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가미(Hypergamy)
지금까지 살펴본 가족구조상의 사회 계층적 차이는 흔히 한 여자가 높은 지위, 권위 또는
부를 갖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는 승혼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되었다. 승혼에는 세 가지 측면
이 있는데 이는 개인, 가족, 가계 또는 카스트의 역할에서 이루어지는 결혼을 말한다. 일부
학자들은 결혼과정에서 어떤 신부와 그 친척들이 신랑과 신랑 가족에게 열등한 자세를 취할
때 승혼을 이야기한다. 이런 상황은 때로 남녀의 성 차이 또는 사위와 장인 간 그리고 며느
리와 시어머니간의 세대 차이와도 연관이 있다. 인도에서는 흔히 집안이 좋지 않은 신부가
집안이 좋은 신랑과 결혼을 하면 '신부가 선물로서 신랑에게 주어지며 신부는 신랑의 가계
에 편입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 이때 지참금은 '신부 선물'에 부수되는 것이다. 승혼의
다른 한 경우는 가난하거나 지위가 낮은 집안 출신의 신부가 같은 카스트 내의 지위가 높은
집안의 신랑과 결혼하는 것이다. 셋째는 각 가족이나 혈통 때문이 아닌 카스트, 즉 서로 다
른 사회계급간에 주선되어 이루어지는 결혼을 말한다.
개인간의 관계
부모와 자식. 제도나 인구 통계학적인 측면의 차이는 개인간 관계에도 본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류층에서는 일을 할 때나 이혼 또는 재혼을 할 때 등 인간적인 관계에 보다 큰
자유를 갖는다. 이는 물론 지참금 등 재산과 관련해서 이들을 구속하는 힘이 적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남자는 물론 여자들도 집 밖에서 일을 하도록 강
제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특징은 사회계층에 따라 남녀간 사회적 관계에 큰 차이를 보여주
는 쿰바페타이 탄요르 마을에 대한 고우(Gough)의 연구(1956)에 잘 나타나 있다. 브라만 계
급 지주의 아들들은 강력한 권위를 유지하고 있는 아버지와 함께 산다. 토지를 갖지 못한
노동자 계급인 아디 드라비다(Adi Dravida)인의 아들들은 사춘기가 지난 후 곧 직업을 얻으
며 결혼과 함께 분가한다. 따라서 부모에게 덜 종속되어 있다. 이들의 딸들은 경제적, 사회
적으로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이혼하고 재혼을 하는 예가 흔하며, 논밭에 나가 일을 해 돈
을 번다. 한편 남편의 권위는-여자가 돈을 벌 수 있고 따라서 덜 종속적인 가난한 하류층민
들에 비해-부유한 상류층에서 더 강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Mandelbaum 1970:73). 물론
하층민 사회에서도 공식적으로는 남편의 권위가 강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동시에 성에 대한 수치심도 하류층보다는 상류층에서 더 강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가정생활에 대한 계층별 차이는 중국과 닮은 점이 많다. 인도의 상류층에서는 아버지와 아
들간의 관계에 격식이 있고 조심스러운 점이 많다고 만델바움은 지적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상당한 애정을 갖고 있지만 아들이 청년이 되면 친밀도나 감정표현이 줄어든다는 것이
다. 이는 특히 지주계급 등 상류층에서 더 그렇다. 고우가 말한 탄요르의 브라만 계급 사람
들 사이에 8-9세 되는 남자아이들은 부모를 손으로 만지면 안 되며 매일같이 부모 앞에 나
가 엎드려 인사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미타크사라(Mitaksara)법에 따라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권리, 즉 재산 공동상속자로서 부모에게 재산을 요구할 경우 엄
격한 아버지의 통제는 누그러질 수도 있다. 부모의 권위에 대한 차이점은 여자에게도 마찬
가지이다. 상류 카스트에 속해 있는 어머니는 아들이 결혼을 한 후에도 아들의 생활, 심지어
성생활까지도 감독하려 들지 모른다. 하지만 밖에 나가 일을 하는 중류층과 하류층의 부인
들은 자식들에게 덜 관심을 쏟게 마련이다(Mandelbaum 1970:62, Gough 1956:838).
형제. 만델바움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이어 형제간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형제들 역
시 상류층보다는 하류층에서 보다 동등한 위치를 갖는다고 말했다. 물론 형제간 동등한 위
치도 여러 형태로 나누어진다. 코타(Kota)인들은 전에는 나야르(Nayar)인들이나 히말라야
고산족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형제들간 서로의 부인을 취할 수 있다. 여기에도 규율은 있
어 가장 젊은 동생만이 형의 부인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실상 이런 관습
은 구조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히말라야 산등성이 사람들의 형제간 일처다부제나 형이 죽은
후 형수를 취하는 수혼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처다부제는 하류층이나 부족집
단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티베트에서 보았듯이 그것은 토지가 없는 사람들보다는 토지
소유자들 사이에 행해지는 관습이었다. 그럼에도 인도에서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처럼
형제간의 관계도 그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의 수준에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다. 낮은
카스트의 가난한 형제들은 싸움을 할 이유가 별로 없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노동자라면 서
로 협력할 사업도 별로 없을 것이다. 설혹 토지가 조금 있어 함께 일하고 관리한다 해도 그
들은 조만간 특히 아버지가 죽으면 서로 떨어져나갈 것이다(Mandelbaum 1970:66).
조부모. 세대간의 관계도 유사한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가난한 집안에서는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제공할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분가가 조기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할머니, 할아
버지들이 손자들과 한 지붕아래서 같이 살 가능성이 적다. 사망률이 높기 때문에 부모나 조
부모가 생존해 있을 가능서도 적으며 살아 있다 하더라도 자식들에게 의지해서 연명할 것이
다. 그러나 상류층의 복합가족에서는 조부모들의 세력을 갖고, 일례로 버릇이 없어진다는 이
유로 손자들이 외가를 방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다. 며느리가 친정에 자주 가느
냐 못 가느냐 하는 것은 자연히 친정 식구, 즉 남자형제들과 조카들과의 관계, 그리고 친정
머니 형제 등과의 관계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들 간에는 세계 어느 곳이든지 비교적
'따뜻한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특징이다.
어머니 형제자매의 아이들. 만델바움은 어머니 형제자매들의 자식들 관계를 '여자형제에
대한 남자형제의 보호적이고 인정 많은 관계의 연장'으로 보았다. 이는 형제자매의 유대관
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촌간의 결혼도 그 같은 유대감에서 파생될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남자형제와 여자형제 간의 관계는 다음에서 다루겠지만 이 역시 사회계층에 따라 달라진다.
부유한 남자는 여자형제나 그 자식들의 결혼 때 하는 선물을 통해 가난한 사람보다 유대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 메이어(Mayer)는 이와 관련, 친족관계도 부에 달려 있다고 결론지었
다. 가난한 사람은 인척관계를 지속하는 범위가 좁고 엷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형제와 자매. 내가 남자형제와 여자형제 간의 관계를 별도로 다루려 하는 것은 전 사회계
층에 걸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여자가 결혼을 해서 신랑 가족에 편입된다는 개
념 및 형제자매간 관계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신부를 선물이나 매매로 친정에서 내보낸다
는 개념은, 인도 북부지방에서 형제나 자매가 결혼을 하면 각기 다른 마을에서 살도록 해도
형제자매간 유대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 사실과 상치된다. 이 같은 형제자매간의 관계는 인
도 북부와 서부에서 매년 열리는 라크샤반단(Rakshabandhan)이라는 축제에 잘 나타난다.
1977년 축제는 8월 28일 난돌에서 보름달 아래 열렸다. 이 축제는 결혼을 뜻하는 삼반단
(Sambandhan)과 어원이 같으며, 이 두 단어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반단(산스크리트어는
bandha)은 동여매는 것을 뜻한다. 즉 결혼이란 배우자를 상호 연결시키는 것이며 라크샤반
단은 형제와 자매를 옭아매는 축제라는 의미이다. 이 축제에서는 부인들이 연중 특정한 날
에 남자형제들을 방문하는 과정이 포함되는데, 이날 여자들은 번쩍번쩍 빛나는 장식물을 남
자형제들의 팔목에 달아준다. 이 장식물은 팔목에 매다는 순간부터 불행을 막아 준다는 부
적 같은 것으로, 상호 의존과 존경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대량 생산된 이 장식물은
축제 몇 주 전부터 상점을 가득 채운다. 남자들은 장식물을 하루, 이틀 또는 두달 후인 디발
리(Divali)때까지 낡아 떨어지도록 팔목에 달고 다닌다. 디발리 때는 남자형제들이 여자형제
들을 방문하여 사리나 시계 등을 답례로 선물한다. 남자 형제간의 긴밀한 관계는 카브
(Karve)에 의해 발간된 마하라스트라(Maharastra)의 결혼노래에 잘 묘사되어 있다. 카브는
그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결혼한 여자형제의 집을 방문할 수 있는 친정 식구는 남
자형제뿐이다. 남자형제는 그녀가 삶의 즐거움과 슬픔을 얘기할 수 있는 최적의 상대자이다.
남자형제는 그녀에게 매년 선물을 갖다주지만 그 남자형제가 결혼을 하면 이방인처럼 되고
부인의 영향으로 여자형제를 잊거나 고의적으로 소홀해진다. 앞에서 지적한 결혼노래의 가
사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아들보다도 남동생을 사랑하네. 그와 나는 어릴 때부터 항
상 친구였네. 언니와 나 우리 두 자매는 두 마을의 우물 같다네. 멋쟁이 남동생은 두 자매
마을이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잘 자란 푸른 옥수수밭 같다네(그 옥수수는 두 우물에서 길어
온 물을 먹고 잘 자란다. 남동생은 이웃 두 마을로 시집간 누나들의 사랑으로 튼튼하게 성
장한다). 남동생은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마시려 하다가 누나가 시아버지집에서 학대를 받
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물을 마시지 않네. 신은 나의 왕국인 남편의 집에 모든 것을 충분히
주엇네. 하지만 사랑하는 동생아, 나는 아직도 네가 내개 옷 한 벌을 선사할 날을 손꼽아 기
다리네. 동생이 내게 선물한 옷값은 사리만큼이나 비싼 것. 남동생들이 없는 사람들은 너무
나 비싼 이 옷에 놀란다네. 가장자리에 붉은 줄을 달고 성스러운 라마의 이름을 수놓은 이
아름다운 검은 사리는 나의 사랑하는 동생이 선물했다네. 동생이 오기를 기다리며 길 밖을
쳐다보고 있는 내 눈은 따갑고 충혈되어 있다네. 내 어머니의 아들이 내게 이방인처럼 변한
것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더니 갑자기 그쳤네. 남동생 역시 딸을
얻더니 나를 잊어버렸네. 그는 누나 집에 오지 못하는 핑계를 수십 번 말했네. 그러나 그가
딸 집에 가야 한다면 당장 쟁기를 끌던 소를 걷어치우겠지. 동생은 나의 동생이지만 시누이
들은 내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도 나는 그들을 나의 것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동생은 내
게 1루피 나가는 옷을 사주려 했네. 하지만 그의 부인(올케)은 동생이 반 루피의 옷을 사도
록 만들었네. 부모가 돌아가시면 아버지 집은 내게 없네. 내가 남동새의 집이라도 방문하려
하면 올케는 마을 외곽의 사라이(Sarai)에 묵으라고 하네(사라이는 여행객들이 돈을 내지 않
고 거주할 수 있는 공공건물). 이제 동생은 내게 더 이상 관심이 없네. 동생은 내게 선물할
돈은 주머니에 넣어둔 채 젊은 처제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네(1953:177). 이 노래가사는 도량
이 넓던 동생이 결혼을 한 후 어떻게 부인의 통제를 받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부인은 자매
의 경쟁자가 되어 합동가족의 경우 시누이를 독신자로 부모 집에 남거나 과부가 되어 친정
에 돌아오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결혼한 누나가 라캬샤반단 축제를 맞아 결혼한 남자형
제들 집에 갈 때는 남자형제의 부인 역시 집에 가고 없다. 1977년 난돌이 축제는 주말에 벌
어져 친정으로 가려는 여자들과 차량이 줄을 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던 거리에는 현지 부인
들은 없고 대신 남자형제들을 찾아온 다른 지방이 부인들로 가득 찼으며 요리하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시집 식구들은 친정 형제자매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했다. 이 축제는 주로 친형
제자매들을 위한 것이지만 축제분위기는 보다 폭넓은 친족관계로 번진다. 특히 상류집단과
사회의 주요 인물들은 이날 축제에 참여하여 함께 즐긴다. 우리가 데그햄의 땅콩공장에 앉
