자가 이 강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호수는 뜨거운 샘에 의해서 채워졌고, 인도에서는 이 호수를 풍작을 기원하는 의미로 숭배했다. 니악 삐안은 아마 세상에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온 석가에게 바쳐진 것으로 추정된다. 1935년까지 니악 삐안의 중앙 탑은 뱅골보리수 나무가 그 위에 자라고 있었고, 폭풍으로 나무가 쓰러질 대까지 그 뿌리가 탑을 감싸 안고 있었다.
 
*반티아이 끄데이 (Banteay Kdei)
 
타 프롬을 지나 남동쪽으로 나 있는 상쾌한 숲길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이곳은 "방들의 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12세기 중엽에서 13세기 초, 자야바르만 7세 때 지어졌다.
 
 
  이 건축물에서는 바욘 스타일과 앙코르 와트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는 것을 확연하게 볼 수 있다. 자야바르만 7세 때 이 건물은 매우 중요한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질이 떨어지는 부서지기 쉬운 사암을 이용하여 건물을 지은 탓에 지금은 많이 무너져 그 성격을 정확하게 추정하기가 어렵다. 개축과 보수가 지어진 이후로 몇 차례 있었던 것 같으며, 그로 인하여 건물의 의미를 추정하기가 더욱 어렵다.
 
 이 건축물에 관한 비문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데, 그 구조는 따 프롬과 비슷하지만, 덜 무너졌고, 또 덜 복잡하다. 이곳에는 1960년대에 위험한 야생 사슴이 살게되어 사람이 접근하기 힘들었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계속 승려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원의 동쪽 출입문으로 들어가면, 앞에 커다란 테라스가 나오는데, 이곳은 춤추는 소녀들의 홀이라고 부른다. 이 이름은 이 테라스에 조각된 춤추는 압사라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이 테라스의 북쪽에는 큰 기둥들이 보이는데, 이 기둥들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집의 기둥의 잔해라고 한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중앙 탑과 회랑들이 있는데, 많이 무너져서 구분이 힘들다.
 
 
*반티아이 스레이 (Bateay Srei)
 
이 사원은 앙코르 톰에서 북쪽으로 25Km정도 더 가야 나온다. 10세기 후반(967) 라젠드라바르만2세와 자야바르만 5세에 의해 건축되어졌으며, 역시 쉬바에게 바쳐진 것이다.  
 
 
반티아이 스레이사원은 모든 사람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는 규모는 작지만 가장 아름다운 사원 중의 하나이다. 앙코르에서 복원 작업을 했던 프랑스 건축가들의 의견들도 이 사원을 보석에 비유하거나, 크메르 예술의 극치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반티아이 스레이는 '하르샤바르만 2세'의 손자이며 바라문교의 승려였던 '야즈나바라하'란 사람이 건축하였으며, 세인들은 이 사원이 다른 앙코르 사원들보다 건축술과 장식이 인도문화에 매우 가깝다고 한다. 특히 정교한 장식의 특별한 조각 기법은 붉은 색의 단단한 사암을 이용함을써 자단목에 목각을 하듯이 정교한 기술을 뽐내고 있다. 앙코르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교하며, 양각의 깊이가 가장 깊어서 거의 소조에 가까운 부조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사원이다. 특히 사원의 양쪽에 부조된 압사라는 거의 사람모양과 흡사하게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건물 전체를 덮고 있는 구름이나 물을 나타내는 조각들이 매우 깊고 정교하여, 보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 사원은 1914년 프랑스가 발견하였지만, 1924년까지는 밀림이 울찰하여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1923년에 유럽인들이 중요한 조각들을 도둑질 해 갔으며, 그로 인하여 이 사원을 시급히 복구하기로 당시 프랑스 정부가 결정하게 되었다. 도굴범들은 후에 붙잡혀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도난품들이 다 반환된 후에 석방되었다고 한다.  
  이 Banteay Srei는 앙코르에서 처음으로 '아나스티로시스' 공법을 이용하여 완벽히 보수된 사원이다. 프랑스는 이 공법을 '자바'의 '보루부두' 지역에서 네덜란드의 기술자들과 같이 실험해 본 뒤에 이 사원의 보수에 응용하였다. 이 사원의 건축에 대한 기록이 1936년 외부 담벽에 있는 입구 탑에서 발견되었다.
 
* 스라스랑(SRAS SRANG)
 
 
돌계단 밑으로 수초가 우거진 거대한 연못이다.  이 곳을 내려다 보는 돌사자의 위풍이 아름답다. 
이 근처는 크메르 루즈의 끔찍한 학살이 있었던 곳이다. 왕족들이 목욕하는 연못으로 반티아이 끄데이의 동쪽 입구 맞은 편에 있다. 12세기 말 자야바르만7세에 의해 지어졌다.스라 스라엥은 700m*300m의 큰 호수이다.
 앙코르유적에서는 많은유적에 해자나 호수가 등장한다. 이것은 전쟁에 대비한 방어적인 준비라는 목적이외에 건기에 용수를 확보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다.
캄보디아 곧곧에서 발견되는 이런 현상은 캄보디아가 저지대이기 때문에 방어적 개념에서는 대단히 불리하고 따라서 땅을 돋우는 일은 반드시 중요한 국가의 사업일 수밖에 없다.
 
