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가, 시집집단 및 가계
가계집단이 나누어지는 과정은 항상 여러 단계의 조치가 수반되는 복잡한 절차를 밟는다.
집안 사람들이 같이 식사나 일하는 것을 중단하거나 더 이상 함께 살지 않는 등이다. 그러
나 분할과정 자체는 그 집단에 소속된 재산을 공식적으로 나누는 문제이다. 물론 '합동가족
(joint family)'의 삶에는 재산에 대한 권한 이상의 것이 있다. 그러나 중국의 분할 규정은
마치 힌두법이 그러하듯이 기본적으로 재산의 권한을 담고 있다. 재산 외의 다른 문제들은
그렇게 공식적이 아니어서 구두로 해결한다. 그러나 재산의 분할은 대개 문서로 토지가 각
자에게 어떻게 나누어지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한 것은 중세기 초 존스턴의 웨이하
이웨이에 대한 연구에 잘 기술되어 있다. 아버지 생전 또는 사후에 분할이 발생할 때 가족
의 분할은 상호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다. 만일 아버지 생전에 분가가 이루어지면 아버지와
같은 노인에 대해서도 어떤 조건이 붙여진다. 즉 아버지가 땅을 계속 보유하든지 아니면 아
버지가 모든 아들들에 의해 지원을 받거나 아들들이 생산한 몫의 일정한 분량을 돌려받는
것 등이다. 아버지가 죽으면 어머니가 그 땅을 계속 관할할 수도 있다. 만일 아버지 생전에
분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남편 재산에 대한 권한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만일 어머니가 재혼을 할 경우 전남편에 관련된 모든 재산을 포기해야 한다. 분가한
사람들 사이의 유대는 중세 앵글로-프렌치법인 르트레리나제(retrait linager)에 전해진다. 법
이론에 따르면 모든 땅은 황제 소속이나 실제로는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이 소유했다
고 존스턴은 주장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때 상복을 입는 친척, 즉 일정 범위 내
일가친척의 동의를 받아야 자신의 토지를 팔 수 있었다. 또 그들 친척들은 공정한 가격으로
그 토지를 살 수 있는 기회도 함께 주어졌다. 사회경제적인 이론과는 달리, 이처럼 '분할되
지 않은 가족'이 오늘날 역동적인 대만 경제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곳에서는 현재
비즈니스의 90%가 '가족기업'이다. 현재 이곳의 가구 수는 줄어들었으나 가족 크기와 가족
의 구조적 복잡성은 증가했다. 농촌에서 가족의 분할이 늦어진 것이 그 한 이유이다. B. 갤
린(Gallin)과 R. 갤린(1982)이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가족 구성원의 수가 6.2에서 7.3 그리고
합동가족 수가 11.8에서 14.3으로 증가했다. 가족의 크기란 한 가계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의
수를 말한다. 인도에서는 '분할되지 않은 힌두 가족(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분할되지 않은
합동가족')'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특정 재산에 대한 공동권한을 갖고 있는 후손들로 구성된
다. 그러나 공동권한이라고 해서 상식적으로 말하는 공동생활이나 공동거주를 통한 권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시골에서도 각 가정의 경제활동은 오래 전에 다양화되었다. 같은 집
에 사는 가족이라도 도읍에 나가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의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생겼다. 이처럼 폭넓은 가족을 한데 묶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유산을 나누는 것
은 나쁘다는 관념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상속자들 사이에 합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또는 농장보다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는 도읍에 나가 돈을 벌어 집안이 소유하고 있는 합동
토지(joint estate)가 별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토지를 함께 보유하
는 것은 빠르게 변하는 경제적 환경에서 가족 유대의 증가라는 긍정적인 요소도 있다. 대만
에서 가족유대의 강화는 19세기 영국에서 일어났던 제1세대 현상(Anderson 1971)과 유사하
다. 영국에서는 주거의 문제 때문에 도시 이주자들이 다른 지방의 경우보다 더 친족관계를
이용했으며, 이 같은 예는 다른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또한 보다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된 농업 및 상업의 혼합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역시 오랫동안 중국 가계의 특징을
이루었다. 도시에 나가 돈을 번 사람은 그 돈을 다시 고향 농촌에 투자하곤 했다. 그러나 현
재 대만의 가족재산은 보다 늦은 시기에 나누는 후분할, 그리고 그로 인한 가족 구성원의
증가 현상 등과 연결되어 보다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연초(담배) 생산지인 대만 남서
쪽 촌락 옌-랴오에서는 규모가 큰 가족집단일수록 더 잘 살았다. 이 같은 가족집단은 다른
가족집단에 비해 경제적으로 차별화를 이루었으며, 동시에 현금작물에 대해 대단히 집약적
인 노동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 구성원 중 일부는 조그만 사업을 벌이거나 사무직에 종사
할 수도 있으나 경제적, 사회적으로는 함께 행동했다. 그 중 일부는 따로 떨어져 살아도 마
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경제적인 성과를 얻을 경우 재산 소유 가족들은 그 구성원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줄 수 있으나, 이는 결국 부부를 중심으로 한 소그룹으로 분열되고 만다.