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걸어오더니 책상에 앉아 있는 그의 상사 팔목에 장식
물을 달아주었다. 대신 그 남자는 상사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리버 사원의 관리인은 우리집
에 손목 장식물을 놓고 가더니 선물을 받으러 다시 돌아왔다. 다비다벤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웃집 부인 역시 우리에게 장식물을 가져왔다. 이는 부분적으로 이웃간의 정에서 나온 행
동이지만, 주된 이유는 우리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의 사회적 신분으로 보아 우리가 이 지역
에서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다바드의 잘사는 사람들은 이 장식물
을 남자형제들에게는 물론 서로 반대되는 성의 사촌들에게도 준다. 친정 식구에 대한 딸의
중요성은 펀자브의 친척제도를 연구한 다스(Das)에 의해 잘 나타나 있다(1976). 한 타말족
여자와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한 의사가 들에서 여자의 네 남자형제들에 의해 살해되었
다. 평소에는 남자형제들이 자매에게 선물을 주는 역할 정도만 맡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그
녀의 명예를 지켜주는 보호자 노릇을 한다. 다스는 또 다른 예에서 시집간 여자형제가 시집
에서 학대를 받는다는 소식을 들으면 남자형제들이 그 집에 가서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왔노라."고 외쳤다고 전했다. 만일 신부가 젊어서 죽으면 살인이
아닌가 의심하고 그녀의 친족들은 시집 식구를 비난하기도 한다. 남자 형제들간의 지속적인
관계는 선물을 주고받는 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선물교환이 선물을 주고받는 하그(hag)라
는 개념으로 공식화되어 있다. 결혼한 여자들은 친정 식구들로부터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권
리를 갖는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는 이 권리가 딸들에게로 이어져 딸들이 결혼할 때 아들들
로부터 역시 선물을 받는다. 한편 대부분의 상류집단에서 신부 가족들은 결혼할 때 신랑 가
족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 펀자브의 상류집단 딸들은 결혼을 통해 하류집단의 딸들
에 비해 더 강력히 시집에 편입된다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인다. 이는 부분적으로 친정과 시
집의 재산, 지위가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류사회 여자들이 결혼을 함으로써 친정과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만델바움은 인도 전역에 걸친 일반적인 관념을 직접적
이고도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부가 남편의 가족과 합류할 때 그녀는 관행상 경
제적, 법률적으로 남편 가문의 멤버가 된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친정 가문과도 어느 정도의
유대는 계속 유지한다(1970:137)." 형제자매간의 유대는 어떤 면에서는 유럽보다 강한 것은
틀림없다. 형제자매간 관계의 중요성은 도시화되고 또 사람들의 이동이 심해지면서 친족의
유대범위가 좁아지는 사회환경 변화에 기인한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변화가 일어
날 수 있었던 기반, 즉 인도의 '전통적 가족'의 구조를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우
리는 과부의 결혼, 이혼, 가족규모, 음식물의 절제와 예식 등 상, 하류층의 차이점과 관련,
결혼거래의 성격을 점검해보았다. 또 승혼의 개념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우리가 조사한 구
자라트 지역에서는 동급 배우자 선택이 보다 일반적인 결혼형태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일부
집단간 승혼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개인관계와 여자의 위치, 특히 결혼 후 형제
자매간의 지속적인 유대를 살펴보았다. 결혼 후의 형제자매간 유대는 여자가 결혼으로 단순
히 출가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친정과 계속 유대를 유지한다. 이는 형제자매간뿐만 아니라
서로의 자손들에게 어머니의 형제로서 또는 아버지의 누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
음을 뜻한다. 상류층과 하류층 간에 차이점이 또 하나 있다. 하류집단의 관습은 여러 다른
사회생활의 측면과 얽혀 있으며 사회적으로 수용된 자신들 존재의 일면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환경이 나아지면 스스로의 관습을 흔히 상류층 기준에 맞추려고 노
력한다. 이 같은 상승운동은 전반적인 것도 아니며 힌두 개혁운동은 사회정의의 이름으로
하류층의 보다 자유로운 관습을 옹호한다. 이 또한 현대 입법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이혼과
재혼의 경우는 특히 보다 자유로운 형태를 취하는 추세이다. 하지만 그것이 종교적이든 사
회의 이익을 위해서든 상승적응을 하려는 사회적 욕구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은 지참금
이나 딸들의 지위유지 자체가 대부분의 아시아 사회에서는 보다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달
성하는 것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계층별로 서로 유사한 관습의 형태는 인도뿐만 아
니라 중국, 서아시아 등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상류층 부인들은 그들이 생활수준을 유지시키
고 그것을 제공한 부와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지참금을 가질 권한을 갖는 것이다.
딸들에게 보다 나은 지위를 유지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것이 지참금이라고
말한다면, 재산상속이 개별적으로 때로는 합동으로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이다. 그러나 딸들이 결혼을 한 후 친정으로부터 완전히 절연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그들
의 위치가 아들과 동등하다거나 여자가 남자와 같은 방식으로 취급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
다. 영아를 공개적으로 살해하든 은밀히 살해하든 그런 관행이 있다는 사실은 남녀간에는
처음부터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차이는 평생 동안 지속된다. 결혼할 나
이가 된 여자는 빚이요, 결혼할 나이의 아들은 재산이라는 것도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인식
이다. 여자의 역할이 같은 위치의 남자보다 조직적으로는 열등할지도 몰라도 여자들은 나름
대로 자신의 위치를 사회적 계급이나 명성 또는 생활수준에 맞추어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것
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렇지 못할 경우 자신은 물론 친정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
다. 한 여자가 친정에 대해 어느 정도 권한을 가졌다는 것은 남자형제가 없을 경우 그녀가
상속자가 되어 친정 가문을 이어갈 수도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지참금을 선물로 보는 사람
들이 있는가 하면, 사회개혁론자들은 뇌물로 보기도 한다.
8. 북부지방고 남부지방
구자라트나 인도 다른 지역의 형제자매간 관계의 중요성을 논하다 보면 사회계층별 차이
를 떠나 인도 남과 북 그리고 스리랑카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논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물
론 이런 시도는 분명 문제점을 제기한다. 우리가 살펴본 많은 사회계층별 차이는 인도 전역
에 걸친 것이다. 특히 브라만이 관련된 지역, 일례로 고우가 1881년 연구한 남부 쿰바페타이
마을에서는 집단의 주요 참고지침이 문서화된 규범이다. 사람들은 이 규범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시하기도 하지만 문서로 명문화해놓았다는 것은 어느 때고 필요
하면 산스크리트식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힌두교 규율인 다마사
스트라와 관습법에는 일정한 긴장관계가 조성되었다가 세월이 흘러서야 그 균형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 어느 시점에서는 사회계층별 또는 지역적으로 차이가 나
게 마련이다. 문제는 이런 차이점을 지적할 때 잘못하면 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차
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행위자나 관측자가 모두 널리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차이점이 인도 문화의 일관성을 강조하며 인도의 친족 및 결혼제도를 연구하는 사
람들에 의해 부인되거나 소홀히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아마도 전 인도에 걸친 뿌리
깊은 공통의 구조가 있다고 가정하고 있거나 아니면 성문화된 힌두교 관련 서적의 일관성에
너무 집중하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힌두교가 전 인도 지역, 특히 카스트 분야에
영향을 끼친 것을 인정한다 해도 지역적으로 친족제도에 주요한 차이가 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일관성과 다양성
인도의 결혼과 친족제도의 일관성은 루이 뒤몽(Louis Dumont)에 의해 끈질기게 주장되었
으며, 이 같은 그의 주장은 인도 사회의 연구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접근법과 밀접하게 연
관되어 있다. 그는 친족연구에 대한 관심의 부족을 개탄하면서 다른 많은 분야-그는 '사회
적 변화'와 '경제학'을 생각한 듯하다-와는 달리 "여기에는 진정 스스로 정의를 내리는 제
도가 있다. 즉 그 한계가 객관적으로 주어진 제도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반적인 학자들
이 인도에서 연구를 하게 되면 다른 곳에서 위험한 주제에 몰두하는 것보다 성공적이고 유
익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뒤몽의 주장에 동감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친족제도에 대한 그의 접근방법은 일반적으로 문제가 많다. 이는 친족과 결혼제도를 생산
커뮤니케이션 유형, 정치제도와는 독립된 사실상 별개의 분야로 취급하려 했다는 데 가장
큰 문제가 있다. 뒤몽은 어머니의 남자형제와 여자형제의 아들간 관계에 관한 나의 글(1959)
에 논평을 한 적이 있다. 그는 그의 '동맹(alliance)' 이론에 대비되는 나의 '혈통주의'에 반
대했다. 그는 자신의 동맹 이론을 '기능적인 것'에 반대되는 '구조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어떻게 인도 남부지방에서 친족의 구조적 이론을 적용했는가를 설명하고 그
가 말한 결혼동맹을 소개하면서 결론을 맺었다. 나의 주장이 서아프리카의 로다가아와 다른
한편으로 인도 남부의 프라말라이 칼라르를 점검함에 있어서 단지 서로 사회경제적 요인들
을 고려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더 이상 세부적으로 논란을 벌이는 것은 유익한 일이
못 될 것이다. 이 같은 오해는 그의 연구에 적용된 분석구조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며, 또
그가 자산의 연구와 내 연구를 비교해 각각 '구조적', '기능적'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이론적
접근과 관찰에 의한 차이를 혼동시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남아프리카의 어머
니와 남자형제들'(1924)에 관한 래드클리프-브라운(Radcliffe-Brown)의 논문에 대한 그의
평가는 그 의미를 잃었다고 생각한다. 위의 두 학자는 지역 또는 지리적 이유 때문이 아니
라 두 지역간에는 정치적, 경제적 제도에 기본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두
지역의 제도적 차이는 친족의 일부 형식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거나 일정한 분석적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친족제도를 전체적인 사회체제로부터 분리시키려 할 경우에만 무시될 수 있
는 것이다. 이런 접근방식은 사회적, 경제적 체제가 집단 내부 수준에서 스스로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유산이나 상속이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고 있을 때 특히 문제가 된다. 현재 상황을
살펴보더라도 구자라트의 결혼에서 나는 증여를 받을 수 있는 어느 한 부인의 권한은 형제
자매로서, 그리고 딸로서 그녀의 위치와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 같은 관계의 지속은 형
제자매간 서로 방문하고 선물을 주고받는 관습에서 분명해졌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그 부
인은 '교환 이론'이 시사하듯 친정과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아니다. 실제로 여자형제로서 그녀
의 역할은 지속적으로 유지되며, 이것이 매년 열리는 라크샤반단 축제에서 부각되고 있음은
이미 기술한 바 있다.