*프놈바켕 (Phnom Bakeng)
 
앙코르와트를 지나 앙코르 톰으로 가다보면 야트마한 산이 나온다. 이 사원은 9세기 후반 야소바르만 1세가 시바신에게 바치는 사원으로 지어졌다.
캄보디아에서 프놈이란 말은 산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그 자체로서 신성함을 지닌다. 고대 푸난왕조도 프놈에서 전이되었다는 말이 있은 정도로 프놈이라는 의미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프놈 바껭은 바껭산위에 만들어져 있다.
 
  이 사원의 높이는 67m에 달한다 .1960년대에는 코끼리를 타고 오르기도 했으며 당시 프랑스에서 왔던 관광객들은 이 언덕이 중세기 때의 정원을 산책하는 기분이 나서 매우 좋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일몰 직전에 이 산에 오르면 앙코르 주변의 멋있는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 여기서는 앙코르와트의 서쪽으로 5개의 탑을 다 볼 수 있고, 큰 호수 옆에 있는 프놈 크롬의 남서쪽도 보이며 프놈 북의 북동 방향과 프놈 쿨렌과 서쪽 호수의 동쪽 광경을 볼 수가 있다. 서기 889년 야소바르만1세가 즉위한 뒤에 야소하라프라라는 그 자신의 도시를 롤루스 북쪽에 세우면서 자신을 상징하는 사원으로 이 프놈바켕을 지었다.
 
 이 신도시가 지금의 앙코르 지역이며 따라서 바켕은 때때로 처음 지어진 앙코르로 불려지기도 한다. 그 당시 있었던 사각의 성벽은 각 면이 4Km길이로 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성 가운데의 산이 이 사원을 잘 구분할 수 있게 한다.  
 
    
 
바껭사원의 탑의 숫자는 우주를 상징한다. 원래 109개의 탑이 메루산을 모방한 모양으로 바껭 사원을 장식하였으나 많은 탑이 훼손, 유실되었다.
 
*쁘레아 럽 (Preah Rup)
 
  동쪽 호수의 남쪽 끝에 있는 프레아 럽은 벽돌로 지은 전탑양식의 사원으로 "탑의 산"이라 불리는 사원이다. 붉은 색을 띠고 있기 때문에 해가 뜰 대나 저녁에 보이는 풍경이 일품이다.  10세기 후반 라젠드라바르만 2세때 건축되었다.
 
 
  이 사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어울어져 건물자체가 아름답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이 사원을 장례의식을 치렀던 곳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 사원의 이름이 죽은 육신의 그림자(화장 한 후의 재를 뜻함)라는 뜻으로 화장의식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이 사원의 동쪽 입구의 계단의 시작 부분에 화장하기 위해 사용했음직한 직사각형의 참호처럼 생긴 벽돌 통이 있다.
 
프레아 럽은 동쪽 호수에서 관개수로로 공급된 물로 농사를 짓는 거대한 평원에 우뚝 솟아 있는데, 인공으로 만든 산 위에 라테라이트와 벽돌로 사원을 건설하였으며, 구조는 사각형으로 두개의 성벽이 둘러싸고 있다.
입구에서 들어갈 때 입구 안쪽으로 좌우에 3개씩 전탑이 서있는데, 많이 부서져있다. 세 탑중 중간의 탑이 다른 탑들보다 약간 더 큰 데, 이 세탑은 같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이 탑의 동쪽 입구 들어가면서 제일 왼편에 있는 탑의 동쪽 상인방에는 비쉬누가 반인 반사자로 변한 모양의 조각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사원의 북동쪽 코너에는 작은 건물이 있는데, 큰 라테라이트 벽돌로 지어졌고, 사방이 트여있다. 이 사원에 대한 설명이 이 건물 근처 회랑에 새겨져 있다.
 
*톰 마논(Thomanon) 
  
톰마논 사원은 앙코르 유적지 중에서 작은 사원에 불과하지만 조각이 귀중한 아주 중요한 건축물이다. 톰마논은 동쪽으로 문이 달린 중앙 신전이 있으며 사각형의 구조이다. 주변은 해자로 두르고 두개의 입구탑이 있는 담벽으로 싸여있다. 동쪽 입구탑은 십자형 바닥 구조이며 도서관이 남쪽 벽에 붙어있다. 담벽은 라테라이트 기초만 남아있다.
 