대부분의 경우 가족집단을 함께 묶어두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부모 재산을 분할하지 않은
데 있다. 19세기 웨이하이웨이에서처럼 재산분할이 보통 아버지가 죽은 후 또는 그 훨씬 후
에 이루어질 수도 있으나 죽기 전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그것은 정확히 기록된
서류형태로 이루어지며, 거기에는 남자들 각각의 몫이 적혀 있다. 물로 거기엔 결혼하지 않
은 딸을 위한 지참금과 미망인을 위한 과부산에 대한 것도 언급되어 있다. 이 같은 서류에
는 만일 토지나 자원이 자식들에 넘겨질 경우 노인세대를 위한 차후생활도 배려되었다. 부
모와 자손들은 부모들이 은퇴하기 전에 따로 살 수도 있다. 특히 요즈음에는 재산 소유 집
단의 일부가 시골에서 살고 다른 사람들은 도읍에서 살기도 한다. 재산분할이 이루어졌든
아니든 노인들은 누군가 돌보아주어야 한다. 대만에서 행해지고 있는 한 가지 해결방법은
자식들이 돌아가며 홀아비나 과부가 된 노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관습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나 대체로 선호되었다. 그 이유는 재산의 상속은 부모들에 대한 숙식을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자식들과 같은 장소에 거주하느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로, 그들은 어쨌든 숙식 등에서 보살핌을 받는 것이다. 형제자매가 어느 정도 분
산되어 사느냐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많은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그렇듯이)에서는
자식간에 돌아가며 노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데 따른 불편함이 별로 발생하지 않는다. 노
인들과 함께 사는 자식들은 직접 보살피면 되고 만일 딸밖에 없는 부모는 아들을 입양하거
나 사위를 맞아들이면 된다. 중세 영국에서는 양자를 맞지 않았기 때문에 리어왕의 경우처
럼 돌아가며 모시는 방식이 딸들 사이에 행해졌다. 리어왕의 경우 재산이 분할된 후에 딸들
은 아버지를 차례대로 돌보아야 했으나 딸들은 이 같은 의무를 저버리는 배신행위를 했다.
배은망덕은 재산분할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위험 요소이며, 이것이 재산분할을 미루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코헨이 시사했듯이 재산분할을 늦추는 것이 아들들에게도 긍정
적인 요소가 되기도 했다. 즉 그들은 이 공동재산을 이용해 그들의 활동을 넓히고 다양화함
으로써 공식적으로 분가할 때 자신들의 결혼기금을 늘리는 결과를 낳았다. 재산분할이 이루
어지는 과정에서 기초 가족과 남계친 사이에 긴장이 조성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주거,
재산, 노동, 생산, 음식, 심지어 섹스에 대한 공동권한으로 생기는 그 같은 긴장은 가계 내뿐
만 아니라 쌍계집단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그것은 차라리 친정(딸)과 시집(아들)에서
분리되어 새 결혼가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재산분할에서 비롯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남편 집에 들어오는 부인은 형제간 재산 차별화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지참금 제도
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여자는 이미 부인으로서 이런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점이다. 부인들
은 별도로 자신이 보관하든 남편의 재산과 합치든 증여의 형태로 재산을 가지고 들어와 부
부의 독립적인 소유 아래 이를 간직한다는 것이다. 지참금이 후손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송
나라 시대의 신 유생들에 의해 분명히 제기된 바 있으며 이는 후손집단 강화의 원동력이 되
기도 했다. 만일 모든 권리가 결혼할 때 선택 또는 관습에 의해 신랑 신부에게 주어진다면
딸들은 더 이상 토지 등에 대한 다른 실질적인 요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딸들에게는 재산
을 '상속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통념에 따라 결혼거래는 그들이 이해를 제한해왔다. 부분적
인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데릴사위제에 따라 딸들이 직접 혈통을 이을 필요가 있을 때이다.