스리랑카의 형제자매와 재산
인도 남부와 북부의 분명한 차이점은 근친결혼, 특히 사촌간 결혼으로 북부에서는 친족은
물론 가까운 친척간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다. 양쪽 모두 결혼은 같은 카스트 내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 그러나 북부에서는 중국에서처럼 아버지의 가까운 친척간 결혼은 물론 어머니의
친척과도 금지되어 있다. 난돌에서 들은 이야기처럼 '혈족끼리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
이다. 난돌에서 들은 이야기처럼 '혈족끼리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가 긍정적으
로 말하면 '당신은 마을 밖에 사는 당신과 같은 결혼집단(고르)의 멤버와 혼인을 해야하는
것'이다. 이 같은 특정 관습이 인도 남북을 구별짓는 한편, 인도와 스리랑카를 구별짓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여자의 재산에 관한 것이다. 물론 인도 남부의 여러 관습은 인도 반도
와 스리랑카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스리랑카에서는 힌두교 사회이
든 불교사회이든 여자의 재산상 권리는 남자형제와 똑같이 토지나 동산 등에 관해서 같은
종류, 같은 질의 권리를 갖는다. 결혼규범과 친족관계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듯이 토지에 대
한 여자의 재산권과 부모 양쪽의 쌍계적인 사회조직 형태도 확실히 관련되어 있다. 이에 대
해 북부에서는 힌두교 경전에 구체화되어 있듯이 부계혈통을 지속시켰고 여자는 토지재산권
에서 제외되었다.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특징은 분명히 연관되어 있다. 이종 또는 고종사
촌간 결혼 및 여자의 재산권은 남자형제와 여자형제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 남자형제 자식
과 여자형제 자식들의 결합은 어느 면에서 근친상간 금지 및 외부자와의 결혼이라는 관습
때문에 엷어진 유대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형제들도 남자형제들과 거의 같은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정한 단계에 이르러서는 여럿이 재산권에 대한 권리로 나타난
것이다. 인도 남북부지방의 차이를 추적하기 전에 스리랑카서 남녀 형제간 관계의 주요 성
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특히 참고가 되는 것은 스리랑카 싱할리족 사회에 대해 고찰을
한 바 있는 얄만(Yalman)의 연구이다(1967). 얄만은 우리가 품고 있는 일반적인 의문을 제
기하고 전반적으로 남부의 특징을 강조했으며, 인도 반도 친족관계의 일관성에 대해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심층구조 분석'을 적용하려 했다. 또 그의 연구는 탐비아 트라우트만
이 역시 연구한 바 있는 스리랑카의 '극단적인 예'를 민족지학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
를 제공하고 있다. 얄만은 스리랑카와 인도 남부 공동사회의 보다 보편화된 조직에 대해 설
명하려 했다. 그는 이를 위해 공동사회간의 차이보다는 기본적인 공통 요소인 '전통적 구조'
를 살펴보았다. 사고와 행동의 틀이 되고 있는 그 구조는 '일련의 원칙'으로 형성되어 있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그 원칙들은 사회조직의 기본적 요소이다. 변화는 사회조직의 변형에 따
라 이루어지는데 이 같은 변형이 계속되면 사회구조마저 바뀌는 것이다. 사회의 기반이 되
고 있는 사회조직의 기본적 원칙이란 무엇인가. 많은 특정 원칙, 일례로 '족내혼의 원칙'을
포함한 카스트의 원칙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형제자매의 자손간 관계에 비중을 둔 '
일반적인 친족관계의 원칙'도 있다. 쿠르그(Coorgs)의 경우에서처럼, 형제자매들이 분리되어
있으나 그들의 자식들이 결혼으로 결합하는, 그래서 '혈족과 인척이 뒤엉키는 이중원칙'도
있다. 이 이중원칙은 아마도 그 자체가 남자와 여자라는 '신의 창조원리'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인지 모른다. 그가 지적한 일반적 구조의 주요 원칙은 첫째, 가족의 기본적인 조직원칙과
사촌간 결혼 및 형제자매간 자식에 대한 상호 권리 등이다. 얄만은 부유한 집안과 가난한
집안에서 형제자매간 상호 권리의 차이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이런 차이가 부인에 대한
유산에 대한 딸의 권리를 결정짓는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가난과 부의 차이가 여자들에
대한 태도에 차이를 가져오고, 그 차이가 다시 재산의 이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얄만은 더
나아가 원칙적으로 모든 딸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재산을 남자형제와 마찬가지로 나누어 갖
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이는 가난한 사람에게만 해당되고 부유한 집
안에서는 결혼을 하지 않아 지참금을 가져가지 않는 딸에게만 재산을 나누어준다. 얄만이
관찰한 대로 여기서 중요한 점은 결혼할 때 얼마만큼의 지참금을 가져가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많다면 후에 상속을 받지 않는 것에 대한 보상 이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지참금이 얼마나 되는지는 간단히 일반화할 수가 없다. 그것은 순전히 사위의 신분
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부유한 집안에서는 지참금의 규모가 아버지 또는 남
자형제에 의해 조정된다. 어쨌든 승계 차원에서 보면 아들이 재산상속의 주 대상이다." 그는
부유층에서는 바로 이것이 부계를 선호하는 분명한 징표라고 보면서 딸은 아버지의 재산을
할애받는 대상에서 제외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딸들은 어머니의 재산에 대한
권한을 갖는 반면 아버지의 재산은 아들들에게로 간다는 것이다. 그가 '성별 이중 단계'라고
부른 이런 재산이전 형태는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상류사회의 강력한 남계친 성
향의 증거로 보았다. 상류층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는 남자집단의 통솔하에 놓여 남자
들은 그 집단 내 여자들의 운명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조정, 그들의 지참금 규모를 정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상황은 카스트의 관행 및 가족의 권위와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재산
을 소유한 상류층이 중요시하는 것에는 각각 차이가 있다. 얄만은 탐비아(1973:131)처럼 여
자를 통제하는 남자의 역할을 지나치게 과장한 면이 있다. 동성 부모에 의한 재산이전 제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딸에게)는 만일 여자가 남자와 같은 양이나 질의 재산을 받을
권한이 있다면 이는 남녀간 불평등이 어느 일방의 장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탐
비아가 지적했듯이 이 같은 남녀간의 재산이전 분리는 복수결혼의 경우 여자의 자식들을 보
호하는 기능을 할지도 모른다. 즉 부인이 갖고 들어온 재산이 '다른 여자'의 자손에게 이전
되는 것을 막아준다는 것이다. 친정에 머무르고 있는 여자나 데릴사위 혼인을 하는 여자에
게(그 집안에 남자형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럴 수가 있다) 지참금을 주지 않는 것은 남자들
과 같은 급으로 대우를 해준다는 의미이다. 이는 또한 보다 넓은 선택권이 있다는 의미도
된다. 여자가 결혼을 해서 친정을 떠났다가 그 후 남편과 함께 친정에 돌아오면 그들과 친
정의 관계는 변하는 것이다. 여자가 출가를 해서 친정을 떠날 때도 지참금을 남자형제들에
게 두고 갔다가 후에 이전 받을 수 있다. 이는 결혼과 이혼 그리고 거주의 융통성과 관련되
는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 같은 제도가 운용되는 가장 큰 배경은 재산상 가난한 사람
과 부자에 차이가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즉 재산의 분배에 따라 사람들의 태도가 변한
다는 것이다. 실제로 얄만이 노동자 계급 딸들의 지위를 살펴보았더니 하류층에서는 상류층
보다 딸들을 잘 돌보지 않고 관심도 별로 기울이지 않았다. 상류층은 딸들이 적절한 결혼을
할 수 있도록 주선하지만 하류층에서는 부자들처럼 공을 들이는 '사회적 조정'을 하지 않았
다. 하류층은 재산이 없기 때문에 어떤 형식의 결혼을 하든 재산상속과 관련해 지위가 달리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지참금을 상속의 일부로 본다면 재산권의 측면에서는 한 여
자가 자시의 몫을 결혼할 때 받든 부모가 사망한 후에 받든 별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사망한 후에 재산을 받는다면 부모의 입장에서는 살아 생전에 자신들의 손에 더 많
은 재원을 갖고 있는 셈이 되어 커다란 차이가 있으며, 이 경우 딸은 딸대로 결혼과 시집
재산에 덜 매이게 된다. 재산이 많을수록 딸의 결혼생활에 대한 친정 부모의 관여가 많아지
는 것도 분명하다. 결혼이란 여러 가지 가치를 조화시키거나 최소한 비교를 하는 것이기 때
문에, 인도나 그 밖의 지역에서 특히 부유한 사람들의 경우 재산할당이 결혼할 때 이루어지
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상류사회에서는 대부분 여자에게 재산을 부모가 사망했을
때 유산으로 주기보다는 결혼할 때 일찌감치 주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부모들은 딸의 결
혼을 주선하는 초기부터 통제 내지 조정을 하게 된다. 즉 바람직한 또는 유리한 결혼을 하
도록 노력한 후 결혼할 때 재산을 넘겨주는 것이다. 하지만 재산을 일찍 이전시키면 딸이
결혼 후 보다 많은 자유를 갖게 될지 모른다. 여자가 부모로부터 많은 자유를 얻게 되면 특
히 재산에 관한 한 남편에 대해 보다 더 의지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하면 부부는
자신들이 어느 한 배우자의 재산을 관리할 수 있게 되면 부모에게 덜 의지하게 된다. 그리
고 젊은 부부에게 재산을 일찍 넘겨주면 그 부부는 그것을 투자하거나 소비함으로써 삶을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하게 된다. 따라서 부모는 딸들이 결혼할 때 지참금으로 재산의 일부
를 물려주거나 재산이전을 약속만 하고 후에 유산으로 물려줌으로써 부모에게 보다 오랫동
안 의존하도록 하는 선택이 가능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선택은 여자에 대한 상이한 태도와
연결된다. 즉 친족집단의 조직의 성격과 관련되는 것으로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에서는 여
자의 재산권을 인정한다. 그러나 상속을 논할 때는 친족집단의 수준 그리고 보다 폭넓은 정
치적, 종교적 고려를 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아버지 재산(어머니의 재산과 구분되는 아버지
의 재산)의 분할에서 딸이 제외된다면 그것은 그다지 중대한 사건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만
일 부모의 재산에 아버지, 어머니가 똑같이 기여했다면 딸은 아버지나 어머니로부터 또는
부모의 공동재산에서 자신의 몫을 받을 수 있다. 최소한 동급 배우자와의 결혼에서는 그렇
다. 하지만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여자가 부유하거나 영향력 있는 남자와 짝지워지는 로멘틱
한 결혼에서는 그 딸이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할 것이다. 여자가 남자 집에 들어가 사는 결
혼의 경우 동성 부모(homoparental)에 의한 토지의 상속(아버지의 재산은 아들에게만 주는
상속)은 생산수단, 즉 토지가 자손들에게 이전되어도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될 가능서
이 더 많다. 동시에 딸은 어머니의 몫을 되찾기 위해 어머니 남자형제(외삼촌)의 아들(또는
아버지 누이(고모)의 아들)과 결혼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렇지 않을 경우 어머니의 재
산은 어머니 형제들이 차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만일 이전(관리가 아닌)을 목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재산이 통합되지 않고(합동기금이 아닌 이중기금) 별도로 유지된다면-토지의
쌍계이전과 관련된 특징으로-결혼개념 자체에 대한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즉 결혼기금이
상대적으로 느슨하다면 결혼을 통한 결합 자체의 느슨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스리랑카에서
는 인도의 상류집단과는 달리 결혼을 강력한, 분해할 수 없는 결합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들
의 결혼개념은 분리된 남녀의 재산이 합해지는 것이며, 부부 재산의 상속자는 그 부부의 합
동상속자(일례로 적출이 아닌 서자는 제외)라고 명백히 정의하고 있다. 남편과 부인 관계의
친밀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여자가 첩이냐 부인이냐 하는 신분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재
산에 구별이 있으며 유산은 동등하게 나누어진다. 따라서 일반인들은 결혼식이 필요하지 않
을 수도 있다. 부부가 재산을 별도로 갖는 것과 자유스러운 이혼과의 관계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여자가 지참금의 일부로 땅을 받는다든가 또는 그 가능성은 적지만 유산으로 토지를
물려받는다면 그 상황은 분명 친정 가족에게 어려움을 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들의
토지에 대한 권한이 어머니가 가져온 것에 국한된 것이라면 그 영향이 어느 정도 완화되겠
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가족의 재산을 쪼개는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일 여자들이
주거지가 가까운 남자들과 결혼을 한다면 문제는 줄어들지 모른다. 그러나 스리랑카에서 지
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끼리 혼인을 하면 두 가지 중요한 문제에 부닥친다. 우선 출가한
딸이 먼 곳에 살 경우 그녀에게 할당된 토지는 다른 사람과 교환되거나 팔아야 할지 모른
다. 아니면 딸에게 주는 토지라도 분할하지 않고 그냥 두면서 여자의 오빠가 계속 정착, 그
곳에서 나오는 소득을 그녀에게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자가 시집을 가도 자신에게 할
당된 토지에 대한 권한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달리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도 공동 상속인들로 구성된 합동가족의 경우 문제가 있다. 각 형제자매의 몫은 원칙적
으로 나누어져 있음에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여러 해 동안 재산이 형제자매들간에 공식적
으로 분할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형제자매간은 물론 남편
과 부인, 그리고 그 자식들 간에 종종 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재산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느냐에 따라 조카의 삼촌 또는 외삼촌과 유대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들간의 관계는 재산이 어머니와 그 형제들 간에 분배되지 않았
을 때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이들간 관계의 질은 형제간 재산이 나누어졌
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이는 아프리카의 경우와 어느 정도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
프리카의 모계사회에는 어머니 남자형제의 재산은 그 남자형제가 죽으면 자매들에게만 상속