 
  중앙사원의 기단은 아주 조각이 잘 되어 있다. 각 면에 한개씩 4개의 현관이 있으며, 현관의 가짜문 3개에 된 조각도 정교하다. 특히 여신상은 생동감이 있으며, 동쪽 상인방에는 가루다를 탄 비쉬누가 조각되어 있다. 동쪽 입구 탑에 있는 층 위의 현관은 긴 방과 연결되는데, 이 방에는 가짜 다락방이 있다. 남쪽 문 위의 벽은 허물어졌으나 조각은 희미하게 보이는데, 그것은 쉬바가 앉은 산을 라바나가 흔들려고 하는 모습이다. 내부의 문 위에는 수그리바와 사우다 죽은 발리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이 입구탑은 긴 방의 기초와 같이 연결되어 있다. 입구에는 3개의 통로가 있다. 중심에는 5개의 현관이 있는데, 서쪽 것이 이중 현관 구조로 되어 있다. 원추형의 둥근 천장도 보인다. 북쪽 벽에는 비쉬누가 두 명의 적을 잡고 있는데, 하나는 머리를 잡혀 있다.도서관에도 가짜 다락방이 있어 난간이 있는 창문으로 연장되는데 벽으로 막혀 있다. 중앙 바닥은 라테라이트로 덮여 있고, 서쪽으로 문이 나있으며, 작은 현관과 2개의 창문이 있다. 동쪽에는 가짜 문이 있다.
 
  이 입구탑에는 중앙 통로와 양쪽 베란다와 창문 등이 있다. 이 입구탑의 조각도 매우 정교하고 특히 건축선이 아름다운데 서쪽 벽에는 가루다 위의 비쉬누가 악마와 싸우는 장면이 있다. 기둥과 기초에는 인간의 모양을 조각하였다.
 
 
*따 케오 (Ta Keo)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 자야바르만 5세와 수리야바르만 1세에 의해 건축되었다. 그다지 크지 않아서 사람들이 많지 않은데, 이곳에서 저녁놀을 지는 것을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앙코르 와트나 바이욘 등은 규모가 워낙 커서 압도되는 분위기이고, 다른 사원들에서는 전탑이 많고, 또 너무 조각이나 탑을 섬세하게 쌓아 올라가서 굵은 선의 맛을 느낄 수 없는데 비해서, 따 께오는 투박하게 쌓아올려 남성미가 돋보인다. 일단 꼭대기에 앉으면 시원한 맛을 느낄 수 있고, 탑이 주는 시원한 맛도 어우러져서 더 시원한 듯 하다.  
 이 사원은 미완성으로 중단되었다고 한다.
 
  건축을 하다가 그만둔 이유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몽고의 침입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만일 이 사원이 완공되었더라면 어쩌면 앙코르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원은 22m 높이로 솟아 권력을 상징하듯 위풍당당해 보인다.
 
  이 사원은 전체를 사암으로 지은 첫 사원으로 위엄이 있고, 다른 사원 처럼 복잡한 조각이 없어서 선이 굵어서 보는이를 시원하게 한다.
 
 
 
*롤루스 그룹 (Roluos Group)
 
시엠립 시내 남동쪽에 위치한 3개의 사원 바콩과 롤레이, 쁘레아 코로 이루어진 유적군을 롤루스 그룹이라고 한다. 이 유적군은 9세기 후반에 이룩된 앙코르 초기시대에 건설된 사원이다. 이 유적지의 세 사원들은 건축구조, 장식, 건축자재 및 방법 등의 특징이 서로 비슷하며, 크메르 예술이 찬란했던 시기의 초기적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프레아코 사원
 
롤루스는 '하리하라라야('하리-하라'가 사는 곳)'로 알려진 크메르 문명의 고대 중심지였다. 802년에 자야바르만 2세가I 세가 도읍지를 쿨랜 산에 정하면서 앙코르 시대가 막을 열었는데, 이로부터 70년 쯤 후에 왕이 도읍지를 이 곳으로 옮기게 된다. 아마 농사가 잘 되어 식량 확보가 용이하고, 또 외적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좋은 위치였던 것이 이유였던 것 같다. J왕은 850년까지 이곳에서 도읍을 정했고 다음 왕도 905년까지 이곳에 머물다가, 다시 프놈바켕으로 천도했다.
 
바콩                                             롤레이
 
 롤루스유적지의 건축물들은 주춧돌 위에 세운 높은 사각형의 벽돌 탑 형식으로 되어있다. 문은 동쪽으로 나 있으며 다른 3면은 가짜 문들로 되어 있는데, 이 시대의 전형적인 건축 특징은 탑은 벽돌로 짓고, 기둥, 상인방, 벽감 등은 사암으로 지은 것이다. 사원들을 둘러쌌던 성벽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롤루스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장식의 주제는 깔라(괴물의 머리), 가루다를 타고 있는 비쉬누신, 여성상과 많은 보석 장신구 그리고 위세가 당당한 수문장과 압사라 들이다. 기둥들은 보통 8각형이며 섬세한 나뭇잎의 복잡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역사가들은 평하기를 롤루스유적지 사원들의 조각이 크메르 조각 중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라고 한다. 
 
*톤레삽 호수
 
 
 
  시엠립시 남쪽으로 15km를 가면 바다만큼 넓은 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 호수가 톤레삽 호수이며,호수 안에는 소수의 수상족들이 살며 호수주변에는  매우 가난한 캄보디아인들이 살고 있어 이들의 생계대책도 매우 시급하다.  호수의 어족자원은 풍부하나 생활은 빈곤하다. 프놈펜행 고속 페리호의 부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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