여자가 결혼 후에도 부모 재산에 대해 상당한 요구를 한다면 그것은 지참금뿐만 아니라 '상
속'을 받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들 몫에 대한 할당은 마지막 분할이 이루어질 때까지 불
완전한 상태로 남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체는 여자가 토지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을 때
생길 것이다. 지참금과는 달리 상속은 기본적인 생산자원의 분할시기를 늦추기 때문이다. 동
산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권한을 요구해도 비교적 분쟁을 덜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혼인할
당시이든 그 후이든 여성의 재산증여에 토지까지 포함된다면 분할되지 않은 합동가족, 특히
아버지가 죽은 후 까지 지속되는 합동가족은 존재할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다. 이런 경향은
앞으로 스리랑카의 경우를 살펴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스리랑카에서는 일부 유럽에서와 마
찬가지로 신부가 결혼할 때 토지를 갖고 간다. 따라서 신혼 초부터 부부는 양가로부터 들어
온 자원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생산단위를 형성할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유럽의 일부 지
참금 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부모는 사업체에 대한 통제권을 사실상 신혼부부에게 넘겨준
다. 아일랜드 클레어 카운티에서의 경우가 바로 그런데, 이는 부모의 조기 은퇴와 자식들의
늦은 결혼 현상으로 나타났다(Arensberg & Kimball 1940). 자식들이 결혼할 때 모든 재산
이 넘어가고 부모는 연간 배당금 또는 적은 재산에 의존한다면 그 집안은 해체되고 새로이
구성돼야 할 것이다. 한편 상속이 미루어지거나 재산분할이 늦어진다 해도 일단 그것이 이
루어지면 그 영향은 급진적으로 나타난다. 토지가 대체로 남편의 관할 하에 들어가는 중국
이나 인도 같은 곳에선(일본에서는 비교적 이런 현상이 덜하다) 생산의 기본수단은 결혼기
금에 포함되지 않는다. 대신 생산수단은 남계친의 일부 재산으로 구성되는데, 여자는 남편에
딸린 가족으로서 혜택을 받는다. 토지에 관한 한 여성들은 거의 권한이나 통제력을 행사하
지 못하지만 과부가 된 어머니가 제한된 조건 하에서의 여자 상속자는 예외일 수 있다. 이
같은 환경에서는 결혼기금의 조성이 그렇게 위협적인 일이 아닐 것이다. 신부가 가져오는
것은 보석, 가구 또는 현금이기 때문이다. 물론 결혼기금 중 토지가 별 비중을 차지하지 않
는 집안에서는 분가를 재촉할 것이다. 지참금이나 다른 값나가는 것으로 토지를 살 수도 있
다. 그러나 토지가 중요하고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남계친의 합동 가족들은 결혼기금
이상의 것인 토지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갖는다. 아들들이 농사를 지으며 각자 떨어져 산다
해도 재산이 분할될 때까지는 마찬가지이다. 그 같은 분할이 이루어질 때까지 상류집단의
여성은 하류집단의 여성에 비해 어떤 면에서는 더 불리한 위치에 놓일지 모른다. 한 일본의
중국 문제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비록 여성의 지위가 일반적으로 남성에 비해 낮지만 부인의 지위는 상당히 높으며 그녀의
의견은 가장에 영향을 끼친다. 특히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는 여자들이 농업 노동자로서, 또
버드나무 세공이나 자수를 위한 시간제 노동자로서 중요하기 때문에 그 지위가 한층 높다
(Fukutake 1967)
베이커 역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부인이 열심히 일할 것으로 기대되는 가난한 집에서는 부인이 부잣집보다 개인적으로 강한
지위를 갖는다. 부잣집 여인네는 가족에게 아무런 노동력도 제공하지 않으며, 그런 집에서는
부인이 첩이나 이혼을 통해 쉽게 대체될 수도 있다(1979).