된다. 부계사회에서 아버지는 딸들의 아들들에게, 즉 자기 후손의 여자 자식들에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는다. 나는 앞서 인도 북부지방의 형제자매간에 지속되는 유대관계에 대해 살펴
보았다. 그 요점은 결혼한 여자들이 친정과 그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그들은 결혼으로 '주어버리거나 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자들이 결혼해서 시집 식구
들과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친정 식구들과의 친족관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 북부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자는 토지를 상속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결혼할 때 지참금
형식으로 토지를 할당받지도 않는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상류층에서는 여자도 지참금으로
또는 선물로 토지를 받기도 한다. 여자가 토지를 받는다는 것은 농업생산의 기본적 수단에
대한 권리를 갖는 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부동산에 대한 여자들의 권리는 동산
에 대한 권리와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결혼한 여자가 자신에게 돌아온 토지를
거리관계 등의 이유로 다른 토지로 바꾸거나 남자형제들이 관리하도록 하지 않고, 이를 효
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가까이 살고 있는 남자의 결혼을 해야 한다. 이 때문에 사촌과
결혼을 하면 재산을 하나의 결혼기금에 통합시킬 수 있고 형제와 자매가 결혼을 해서 뿔뿔
이 흩어져야 한다는 정서적인 불안을 해소시켜줄 수도 있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 집에 가서
사는 통상적인 결혼이 압도적인 사회에서는 여자에 대한 토지의 상속이 논리적인 문제를 야
기하는데, 이는 사촌간 결혼 또는 다른 형태의 '가까운 사이'끼리 결합할 경우 부분적으로나
마 완화될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배려가 그런 결혼관습이나 사상 또는 재산분배의 유일한
배경은 아니다. 이 같은 배려는 여자가 토지 지참금을 받지 않는 남부지장 전체와 많은 다
른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남부에서도 이와 유사한 배려가 있음을 보여주겠지만 이처럼 광범
위하게 퍼져 있는 제도에 대해 만족할 만한 한 가지 요인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
자에 대한 토지상속은 친척간 결혼이 아니라도 있을 수 있으며, 또 친척간 결혼이라도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부 사촌간 결혼은 재산분할을 막고, 그래서 형제자매들의 공통된 이
익을 보호하기 위해 서둘러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음을 여러 예가 증명해주고 있다. 나는 토
지 지참금이 없는 곳에서도 이와 유사한 요인들이 남녀 형제들간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인도 남부 대부분의 집단에서는 남자형제가
집안에서 '지정된 딸'만이, 데릴사위제로 결혼을 함으로써 아버지의 토지를 이어받을 수 있
다. 그러나 첫째로 지참금 형태로 동산을 받는다는 사실, 둘째는 특별한 환경 아래서만 토지
에 대한 권한을 갖는다 해도 여자들은 남녀 형제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기 위해 때로
자신들의 권한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들이 토지에 대한 권한을 유보하거나 그렇게
하도록 압력을 받을 때 그들은 남자형제들, 보다 일반적으로는 친정 가족에게 더욱 더 지속
적으로 토지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있다. 일단 토지를 받으면 그들은 친정과의 유대가 끊어
지고 더 이상 친정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극
단적인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스리랑카에서는 이 같은 공식적인 관계 단절이 없다. 그들
은 지참금을 친정에 도로 가져감으로써 상속을 받을 때 자신의 몫을 요구할 수 있는 '선택'
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에 분리되었던 것을 다시 합치는 경우를 남부지방에서 종종 발
견할 수 있다. 스리니바스는 인도 남부 쿠르그에 대한 보고에서 사촌간 결혼이 사실상 남녀
형제들간의 관계단절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1952). 형제간 관계가 단절되면
그것을 다시 회복하는 데 한 세대가 걸린다고 흔히들 말한다. 사촌간 결혼에 대한 이 같은
해석은 여자들이 결혼으로 남자집단 사이에 교환된다는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사
촌간 결혼은 호주의 사냥이나 수렵사회보다는 비교적 복잡한 인도 남부 사회의 관습형태에
적합한 것 같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같은 보편적인 관습은 생산제도와 다른 많은 요
인의 변화와 함께 그 기능이 변하는 것이다. 모계사회에서 남녀 형제관계의 중요성은 뉴기
니아에 대해 연구한 말리노브스키(Malinowski) 등 여러 학자들에 의해 강조된 바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은 쌍계사회에서 이들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인도 북
부의 부계사회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여러 증거가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결
혼이 여자의 교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관념을 수정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특히
부계사회에서는 여자를 남성들 사이에 교환의 단위로 취급한다는 개념은 결혼 후에도 남녀
형제간에 유대들 지속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일부 부계
사회에서는 남녀 형제가 거의 갈라서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여
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의 친족집단에 편입된다고 말했다(Gluckman 1950). 그러나 공간적인
분리와 사회적 관계의 단절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북부지방과 남부지방
통일과 분리. 스리랑카의 '특별한' 경우를 살펴보았으므로 이제는 인도 남, 북지방의 차이
점과 유사점을 알아보자. 분명히 남, 북지방간에는 유사점도 많고 차이점도 많다. 우리는 광
대한 지역과 많은 인구를 다루었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힌두교 영향을 강력히 받은 지역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 종교 및 사법적 지침인 브라만 학자들의 저술에 의해
최소한 2천 년 동안 영향을 받은 이 지역에 대한 그들의 지배적인 역할을 분석해보기도 했
다. 또한 우리는 중심 또는 주변적인 문화와 함께 지배적이며 토속적인 문화의 문제점을 다
루기도 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 차이점을 '뿌리의 통일성' 위에 '표피의 변화' 정도로 보기
도 한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앞서 지적한 학자들에 의해 주장된 것으로 스리랑카를 관찰
한 얄만(1967)이나, 미얀마와 동남아를 포함한 보다 넓은 '인도세계'에 대해 연구한 탐비아
(1973)도 또 다른 면에서 그 차이점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같은 접
근방식은 일부 차이점에 대한 기본적인 성격을 간과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인류
학자들이 중심과제로 삼고 있는 가족제도의 요소를 다룰 때 그 차이점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표피적인 차이와 대조되는 근원적인 유사성에 대한 문제는 계속 추적할 만한 가치 있
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차라리 그 변화와 변화의 유사성을 자세히 고찰하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중요할지 모른다. 인도를 지역적으로 살펴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농경사회
의 중심과 주변에 해당하는 평지와 산지로 나눌 수도 있다. 그러나 남고 북으로 나눈 것은
결혼제도에 대한 관심 및 언어상의 구분에서 오는 관련 용어 때문이다(Cohen 1967). 인도
문화의 기본적인 통일성을 가정하는 학자들도 남과 북의 폭넓은 '표면적인' 차이점을 인정
한다. 일부 학자들은 지역적인 차이를 때로 인종적 의미를 풍기는 인도-아리안과 드라비다
라는 언어적 차이로 말하기도 한다. 또 때로는 목축과 농경부족 사이의 차이로 나타내기도
한다. 물론 그 구분의 경계는 앞으로 점검될 주제의 특징에 달려 있다. 어떤 경우는 남과 북
그리고 중부로 나누는 것이 더 적절할 때도 있다. 어떤 때는 지역적 구분 없이 다루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친족제도의 변화에 관한 한, 부족민들이나 히말라야 고산족을 제외하면,
결혼 패턴의 차이 및 드라비다와 인도-아리안 언어에서 파생된 용어의 차이 문제에 직면하
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여기서도 불교를 믿고 인도-아리안어를 사용하며 결혼
풍속과 친족용어와 관련, 드라비다족의 관습을 따르는 싱할리족은 예외이다. 그러나 남과 북
의 사회문화적 차이의 경계는 단지 그 차이에 의해서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인구학적 연
구나 친족제도의 변화에 대한 논의에서 다이슨(Dyson)과 무어(Moore)는 구자라트, 라자스
탄, 우타르 프라데시, 마디아 프라데시, 펀자브, 하리아나 등을 북부지방에 포함시키고 케랄
라, 타밀 나두, 안드라 프라데시, 카르나타카 및 마하라슈트라 등을 남부에 편입시켰으며 비
하르, 웨스트 벵골, 오리사 등 동부의 주를 중부로 분류했다(1983). 이들은 다른 때는 비하르
를 북부로 간주하고 데칸 고원 북쪽 사트푸라 산지를 경계로 하는 소퍼(Sopher)의 구분방식
을 채택했다. 이 구분은 대체로 인도 '대륙'과 '반도'를 경계로 이루어졌다. 이 경계는 다시
인도-아리안과 드라비다 언어의 구분과 연관되어 있다. 인도-아리안족이 침략하기 전 드라
비다어가 퍼져 있을 때는 물론 이런 구분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런 형
태는 최소한 1천 년 동안 이루어져온 것으로 보인다. 트라우트만은 드라비다족의 친족에 관
한 종합적인 연구에서 언어와 학술 전문용어상의 경계는 대체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
적했다. 언어는 사회적 경계의 지표로서 대단히 중요하지만 때로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
다는 것이다.
결혼과 재산 : 법과 관습. 앞에서 예비적인 고찰을 했지만 이제는 명백한 대비점을 살펴보
자. 첫째는 결혼의 형태에는 폭넓은 차이점이 있어 북부에서는 친족간 결혼이 금지되어 있
으나 남부에서는 장려되었다. 이 같은 사실과 관련, 친족에 사용되는 용어, 힌두제도에 대한
북부의 변화, 그리고 남부의 드라비다어 학술용어 등에도 차이가 있다. 힌두 사회에도 그 차
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남쪽의 관습도 전통적인 결혼규범에서 변한 것이 적지 않다. 남부
출신의 학자들은 규범과 관습을 융화시키거나 학문적으로 정당화시키려고 노력한다. 고종
또는 이종사촌간의 결혼을 논리적으로 옹호한 마드하바(Madhava)는 정상적인 결혼에서는 '
여자를 주어버리고' 친정 일가와는 관계를 단절하기 때문에 남자는 완전히 자유로워 어머니
남자형제들의 딸과 결혼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사촌을 부인으로 얻더라도 그녀
는 친정과 관계를 끊고 시집의 남편 가계에 합류하기 때문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결혼을 명백하게 금지하는 전통적인 규범은 부인이 선물의 일부가 아니라 친정 가
계의 멤버로 계속 남고 따라서 어머니 남자형제의 딸(또는 자매의 딸이나 어머니 자매의
딸)로서의 역할을 계속한다는 것이다(Trautmann 1981:304). 이 같은 논쟁은 있을 법한 일이
다. 왜냐하면 결혼과 관련해서는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 규범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여자
를 결혼에서 선물로 주어버리는 것이어서 친정과는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친정 친족과는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힌두교 규범에서 벗어나는 여
러 가지 변화가 있음은 법률전문가는 물론이고 오늘날의 남부 사람들도 인정하고 있다. 이
런 차이는 성서와 북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 왔다. 법
학자들의 변론은 브라마(힌두교 창조신) 사상에 의한 것으로 그들은 결혼을 '여자 선물'이
며 그녀는 결혼으로 남편의 가족에 편입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남부와 북부 사이의 결혼
에 대한 차이와 지역간 경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트라우트만은 자프나에서 카시미르에까지
이 나라의 민족 지학은 결혼을 순수한 선물이라는 범인도적 사고 속에서 여러 지방의 다양
한 형태와 적응들을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순수한 선물'이라는 사고는 선물을 받는 사
람은 브라만인들과 옛 인도의 성전인 베다를 가르치는 선생들뿐이라는 개념과 완전히 일치
한다. 그들은 또 선물이란 윗사람에게 가는 것으로 주는 사람은 선물(보이는 물질적인 선물)
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종교적 선물은 끊임없는 희생과 '희생의 대용물'을
요구한다. 한편 크샤트리아 계층은 정복을 통해 얻는 소득인 하층민들에게 위엄이 깃들인
선물을 한다. 바이샤는 상업에 종사하고 수드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신 임금을 받는 등
여러 교환형태를 취한다. 이러 교환형태는 사회계급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이루어진다. 선물은
브라만 계급에게 주는 것이 자신의 친족에게 주는 것보다 우선이다. 부계조상에게 제물을
바칠 때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속세의 가장 적절한 수령자는 브라만이다. "친족이 먹는 음
식은 실은 잡귀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것은 조상에게 도달하지 않고 신에게도 가지 않는다.
그것은 이 속세를 맴돌다 하늘까지 갈 힘을 잃는다. 이는 마치 송아지를 잃은 암소가 방황
하다가 다른 마구간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트라우트만이 인용한 아파르탐바 다르마 수트
라의 말)." '선물을 준다'는 이 같은 사고의 의미는 그 사회제도에서 브라만이 차지하는 위
치, 생산자가 아닌 성직자로서의 위치와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속세와 성서 사이의 중개자
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전문적 역할에 대해 다른 계급의 사람들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자의 지위와 관련, 남부와 북부 사이에는 또 다른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여자와
재산 그리고 여자와 남자의 관계이다. 이 경우 결혼형태와 용어에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여자의 권리가 점점 증대해서 스리랑카의 불교 싱할리족이나 힌두교
타밀족처럼 되는 것이다. 그들 사회에서는 토지를 포함한 재산에 대한 권리를 아들과 딸들
이 거의 비슷하게 갖는데, 토지의 경우 여자들은 지참금이나 상속으로 받을 가능성이 높다.
남부에서 여자가 재산권을 갖는다고 할 때 그 재산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는 매우 복잡하다.
브라만 계급은 인도 북부의 관습을 따르고 미타크사라의 규정에 복종한다. 그러나 여자에게
재산권을 보다 많이 허용하는 지방관습도 있다. 탐비아는 이것이 인도의 단계 및 단일 지방
거주에서, 스리랑카의 쌍계 및 양 지방 거주로 변화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변화란 모계사회인 낭구디 벨랄라르(Nangudi Vellalar)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곳에서
는 여자의 동산과 토지에 대한 권리가 지참금 형식으로 유지되었다. 이런 현상은 스리랑카
캔디의 싱할리족뿐만 아니라 벨랄라르 자프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타밀 나두의 낭구디 벨
랄라르에서는 신부의 부모가 보석, 토지, 살림살이 등으로 구성된 지참금을 제공한다. 토지
를 포함한 재산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각각 달리 이전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딸
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이들에게 주택은 여자의 몫이고, 따라서 부부는 여자의 집에서 거처
하며 아버지 여자형제들 즉 고모의 딸과의 결혼이 선호된다. 그러나 여자의 재산권 관습은
위에서 말한 것 이상으로 널리 퍼져 있다. 뱅골 마을에서는 신부가 이론적으로는 남자형제
들과 동등하게 가족재산 중 한몫을 가질 권한이 있다. 이때 북부에서는 보통 토지가 제외된
다. 그러나 이곳에서 여자가 동산은 물론 토지에 대한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은 개념상 일
보 진전된 것임에 틀림없다. 스리랑카 밖에서 여자의 토지권이 인정되는 곳은 모계사회에서
였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도 여자가 항상 토지권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카마스에서는
때로 딸이 결혼할 때 토지를 주며 이 같은 관습은 안드라 프라데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Reddy 1979). 또 일부 브라만 부계 카스트 사회에서도 그랬다. 고우(Gough)는 쿰바페타이
에서 지참금에 토지를 포함시키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물론 남자가 아들이 없을 경우 자신
의 토지를 '선택한 한 딸의 아들'에게 주기도 했는데, 통계학적으로는 약 20%의 가정에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 만일 가족으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분리, 소유했던 한 남자가 자식
이 없이 죽었을 때(이론상 이 역시 약 20%가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의 토지는 미망
인 소유가 된다. 그녀가 아들을 양자로 들이지 않으면 그 토지는 그녀가 죽은 후 친정으로
돌아간다. 물론 이런 때는 시집과 친정 간에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한 남자가 자력
으로 확보한 토지 등 재산은 보통 아들들에게 넘어갔으나 부인이나 딸에게 물려줄 수도 있
다. 이런 식으로 부인이나 과부들은 종종 토지 소유자가 되었다. 영국 통치하에서 등록이 실
시되어 1897년에는 토지 소유자의 12%가 여자로 나타났다. 스리랑카와 모계사회를 예외로
한다면 여자에 대한 토지이전은 인도 남부 전역을 통해 법으로 받아들여졌던 미타크사라의
규율에 배치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법정도 딸에 대한 토지이전을 인정하길 꺼려해 조그만
토지의 경우 선물로 간주했다. 하지만 분쟁이 생겼을 때 그들이 이 문제를 법정에 들고 갔
다는 사실은 일찍부터 어느 정도는 여자의 토지권을 인정하는 관례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
이다. 가족재산에 대한 남과 북의 개념 차이를 대비시키면서 손타이머(1977)는 북부에서는
가족재산이 오로지 남자 쪽에 귀속되지만, 남쪽에서는 공동재산에 대한 가족 전원의 이해
때문에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학자들 역시 남과 북 사이에는 여
자의 재산에 대한 개념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 차이점 중 하나는 북부의 인도법에는
여자의 재산을 어느 정도 분리하고 있으나 남부에서는 일례로 마드라스에서는 관습이 미타
크사라에 배치, 결혼 후까지도 딸에게 적당한 수준의 부동산을 선물로 허용하고 있다. 최근
남부에서 두 가지 중요한 법률을 제정했다. 하나는 케랄라 주에서, 다른 하나는 안드라 프라
데시에서의 일로 딸의 권한을 유지시키는 내용이었다. 케랄라에서 1976년 제정된 이 법은 '
분리되지 않은 힌두 가족'을 철폐하는 것으로 미타크사라 체제에 남아 있는 아들과 딸의 차
별을 지워버린 것이다. 안드라에서는 보다 최근의 일로 미타크사라에 의해 규정된 '태어날
때부터의 권리'를 결혼하지 않은 딸에게도 확대시켜 이미 아들들이 즐기고 있는 권리와 동
등한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남부에서는 여자에게 재산뿐만 아
니라 생산의 기본 수단을 포함, 비교적 동등한 재산권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불교를 믿고 있는 스리랑카의 싱할리족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데, 이
곳은 북쪽에서 유래한 힌두법이나 이슬람의 정복에 직접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슬람의 정
복은 일례로 사원을 약탈하면서 남쪽의 다른 지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라나 토지에 대
한 여자의 권한은 캔디의 법은 물론 힌두교를 믿는 타밀족의 테사왈라마이(Tesawalamai)법
에도 사실상 인정되어 있었다. 지참금은 부부에게 속하는 재산의 중요한 일부로 부계사회
또는 힌두교의 다마사스트라 규율의 이족간 결혼(족외혼)과는 달리 부동산도 포함되어 이혼
이나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는 공동재산이 되었다. 따라서 남쪽은 결혼형태에서 그리고 지방
에 따라(스리랑카와 인도 남부 일부) 여자에게 주어지는 재산의 종류, 특히 토지의 포함 여
부등에서 힌두 전통과 달랐다. 이 같은 변화나 차이는 법률적 토론, 정당화 또는 타협의 대
상이 되고 있고 결혼의 형태나 여자의 재산문제는 관습적인 면에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여자에 대한 재산증여는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문제는 재산증여에 농업
의 기본적 생산수단이 포함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남쪽과 북쪽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가족재산 중 딸에게 할당되는 비율에 차이가 있었다. 그 비율에 대해서는 별로 정확한 정보
가 없으나 일부 저명한 학자들은 여자의 지참금이 대략 남자형제 몫의 4분의 1이라고 보고
한 바 있다(Sontheimer 1977:53). 그러나 남부 쿰바페타이의 브라만인 중에는 딸의 몫이 남
자형제들보다 더 많은 경우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가족의 경제력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
는 토지, 딸에게 준 지참금 그리고 딸의 결혼식 비용으로 평가된다. 결혼비용에는 사치스러
운 연회, 시가에 대한 옷, 값나가는 선물, 초청한 음악 연주자들에 대한 수고료, 신부가 이용
한 택시요금 등이 포함된다. 지참금에는 신부를 위한 비단, 면직물, 상당량의 금과 보석, 놋
그릇이 요구된다. 신랑 가족은 계약서를 통해 신부를 위한 1에이커 이상의 땅이나 신랑에게
즉시 지불할 현금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고종사촌간 결혼을 할 때는 보석이나 놋그릇 등 지
참금이 한정되고 신랑에게 다른 특별한 선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결혼
이 유사한 사회경제적 수준 내에서보다 멀리 사는 사람들끼리 이루어지고 또 때에 따라서는
이방인들끼리 하는 경우가 늘면서 지참금의 양도 크게 증가했다. 1952년 쿰바페타이에서는
한 브라만인의 딸이 결혼하는 데 아버지가 지참금 및 결혼비용으로 모두 1천 루피부터 1만
2천 리라까지 지불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정도의 금액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받는 유산의
금액과 맞먹거나 그 이상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쿰바페타이의 지참금은 분명히 너무 많
아 19세기 말 각 가정이 빚더미에 올라앉는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딸이 많은 브라만인은
파산을 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우는 이런 현상이 '새롭고 경쟁적인 개인
기업의 경제상황'으로 사람들이 보다 교육을 많이 받고 부유한 신랑을 맞아들이기 위해 자
신들이 지출할 수 있는 이상으로 결혼비용을 들였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지참금이 경쟁의
특성이 있는데다 결혼대상의 범위가 넓어지고 소비재가 대량 생산됨으로써 사정이 더욱 악
화됐다. 나는 앞서 고종사촌간 결혼과 여자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 부여의 논리적 연계를 지
적한 바 있다. 재산에 대한 여자의 요구가 크면 클수록 친척간 결혼에 대한 압력이 강해진
다. 스리랑카의 경우 가까운 친척간 결혼은 여자에 대한 토지권의 부여와 관계가 있다. 우리
는 여기서 부동산 및 생산의 기본적 수단뿐만 아니라 흔히 토지 등 가족재산에 부수하는 특
별한 유산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가치 있는 유산이란 생산요소로서 또 조상의 넋이
깃들인 장소로서 땅의 신성화와 관계가 있다. 가까운 친척간의 결혼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유지하고 그 권리들을 통합하는 데 도움이 된다.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손타이머는 고종
또는 이종사촌간 결혼을 가족 내 재산유지와 연결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캔디법에
는 외삼촌의 딸이나 고모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때로는 의무처럼 되기도 했다.
일부 관습은 사촌간 결혼을 거부한 사람은 그 또는 그녀의 재산 몫이나 지참금에 대한 권리
를 몰수해서 그 당사자와 결혼을 하겠다는 사람에게 주기도 했다. 이런 모든 조치는 토지
등 재산을 소규모의 친족집단 내에 유지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관계의 차이
남편과 부인. 토지에 대한 여자의 권한과 관련해 흥미로운 관점은 스리랑카의 경우를 살
펴보면서 나타났다. 스리랑카에서는 여자들이 남자형제들이 있다 하더라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결정적인 요소가 부부의 거주와 관련이 있다. 또 거주에 대한 융통성은 부부생활의
융통성과 관련이 있다. 캔디의 싱할리족 가운데는 단순히 동거상태와 같은 부부생활이 존재
한다. 탐비아가 '느슨한 상태'라고 말한 이 동거는 부부의 결합이 해체되기 쉽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쉽게 이혼이 이루어지는 현상은 스리랑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도
남부 특히 모계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형태로 남부의 관습과 북부 하층민의 관
습 사이에는 일반적인 유사점이 있는데 둘 다 힌두 정통성에서 벗어난 변화라고 할 수 있
다. 보다 넓게 보면 남부와 북부의 가장 현저한 차이점은 근친간 결혼이냐 아니냐 하는 것
이다. 카브는 그이 보고서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며 개인간의 관계, 특히 여자가 부
인으로서 느끼고 경험한 것 등 많은 의미 있는 사실을 들추어냈다. 그는 인도 북부지방에서
촌락 외 결혼을 강제함으로써 생기는 효과를 생생하고 민감하게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
다. 어린 나이에 친정 마을 밖 외지인와 결혼한다는 것은 소녀의 생애에 엄청난 위기로 받
아들여진다. 인도에서 결혼은 신성한 예식으로 어떤 정상적인 남자나 여자도 이 같은 성사
를 이루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 믿는다. 인도의 많은 공동사회에서는 만일 노처녀가 죽으
면 시체를 놓고 혼례를 치르어 결혼한 부인의 명예를 얻은 다음 화장을 한다. 반면 남자에
게는 보다 많은 자유가 주어진다. 성년식을 치른 남자가 결혼을 하지 않고 죽으면 귀신이
되는 것으로 믿는다. 어린아이를 두지 않고 죽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확고한 신념은 여자들로 하여금 결혼을 하지 않으면 불행을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결혼이
란 화려한 것이며 즐거운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 어머니와 헤어진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다. 수많은 말과 글 속에 이런 감정이 표현되고 있다. 특히 부모의 집을 떠나는 어린 소녀의
고통은 수백 개의 대중가요에 잘 나타나 있다. 신부에게 남편은 그림자 같은 인물이며 현실
적으로 상대할 사람은 시부모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 부담은 대단한 것이었다. 편안한 마음
에서 탐닉하고 놀던 친정을 떠나 외지인에게 시집가 조그만 실수에도 힐난을 당할 마음의
각오를 한다는 것은 여간한 두려움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집을 가서도 여자는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맞을까봐 늘 걱정이다. 신부는 사내아이를 낳고서야 남편의 집을 자신의 집으로 알
고 푸근한 느낌을 갖는다. 결혼으로 합해진 두 가족 사이의 정서는 존경받는 아버지는 딸
집을 방문해서도 음식을 먹지 않는 관습에 잘 나타나 있다. 그 관계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관계로 딸을 준 사람은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는 극히 공식적인 경우가 아니면
딸의 집에 거의 가지 않으며 대신 남자형제들이 자주 누이 집을 방문한다. 따라서 북부의
대중가요에는 한 소녀가 부모의 소식을 갖고 오는 사랑하는 비르(남자형제)를 기다리는 내
용이 많이 담겨 있다(1953:130). 그러나 근친간 결혼을 하는 남부의 상황은 북부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남자는 낯선 여자를 신부로 삼아 집에 데려오지 않는다. 결혼은 기존의 유대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결혼은 두 가족의 결합을 더욱 다지고 친족집단 내의 간격을 좁히는 것
이어서 북부의 관념과는 반대되는 경향을 보인다. 결혼에 대한 남부 사회의 분위기와 정서
는 북부와 다르다. 아버지의 집과 시아버지의 집 사이의 구분이 북부처럼 현격하지 않다. 신
랑 집에서 신부의 행동은 훨씬 자유롭다. 결국 남편은 사촌이거나 고종사촌이고 시어머니는
할머니이거나 아주머니다. 때문에 그녀는 부모의 집과 결코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친족과의
결혼으로 신부는 자기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지 않는다. 신부는 시집과 친정 사이를 자
주 왕래하고 친정을 방문해서 오랫동안 머무르기도 한다(1953:228). 실제로 남부에서 결혼상
대의 범위가 현대적인 변화로 점차 넓어져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북
쪽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참금 죽음'이 보도되고 있는 데 그 원인이 있는지 모른다. 더욱이
최근 프라사드에서의 조사(1987)에 따르면 결혼 후 추가 지참금을 가져오라는 압력(처음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서 오는 것이거나 추가로 더 요구하는)이 첫 번째는 남편에게서, 두
번째는 시어머니에게서 가해진다는 것이다. 이 같은 추가 요구는 남편이 자신의 재산을 축
적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럴 경우 남편은 결코 '그림자'가 아닌 것이다. 인척 사이
에서 고립된 부인은 보다 제한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분명하다. 청소
년기에 조혼을 한다는 사실은 여자가 자신의 친척과 교분이 적은 환경에서 시집 일가와 깊
이 교류를 하며 남편 특히 시어머니의 주도에 이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어머니
의 학대는 흔히 불행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아이, 특히 아들을 낳아
어머니가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시집 식구나 남편에 의해 장악되기 때
문에 어머니가 되기 전에는 긍정적인 인상을 남기기가 어렵다. 여자는 하찮은 유순한 존재
로 인식되다가 중년이 되거나 말년에 남편이 병약해지면 가정을 이끌고 주도하는 적극적인
존재로 부각되는 것이 보통이다(1953:135)." 그렇지 않으면 여자들의 행동에 대한 인습은 보
다 제한적이다. 북쪽의 합동가족은 남편, 부인, 시부모, 며느리, 아들, 딸, 시누이, 시동생이
함께 사는 대가족이다. 각각의 구성원이 해야 할 일과 각자가 향유하는 즐거움은 어는 정도
는 인습에 의해서 결정된다. 각자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친족간 행동규범이다. 남자
는 부인보다 나이 많은 부인 친척들에게는 공손하게 대하며 부인의 남동생이나 처제들에게
는 농담을 한다. 남자는 부인이 살아 있는 동안 또는 부인이 죽은 후 처제와 결혼을 할 수
도 있다. 많은 민담이 부인 자매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1953:135). 북부의 여자는 행동이 보다 제한적이다. 집안에서도 나이 많은 남자 앞에서는
얼굴을 가려야 한다. 남부에서는 상류집단에서만 그렇게 하는데 부인은 남편의 손위 형제들
앞에서 얼굴을 가린다(Mandelbaum 1970:64). 동시에 여자 친정의 재산이 중요하다. 그것은
상류층에서는 친정이 영원한 기부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남부의 일부 지방에서는 신랑의
가족이 신부 가족보다 더 부자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수혼의 관습이나 외지인
과 결혼, 아이를 얻는 것은 점차 불명예로 여겨졌으며 후에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점차
순결과 극기가 높은 덕목으로 간주되었다. 여성의 순결과 개개인의 상속 및 결혼은 비록 수
혼을 인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지는 않았지만 점차 낡은 관습으로 만들었다. 과부의 재혼도
하층사회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남부에서는 수혼의 형태는 아니지만 재혼이 전
반적으로 허용되었다. 이에 따라 남부에서 양자를 맞아들이는 관습이 적어졌을 가능성은 있
다. 그러나 과부의 재혼이 후계자가 없는 남자에게 자연히 그 문제를 해결해주고 일반적으
로 여자의 행동에 대한 억압을 풀어준 계기가 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남부에서는 이미 '
여자들이 많은 독립을 향유했고 이혼과 재혼이 널리 행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관습은
브라만의 규정에 위배되는 것이다. 또 북부에서는 이것이 상류층보다는 하류층의 전형적인
특색이었다.
형제와 자매. 다른 문화권에 널리 퍼진 일부 결혼의 관념에 대해 수정을 시도하면서 나는
상당한 시간을 결혼 후 형제자매의 지속적인 관계를 논하는 데 할애했다. 형제자매간이라는
개념의 속성상 그리고 현재 이용 할 수 있는 자료의 부족으로 형제자매 관계의 유사성이나
그 상이점을 적절히 평가하기는 어렵다. 형제와 자매가 남부에서 더 자주 교류하고 접촉하
는 것은 틀림없다. 그것은 결혼이 가까운 친척간에 이루어지고 형제자매들에 대한 속박이
적기 때문이다. 특히 스리랑카에서는 토지에 대한 공동의 관심이 그들을 한데 묶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자체가 결혼 후 폭발물이 될 소지도 있다. 즉 재산에 대한 이
해가 서로 얽힐수록 후에 알력을 빚을 위험이 더 크다는 것이다. 여자가 타지로 출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여자가 토지를 지참금으로 가져가지 않고 남자형제들에게 남겨두고, 따라서
여자는 결혼 후에도 자신에 대한 형제들의 지원을 공개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유지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여자는 토지를 시집에서 멀리 둠으로써 혹시 있을지 모를 남편의 이
롭지 못한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북부에서는 형제자매들이 상대적으로
적게 만나고, 상호 교류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유대는 깊지 않다. 그렇다고 그들 유대의
강도가 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은 서로의 갈등이 적은데 그것은 서로에게 요구
할 공식적인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 여자들은 결혼 후 단절감을 느끼기 때문에 남자형
제들에 대한 의존심이 더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형제자매간의 관계는 결혼 후에도 계속되
지만 북부에서는 남자형제들이 누이의 시집 가족에 대해, 최소한 상류층에서는 '열등'한 위
치에 놓이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남부의 타밀족 집단에서도 신부 가족은 신랑 가족에 비
해 열등한 위치에 놓이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것이 단적으로 나타나는 예가 결혼식이
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 같은 인식이 줄어들고 있다. 따라서 친족 수준에서는 차등이 없는
셈이다. 이는 라즈푸트, 파티다르 등에서의 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는 북부에서도 대략 마찬가
지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열등한 위치'는 형제자매간 관계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다. 케랄라의 남부디리 브라만인 사이에는 장자만이 같은 카스트의 여자와 결혼할 수 있고
다른 형제들은 모계 나야르(Nayar) 여인만을 배우자로 택하고 여자형제들은 노처녀로 남는
다. "남자형제와 자매들이 관계는 결코 가깝지 않다. 실제 여자형제들을 단순히 가족자원을
고갈시키는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Mencher & Goldberg 1967)." 이 문제는 나중에 남
녀 사망률의 차이를 살펴볼 때 다시 논하기로 하자. 하지만 남자형제와 누이의 관계는 부인
으로서의 위치와 비교해볼 때 남부나 북부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셈이다. 남자와 누이의
자식들 즉 조카들과의 관계도 남북간에 상대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친척간에 혼인
을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결혼형태와 상속의 유형에 따라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것은 분
명하다. 그러나 커다란 차이는 재산이 상속되는 방법이 다양한 모계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 사회에서는 항상 재산이 여자를 통해 이전되며 그 상속은 여자나 부인으로서의 위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남자형제의 아들과 여자형제의 아들. 이들간의 관계는 명백히 어머니 형제자매간
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고종사촌간 혼인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자식과 어머니
남자형제와의 관계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사촌간 결혼이 장려되는 곳이나 실제적으로 남부
에서처럼 친족관계가 얽혀 있는 곳에서는 시부모와 상대 부모의 형제자매 사이에 용어상 차
이가 없을지 모른다. 카브는 남과 북 사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북쪽에서는
'딸'과 '신부'에 대한 그 지방 말을 따로 갖고 있으며 그들의 행동이나 도덕에는 이중 기준
이 있다. 이 지방 이족혼의 관습은 이 지방의 여자들을 대조되는 두 가지 부류로 나눈다. 이
마을의 '딸'과 이 마을의 '신부'가 바로 그것이다. 서로 다른 지방의 딸들은 서로 친하게 지
내며 그들이 시집에서 돌아올 때면 동아리끼리 모여 즐긴다. 그들은 '신부'들의 행동을 염
탐, 이를 화제삼아 즐긴다. 민속문학은 천적인 한 쌍의 관계를 골라내 이야기를 펼치는 경우
가 흔하다. 한 부인과 남편의 누이(나난드-보자이), 즉 며느리와 시누이, 한 부인과 남편의
어머니(바우-사스), 즉 며느리와 시어머니 등을 말한다. 시누이(나난드)는 한 집안의 딸이다.
남자형제의 부인(보자이)은 신부이다. 시누이는 결혼을 할 경우 그녀가 태어난 고향집을 떠
나고 대신 외지인(올케)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시어머니(사스)는 합동가족의 통치자이다.
바우는 며느리이다. 며느리나 시어머니는 결혼을 통해 이 마을 한 가족에 합류한 '신부'지만
사스는 이미 일정한 권리를 확보하고 있다. 바우는 아직은 외지인으로 현재 노예나 다름없
고 장차는 여주인이 된다. 사스와 바우, 즉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경쟁관계는 여자들의 2세대
에 걸친 경쟁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가정의 파워는 시어머니로부터 며느리에게로 옮겨진
다(Karve 1953:129). 이와는 달리 남부에서는 한 여자가 결혼을 하면 그 상대자는 이미 친
척이다. 남편과 부인은 '고종사촌'이며 시부모는 어머니의 남자형제이거나 아버지의 누이들
이기 때문에 용어상 구분이 없다. 어떤 특정의 공식적인 경우에도 남자형제와 여자형제 사
이처럼 어머니 남자형제의 아들과 여자형제의 아들간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런 현상은
인도 전역에 걸쳐 비슷해서 인도 전체에 어떤 일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가정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또 다른 한 예로 남쪽과 북쪽에서 결혼에 의한 결합에는 카다란 차이가 있음
에도, "어머니 남자형제 및 친척들의 역할과 선물증여 의무는 상당히 유사하다(Tambia
1973:129)." 북인도의 '부계사회'를 보면 어머니 남자형제(외삼촌)의 역할은 결혼 등 예식에
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들의 역할은 파키스탄의 이슬람교 공동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
랑 어머니 형제들은 신랑에게 돈 또는 말이나 물소를 준다. 또 신부에게 주는 지참금의 일
부는 어머니 친정에서 제공된다. 즉 외삼촌이 조카의 복지에 기여하는 것이다(Eglar
1960:80). 다시 말해서 어머니 남자형제들과 자매들의 아들이나 딸과의 관계는 상호 호혜적
인 아닌 일방적으로 선물을 주는 관계이다. 이 관계는 아버지 누이의 남편(고모부)과의 관계
에 필적되는 것으로, 어머니 남자형제가 없을 경우 고모부가 그 역할을 대신할 수도 있다.
이와 유사한 상황을 인도 중부에서 찾아보자. 어머니의 남자형제(외삼촌)는 누이의 아들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물을 한다. 이 관계는 한 남자와 여자형제들 간의 관계와 밀접히 연
관되어 있다. 이는 남자형제를 누이의 보호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생각은 누
이의 아들에까지 연장된다. 어머니 남자형제들은 조카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나는 수없이 들었다(Mayer 1966:223). 어떤 한 사람은 아버지 누이의 남편 즉 고모부로부터
도움 받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우선은 어머니 형제(외삼촌)로부터 도움 받기를 기대하
는 것이 보통이다. 결혼에서 외삼촌들의 선물은 다른 사람들의 선물과 달리 취급되며, 외삼
촌들은 결혼 파티를 열어준다. 아버지 쪽의 관계, 즉 아버지 누이(고모)나 그 남편(고모부)
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강하지 않다. 누이는 남자형제들과 강한 유대관계를 갖고 있으나
그 관계가 그 자식에까지 연장되는 것이 아니다. 고모로부터의 선물이나 지원은 가치 있는
것이나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인도에서 선물의 방향은 친척관계의 성격
및 여자의 재산과 관련이 있다. 마이어에 따르면 인도 중부에서는 남편이 결혼 후 3, 4년 동
안 처가를 방문하지 않는다. 남편이 처가를 방문한다면 그것은 친정을 방문중인 부인을 데
려오기 위한 것이지만 얼마 후에는 남자 동생들을 보내 데려온다. 루이스가 조사한 인도 북
부에서는 신부의 아버지나 손위 남자형제들은 신부의 새집을 방문할 수 없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앞서 난돌의 이야기에서 언급된 바 있다. 상류집단에서는 딸을 시집보내는 대가로
아무것도 받지 않음을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결혼 후에 딸의 집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어떤 대가로 여겨질 수 있다. 선물은 이론상 신부 가족으로부터 시아버지에게 가는 것이 아
니라 대부분 신부 자신에게 가는 것이다. 하류층에서도 일부 선물은 같은 방향으로 가는데
이는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역시 대부분은 신부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 가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회계층에서 어머니 남자형제(외삼촌)의
조카에 대한 기여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조직적인 연구는 아니지만 나는 가계집단
에서의 상호 관계를 특징짓는 두 가지 다른 국면을 언급하고자 한다. 남편과 시부모에 대한
며느리의 복종은 인도나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며느리가 아이를 낳고 나면
그 복종은 줄어든다. 아프리카의 일부다처혼에서는 한 부인의 최대 경쟁자는 남편의 다른
부인들이다. 이 때문에 남편 형제들의 부인이나 자매들과는 긴장관계가 아니다. 인도에서는
이와는 대조적이다. 펀자브에서의 경우 부인의 주 경쟁 대상은 시동생들의 부인인 동서들이
다. 그녀의 위신은 친정에서 받는 선물에 달려 있는데, 이를 두고 그들과 경쟁적인 입장에
있다. 만일 어머니 남자형제와 여자형제의 아들간 관계가 결혼형태, 결혼거래 및 일반적인
정치, 경제 유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도(남부 북부 모두) 또는 아프리카에서와 대체로 비
슷하다면, 그것은 서로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는 형제자매간 유대와 관련이 있다고 보아
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주요 차이는 인도 남부와 북쪽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계냐
모계냐 하는 제도상에 있는 것이다. 사회적 집단의 관점에서 보면 인도 북부의 관습은 부계
형태의 사회조직으로 힌두교 성전의 규약과 일치한다. 내가 말하는 부계란 남자를 통해서
혈통이 이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인도 전역을 통해 존재하고 있다. '보다 부계적'이라
고 말할 때는 상대적으로 남자 집단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집단을 말한다.
인구통계상의 변동
이제 결혼과 가족에 대한 통계학적 분석을 이야기해보자. 최근 인구조사(Frenzen &
Miller 1988)에서 나타난 통계는 인도 가구의 형태, 결혼 및 친족제도, 노동의 성 분포 등에
서 두 지역간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즉 북쪽은 대가족제도를 이루고 있으며 이족혼을 행하
고 밖에 나가 일을 하는 부인들의 비율이 적다. 이 두 지역의 차이점을 점검할 때 가장 손
쉽고 편리한 출발점은 결혼연령이 될 것이다.
결혼연령. 인도에서 평균 결혼연령은 특히 여자의 경우 낮았으며 현재도 그렇다. 여자의
조혼은 분명 처녀성을 중요시하는 관념과 관련이 있어 여자는 사춘기 전에 혼인을 해야 한
다고 생각했다. 성전의 한 구절은 여자는 아직 벌거벗고 있을 때 결혼을 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여자는 어려서 어른들의 주선에 의해 결혼을 함으로써 남자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 여
자가 늙은 홀아비한테 시집보내진다고 해도 이를 막을 도리가 없다. 종교적 고려가 앞서 여
자의 평균 결혼연령이 종교적으로 높은 카스트에서 가장 낮다는 통계는 놀랄 만한 일이 아
니다. 하지만 왜 다음으로 결혼 연령이 낮은 계층이 최저 사회계층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다. 다만 신부가 어리고 신랑이 젊으면 지참금이 적어진다는 사실이 관찰되
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배려가 하리잔(불가촉 천민) 집단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법으로 결혼연령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약 한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1891
년 '동의연령법'은 결혼 연령을 12세 이상으로 정했다. 1925년 연령 제한은 다시 13세가 되
었다가 1929년에는 '어린이 혼인 제한법(Sarda법)'을 제정, 여자는 14세, 남자는 18세로 높
였으며 이를 어기면 제재를 가했다. 1955년 '힌두 결혼법'은 그 연령을 15세, 18세로 각각
올렸으며 1978년에는 다시 18세, 21세로 높였다. 그러나 법이 정한 연령과는 상관없이 여러
지방에서는 계속 조혼이 성행했다. 또 개인이나 여러 단체들이 조혼풍속을 없애기 위해 노
력했으나 역시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65년 구성되었던 '구자라트 자살 조사위원회'
는 어린이 결혼과 강제결혼이 어린 소녀들의 자살의 주요 원인임을 밝혀냈다. 일반적으로
결혼이 어린 나이에 이루어졌지만 남, 북부 사이에는 일부 차이가 있었다. 한 조사에 의하면
남부 주에서는 결혼연령이 비교적 높았다. 이 같은 사실은 이마 1891년 인구조사에서 드러
난 바 있으며, 이런 현상은 일부 변화 속에서 1961년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1891년 케랄라
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여자의 평균 결혼연령이 15세 이하로 나타났다. 1955년 연감에 따르
면 인도에서 여자의 평균 결혼연령은 14.51세, 남자의 평균연령은 20.05세였다. 이에 비해 스
리랑카(힌두교와 불교도 모두)에서는 여자 20.9세, 남자 26.24세로, 이는 북아프리카 이슬람
교도들(튜니시아 19.77세 및 26.24세), 그리고 유럽 기독교들(영국 21.85세 및 25.15세)과 근
사한 수치를 보이고 있다. 스리랑카를 제외하면 여자의 결혼연령이 아시아에서 가장 낮다.
또 여자의 독신비율도 남아시아가 아시아에서 가장 낮다. 남자의 경우 결혼연령의 지역적,
국가적 편차는 별로 없으나 독신비율은 국가 또는 지역적으로 차이가 많아 최근 자료에 따
르면 대만은 10.0%, 스리랑카 7.9%, 인도는 2.8%(일본의 경우와 대략 비슷하나 결혼 연령은
일본이 높다)이었으며, 방글라데시 1.1%, 한국은 0.3%이었다. 여자의 경우 인도는 특별한 상
황으로 종교적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종교적 요인이 중요하다지만 힌두교와
불교가 혼합된 스리랑카와는 전반적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스리랑카는 남부 인도와 마찬
가지로 결혼을 늦게 하면서도(특히 케랄라의 경우) 그 차이를 현격히 드러내고 있다. 동시에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는 인도 북부와 유사해 종교적 요인 이외에 또 다른
요소가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그 요인 중 하나는 아마도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성격을
만들려는' 욕구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또 시아버지는 시아버지대로 며느리를 일찍 맞아
들임으로써 자신의 대를 보다 일찍 잇기를 바랐으며, 첫 기도가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다음
전략을 짤 수 있었을 것이다. 남자나 여자가 결혼을 늦게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논한
바 있다. 일할 기회와 교육을 받을 기회를 늘리거나 배우자 선택에 발언권을 더 갖기 우해
서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출산. 결혼 연령은 출산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대만, 한국(남한), 일본에서는 출산
율의 저하가 만혼과 관련되어 있으며, 중국, 이스라엘, 카톨릭 교회, 인도가 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만혼을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결혼을 일찍 한다고 반드시 곧바로 임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만델바움의 조사에 따르면 첫아이를 출산하는 것은 대략 17세부터 20세 사이로 이
는 결혼해서 동거에 들어간 후 약 4년 만의 일이다. 어려서 결혼을 하면 오히려 출산율이
줄어들고 부부가 일찍부터 허물이 없어져 성관계도 줄어든다는 일부 증거가 나와 있다. 케
랄라의 어린이 결혼에 대한 연구에서 쿠리안(Kurian 1975)은 소녀가 어려서 결혼을 하면 처
음엔 남편과 친구처럼 지내다가 대략 14세쯤 되면 수줍어하고 서로 멀리한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부부가 너무 어려서 성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어른들이 놀리거나
조롱하기" 때문이기도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따라서 쿠리안은 조혼을 한 소년소녀 부
부에게 성관계는 그들의 삶에 2차적인 역할을 한다고 결론지었다. 즉 결혼이 너무 일찍 이
루어짐으로써 남편과 부인 사이에 친밀한 인간적 유대감이 생기는 반면 성의 의미는 감소한
다는 것이다. 이런 요인들의 전반적인 영향이 어떤 것이든 간에 15-19세에 결혼한 여자는
늦게 결혼한 여자들보다 평균 0.5내지 1명의 아이를 더 가질 뿐이라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어쨌든 남부에서 늦게 결혼하는 풍습과 인구 성장률의 둔화는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러면
그것이 그 사회제도의 다른 국면과도 연관이 있는가. 다이슨(Dyson)과 무어(Moore 1983)는
북부에서 조혼과 다산에 대한 압력이 이족혼과 연관이 있다고 보았다. 즉 북부에서는 여자
가 새로운 공동사회로 옮겨가 사는데 거기서 부인들은 장막을 가려 남의 눈에 안 뜨이게 하
고 밖에 나가서는 일을 하지 않으며 오로지 어머니의 역할만 하는 것이다. 남부에서처럼 '
미리 정해진' 결혼은 북부의 경우에 비해 부모로 하여금 자식의 배필을 찾는 수고를 덜어줄
것이다. 신분이 높은 남편과 부유한 집안의 여자를 찾기 위해서는 빠른 나이에 혼인이나 약
혼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가족계획. 북부지방에서 높은 출산율을 보이는 것과 관련, 흥미로운 점은 사회 봉사자들이
주민들에게 가족계획을 하도록 하는 데 훨씬 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남부에서 주
민들이 가족계획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부인들이 노동에 훨씬 많이 참여하고 교육을 더
많이 받아 문자 해독률이 높으며, 많은 부인들이 출산할 때 의료 시술자의 도움을 받는 것
과 관련이 있다.
서로 다른 유아 사망률. 인도 전체 인구의 성 비율은 남자 107명에 여자 100명이었다
(1987년). 이는 유럽의 출산 성 비율과 유사한 것이다. 하지만 유럽의 남자 사망률은 훨씬
높아 영국의 경우 1971년 여자 100명에 남자 93.5명이었다. 인도에서는 정확한 등록자 수가
없어 특별한 표본이 아니면 남녀의 출산 성 비율이 통계로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 비율
은 유럽과 거의 비슷할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남자 104-107에 여자 100명)(Miller 1981). 다
시 말해 인도에서 남자가 많은 것은 일반적인 현상처럼 남자가 여자보다 많이 죽는 것이 아
니라 여자가 기대 이상으로 많이 죽기 때문임을 일부 통계가 보여주고 있다. 과거 여자의
사망률이 특히 북서지방과 라즈프트에서 높았는데, 이는 유아 살해에 기인한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여자 어린이들을 홀대하는 데서 오는 현상이다. 죽음의 원인을 분석한 한 보고
서는 태어나서 4세까지의 여자 어린이는 같은 또래의 남자 어린이들에 비해 치명적인 20종
의 질병에 훨씬 더 많이 걸렸음을 보여주고 있다(Mitra 1979:24). 아마도 여자아이들은 집에
서 소홀하게 간병되다가 뒤늦게야 병원에 오기 때문이다. 남녀의 성 비율 차이는 1901년으
로 거슬러올라간다. 기대와는 달리 당시 인구조사에 따르면 여자의 위치는 케랄라를 제외하
고는 남자와 큰 차이가 없었는데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더 악화되었다. 그 해 전체적인 성
비율은 남자 102.8명에 여자 100명이었다. 그러나 1981년 그 비율은 남자 107명에 여자 100
명으로 변했다. 남자 인구가 상당히 증가한 이런 현상은 인도 전역에 걸쳐 일어났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당시 인구조사는 남과 북에 여전히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북부가
남부보다 남자 인구가 훨씬 많은 것이다. 인구동태학과 문학적 관점에서 남북의 차이를 비
교한 다이슨과 무어는 1901년 1961년 사이 각 주간 성비의 차이를 그들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북부에서는 전반적으로 남자가 여자에 비해 많았다. 주마다 인구의 성 비율이 다른
것은 성별간 사망률이 다르기 때문으로, 북부에서는 여자의 생명이 항상 더 위험하다고 이
들은 보았다. 그러나 어린이의 사망률은 일반적으로 조혼과 사회발전의 부진으로 더 높았다.
동시에 지역간 출산율은 사망률처럼 다양하지만 북부가 더 높았다. 어린이가 많은 것은 조
혼을 하기 때문이다. 앞서 논한 주제를 상기할 때 여자가 증여에 있어서 유리하고, 또 때로
증여 때문에 사실 여자에 대한 가장 심한 차별은 모순된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
여자에 대한 가장 심한 차별은 유아나 어린이일 때 일어난다. 통계에 따르면 사망률을 근거
로 할 때 남녀에 대한 차이가 청소년기에는 적다. '여자에 대한 불리'는 10-14세 때 비교적
적은편'이고 20-29세 때에는 '특히 높은 편'이며 35세가 지나면 그 차별은 없어진다. 여자가
가장 위험할 때는 생후 한 달이 지난 후 부터이다. 특히 첫해 동안은 여자아이가 남자아이
보다 3분의 1이 더 죽는다. 따라서 남녀 차별로 여자아이가 죽을 위험이 가장 높은 때는 유
아기이다. 이는 장차 결혼을 할 때의 비용, 특히 상류층에서는 지참금이나 상속 등과 관련이
있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여자가 소녀기에 이르러 가정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찾으면 그
소녀는 집안의 긍지로 더 이상 별다른 차별을 받지 않는다.
과부. 결혼연령 및 남자의 사망연령은 과부의 연령을 결정한다. 1951-1961년 인도 여성
중 과부(50세 이하)의 평균 연령은 38.3세였으며 1901-1911년에는 36.2세였다. 당시 북부 우
타르 프라데시, 마디아 프라데시, 라자스탄 주의 과부 연령이 마드라스나 케랄라 등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과부의 연령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는 다른 요소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
다. 최근에는 지역별 연령 차이도 없어졌다. 오늘날 재혼은 전 지역을 통해 많아졌다. 델리
와 푸네에 대한 조사에서 아가르왈라(Agarwala)는 과부의 25-38%가 재혼을 했다. 이들 중
신분이 높은 카스트는 거의 없었다. 어떤 형태이든 여자의 재혼은 남부에서 더 흔했다. 남부
여자들은 힌두교와 산스크리트 규범 때문에 자유가 더 많았던 것도 한 요인이 되었다. 스리
니바스가 지적한 대로 산스크리트화가 여자에 대해서는 보다 거칠게 대하는 결과를 가져왔
다(1962:40).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지만 법령은 딸로서의 여자는 지원을 하면서 부인
으로서의 여자는 종종 괴롭히고 있다.
여자의 자율권과 재산
남부와 북부의 인구통계학상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개발의 차이 및 사회 문화적 변화와 연
관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인도 남부 주에서는 도시 거주자가 더 많은가 하면 여자의 노
동참여도 더 많고 여자들의 문자 해독률도 높다. 또 그들은 의사에 대한 접근빈도나 가족계
획의 이용빈도도 더 많은가 하면, 딸에 비해 아들을 선호하는 경향도 적다(Dyson & Moore
1983). 이에 비해 북쪽의 여자들, 특히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장막(퍼더)을 치고 사는 북
쪽의 여자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 여러 부계적 생활형태를 보이고 있다. 다이슨과 무어는 여
자의 독립성을 '여자의 자율권'으로 부르는 것을 선호하고 이를 '여자가 자신의 환경을 관
리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자율권을 판단할 수 있는 특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데 그것은 "결혼 후 주거형태, 신부와 친정간의 교류를 단절하거나 심하게 구속하지 않는
행동규범, 여자가 재산을 상속, 관리, 처분할 수 있는 능력, 여자가 어느 정도 결혼 상대자를
선택할 수 있는 독립적 힘" 등이다. 이런 특징들을 분명 인도에서는 남부적인 환경에 속한
다. 무어는 다른 한 연구 보고서는 남북이 차이를 여자의 노동력이 평가받을 수 있는 남부
의 쌀 재배 영농체계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렇게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그 후 여러 학자들의 주장이다. 문화적인 차이와 농업생태와는 명
백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문화적인 차이를 주요 결정요소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쌀을 주로 재배하는 인도나 중국에서 여자들이 농장에서 보다 적극
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이슨과 무어의 결론은 남북의 차이를
다룬 탐비아나 여자에게 보다 큰 재산권이 주어졌다는 나의 생각과 대체로 같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다이슨과 무어는 북부 여자들의 위치를 분석하면서 일
반적으로 지참금이 중요한 북부에서는 여자들이 스스로의 사용을 위해서 또는 후손들에게
이전될 재산의 연결고리로서 행동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했다(1983:43).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쪽에서는 '여자들이 때로는 상속을 받으며 재산권을 이전'하지만, 가까운 친척끼리 결혼하
는 경우 "결혼 그 자체나 지참금이 반드시 매우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1983:44).
가까운 친척간 결혼에서 지참금이 적다고 해서 결혼을 할 경우에 아무것도 오고 가지 않는
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순히 커다란 거래가 다음으로 연기된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왜
냐하면 여자의 지참금은 남부나 북부에서 흔히 여자의 상속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이든 지참금은 쿰바페타이의 결혼에 관한 고우의 설명처럼 남부에서도 중요하다. 스리
랑카의 상류층 또한 지참금을 준다. 다른 집단은 지참금을 주지 않을지 모르나 차후에 상속
에 의해 비슷한 거래를 한다(Tambai 1973:133). 비록 북부에서는 간접 지참금, 남부에서는
직접 지참금에 각각 비중을 두지만 북부의 지참금과 남부의 신부재산이 대비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들이 대비를 이룬다면, 그리고 만일 지참금이나 여자의 상속을 다양한 유산
의 방식으로 보는 것이 옳다면, 그 차이는 재산 이전의 시기와 그 재산의 출처가 문제이지
'여자 재산상속의 비율'이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러나 부동산에 대한 여자의 권한에서 하
나의 일반적인 차이점이 부각된다. 토지가 포함된다는 사실은 토지의 이전을 지연시키는 경
향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움직일 수 없는 재산'은 '움직일 수 있는 재산'에 비해 필연적
으로 제한이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이 생계의 기본적 자원이라는 사실과
도 별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고우가 지적한 대로 사촌간 결혼의 경우 지참금이 적다면 그
것은 지참금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의 이전을 늦추는 데는 다른 한 예가 될 것이다.
탐비아는<남아시아에서 지참금과 신부재산 그리고 여자의 재산권>이라는 연구 논문에서 결
혼거래의 형태와 여자 상속을 살펴보고 남부의 형태를 '일반적인 인도 유형의 변형'으로 결
론지었다. "인도와 스리랑카에서는 모두 여자가 상당한 재산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스리링
카의 쌍계 재산이전과 선택 거주제는 스리랑카에서 여자의 재산권이 보다 강한 것으로 보이
게 한다(1973:136)." 스리랑카 형태가 인도의 일반적인 형태의 변종인가 아니면 인도의 것과
동등한 위치의 또 다른 형태인가 하는 질문은 여기서는 커다란 의미가 없다. 그러나 (북) 브
라만 계급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스리랑카나 남부의 형태가 변종보다는 규범에서 벗어난 이
단이며 브라만 규범에 잘못 동화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즉 역사적으로(드라비다), 그리고
종교적으로(싱할리족의 불교 등) 다른 세력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느 마
을을 살펴볼 때 지배적인 카스트를 언급하듯이 남부에서도 지배적인 브라만 규범을 생각하
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지배적이라는 것이 어떤 때는 별로 소용이 없는 경우도 있다. 탐비
아는 인도에서는 지참금이라는 개념이 부각됨으로써 '신부 재산'을 지참금, 즉 간접 지참금
개념으로 변형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의 과정은 근래에 일어났을
지도 모르나 사실은 일찍이 청동기 시대 서아시아 사회에서는 직간접 지참금이 이미 공존하
고 있었다. 사실 직간접 지참금은 당시(1976) 경제적으로 계층이 형성되던 것과 본질적으로
연계되었다. 변화는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하면서 집중되었다. 일부는 드라비다식 결혼유형
(일반적으로 남부)이고 다른 일부는 여자의 토지 소유권(스리랑카와 일부 남부 인도 집단)
이다. 탐비아는 여자의 재산권에 관심을 기울였고 다이슨과 무어는 드라비다식 결혼유형을
다루었다. 일련의 변화를 한쪽은 여자의 재산권으로 풀이했고 다른 한쪽은 상속을 의미하는
여자 개개인의 환경에 대한 여자 자신들의 지배력이라는 면에서 해석했다. 그러나 사실 이
양자가 상호 연관되어 있음은 자명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사촌간 결혼과 형제자매 관계를
통한 여자의 재산권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탐비아와 나는(1973) 북부
에서도 여자가 지참금 형식으로 결혼재산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비록
여자가 정상적으로 상속할 권한이 없다지만 남자형제가 없을 때는 잔여 후계자로서 (직접적
이 아닌 간접적으로) 상속받고 그 재산을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남편을 맞아들여 사
는 '지정된 딸 제도'와 양자제도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남자형제가 없는 딸의 권한
이 일단 인정되면 이는 지참금 형식의 동산에 대한 권한의 연장으로, 남자형제가 생긴다 하
더라도 여자가 가족토지에도 자신의 몫을 가질 권한을 갖게 된다(Tambia 1973:131). 실제
여자의 토지권은 남자와 동등한 몫까지 가능했으며, 이런 현상은 특히 부모로부터 받는 토
지 '선물'을 고려할 때 남부에서 보다 강력하게 부각되었다. 다시 말해 이런 차이는 북쪽 부
계사회와 역사적으로 모계사회였던 남쪽간의 문제가 아니다. 고우(1978)가 지적했듯이 남아
시아 전체를 통해 여자가 재산을 증여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스리랑카에서는 이런 재산이
토지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스리랑카의 경우는 재산의 남녀분할, '쌍계분
할'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계급사회에서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의 지위도 유지시켜주는 상
속의 다양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상에서 남북 차이의 정도를 알아보고 가능한 양
자 사이의 논리적 일관성을 설정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대체로 다른 특성을 고려하면서
종교적 요소에 대한 통찰력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힌두교법의 영향을 살펴보고 또한 때
로 반대형상을 띠는 불교의 기여를 점검해보았다. 탐비아는 스리랑카와 미얀마에 대한 비교
에서 불교의 영향을 대체로 무시하고 당시 우세했던 인도 유형이 이 지역에서 약화된 상태
로 유지됐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것이 과연 그런지 의문을 품고 있으며, 이
를 일본에까지 연장시켜 볼 때 특히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우선 힌두교와 불교의
경전이 서로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적 영향이 상당히 컸다고 믿는다. 또
한 힌두교의 성직자들이 땅을 소유하고 있는 브라만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브라
만인들은 자신들 가문의 재원을 유지, 증대시켜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이에 비해 불교의
성직자인 승려는 대부분 사원에 거주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두 종교체제는 가
족생활에 대해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성직자의 생활이나 종교
적 지원 또는 물질적 증여에서도 서로 다른 규범을 장려하고 있다(Lancaster 1984:144). 스
리랑카나 티베트에서는 불교가 지배적이다. 이곳에서는 종교가 여자의 재산과 관련,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다. 불교는 금욕적인 종교로서 힌두교 사원과는 다른 방식으로 재산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스리랑카에서 불교사원은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들로부터
증여를 받아 유지되었다. 이 같은 기부는 종종 왕족으로부터 또는 상인이나 다른 평신도로
부터 주어졌다. 유럽의 경우를 보면 여자에 대한 재산증여는 은밀히 때로는 공개적으로 교
회에 의해 장려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녀자 특히 과부의 경우 남자들보다 자신들의 돈
독한 신앙심의 표현으로 교회에 물질적 기여를 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언
급하지 않은 다른 차이점이 있다. 특히 카스트 사회와 부족사회의 차이나 브라만 계급의 문
화와 부족문화의 차이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집단간의 많은 차이는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분 짓는 그런 차이와 유사하다. 도시와 시골에도 차이가 난다. 도시 중산층이 자신들만의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오늘날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두 지역간의 차이는
도시인들이 교육을 더욱 많이 받고 외국 영향을 더 받아 간격이 더 벌어지고 있지만, 옛날
에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4천 년 전 인도의 도시는 항상 다른 문화, 그리스, 로마, 이집트,
이스라엘, 아랍 등과 교류하는 중심지였다.
옮긴이의 말
지은이 책 구디 교수는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류학자로서 특히 가족과 결혼에
대한 연구에 일생을 쏟아 부었다. 이 책 역시 수년간의 현장조사와 비교연구를 통해 출판된
그의 최근의 역작이다. 아시아는 물론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수집한 결혼풍속 및 가족제도를
비교 분석하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야기하듯 펼쳐놓은 사례는 인류학이나 민속학
전공자는 물론이고 일반독자들의 흥미를 돋을 것이다. '유라시아의 산업사회 이전의 결혼과
가족제도(System of Marriage and the Family in the Pre-industrial Society of Eurasia)'라
는 다소 긴 부제가 달린 이 책의 원제목은 '동양, 고대 그리고 원시(Teh Orient, The
Ancient, and The Primitive)'라는 방대한 저서이다. 그러나 역자는 '고대 그리고 원시'가
의미하는 것이 일반독자에게 너무 먼 옛날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기에 제목을
바꾸었다. 이 책에서 구디가 말하는 고대는 산업사회 이전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의 뒷부분인 이집트와 그리스는 이번 번역에서 제외시켰으므로 '중국과 인도의 결혼풍
습 엿보기'라는 보다 축소되고 명확한 제목을 택하게 되었다. 구디 교수는 이전의 다른 연
구자들이 지녔던 일종의 편견, 즉 아시아는 아프리카 식민주의 시대처럼 유럽과는 다른 결
혼, 친족관계 및 가족제도를 지녔다는 '유럽 유일성'의 이론을 파괴하고 아시아는 산업사회
이전 유럽에 퍼져 있던 현상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연구를 통해
아시아 사회를 유럽의 상황에서 보다 잘 이해하도록 하고 유럽을 아시아 사회에서 보다 용
이하게 수용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아시아 사회가 유럽 사회보다 덜
진화되어 있었다고 생각하고, 인간사회를 '원시'와 '문명'으로 양분하여 아시아를 원시로 그
리고 유럽을 문명의 가테고리로 분류하는 종전의 평가를 분명히 실수라고 못박았다. 우리는
유럽의 인류학자가 아시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중국과 인도 및 대만, 티베트, 스리랑카
의 그 복잡한 계급제도와 결혼제도를 정밀하게 연구하는 것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또한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 고대사회에서 행해졌던 형사취수혼(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혼인하는 풍
속), 서류부가혼(사위가 처가에서 일정기간 사는 혼인), 데릴사위, 민며느리 제도 같은 혼인
이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에서 어떻게 행해졌는가를 비교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로
운 작업이었다. 독자들 역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결혼이 행
해졌던 이 지역의 풍속과 제도에 읽는 재미를 더하리라고 확신한다. 인간의 삶이란 결국 남
녀의 결합을 통해 야기되는 모든 문제로 뒤덮여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구디 교수의 연
구가 워낙 광범위한 지역에서 다양한 주제들을 전개시켰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 이 책을 읽
는 독자들이 혹시 숲속에서 헤매느라 대로를 찾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것은 또한 역자의 미숙함에도 책임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낌없는 질책을 바
라며 이 역서가 일반 독자는 물론 인류학이나 민속학을 전공한 인문 학도들에게 작은 보탬
이 되기를 기대한다. 요즘 같은 어려운 시기에 이 같은 인문과학 책을 선뜻 출판해준 삼성
언론재단과 중앙 M&B에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연국희, 박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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