3. 차별, 사회계층 그리고 지역
여기에서는 주로 촌락에서의 결혼문제와 사회 차별화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중국
자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결혼, 상속, 친족 그리
고 후손에 대한 일반적인 차이점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긴요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경우 촌락수준에서 경제적 차이, 특히 토지의 차이는 별로 없다. 유라시아의 경우는 '쿨라크
(재정 러시아의 부농)'의 예를 들어 빈농과 부농의 차이를 살펴볼 것이다. 그러고 나서 중국
의 북쪽지방과 남쪽지방에서 서로 다른 일부 특징을 고찰, 지역적 차이를 지적해보려 한다.
이를 위해 이론상의 문제점을 자세히 분석한 최근 자료를 대만으로부터 입수해 이용했다.
촌락에서의 이동성
중국 농민들이 주로 땅의 소유에 의지하고 있다고 해서 사회계층으로 볼 때 특정 지위에
영원히 고착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실제로는 그와 반대로 적지 않은 신분상
의 기복이 있었다. 운남의 웨스트 타운에 대한 수(Hsu)의 연구는 앞부분에서 이 점을 지적
하고 있다. 그는 어렸을 때 자신의 아버지가 여러 이야기를 통해 가족의 흥망성쇠를 깨닫게
했다고 기술했다. 그는 이어 중국 북부지방 한 촌락에 대한 양(Yang)의 연구를 예로 들며
토지의 소유권과 관련, 부유하던 한 집안이 어떻게 가난으로 몰락했는가 하는 빈부의 '순환'
을 설명했다. 양은 자신의 동네에서 3-4세대를 거쳐 똑같은 양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집
안은 하나도 없었다고 술회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어떤 농민의 사회적 계급이 상승하면 그
후손들은 그들이 버는 것보다 더 많이 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지적했다(Yang
1945:132). 거기에서 물론 토지를 일찍부터 양도할 수 있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송나라 시대(960-1279)에 이미, 실제로는 그보다 앞선 한나라 시대에 토지를 팔고 담보하고
선사할 수 있었다. 일례로 위나라는 일찍이 485-780년 토지의 재분배를 시도했음에도 불구
하고, 불평등은 불가피한 현상으로 계속되었다. 역사적으로 장기간에 걸친 기복도 있다. 새
로 들어서는 왕조가 토지를 탈취하는 것이다. 어쨌든 하류계층에서는 집안마다 부침이 이어
졌다. 린(Lin)은 농부였다가 상인이 된 사람들의 극적인 과정을 보여주었다. 1934년 린은 복
건성 남쪽지방에서 그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 지냈던 고향 마을
의 두 세대가 어떻게 서로 다르게 발전했는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두 세대는 처남 매부
사이로 25년 전 사업 동업자로 모두 번성했었다. 그들은 길을 가운데 두고 지척간의 새집을
짓고 살아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상황은 전혀 딴판이
되었다." 린이 각색한 이 야이기는 두 가정 중 황씨의 부의 축적과정, 그리고 장씨의 몰락을
생생히 들려준다. 장씨 집은 후에 폐허가 되며 그 미망인은 가난과 외로움 속에 빠져든다.
하지만 성공한 가정도 부분적으로는 사업 자체 때문에, 또는 가족의 사망과 질병, 가족들의
성격 및 자식들의 양육 등으로 여러 번 급격한 운명의 변화를 겪는다. 가난에서 벗어나 부
자가 되고 다시 가난해지는 가정의 부침은 상행위가 성행했던 남쪽지방에서 특히 심했다.
과거 이 같은 장사는 국내외적으로 그리고 공식, 비공식적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10세기 말
북송나라 시대 닝포에 해외 무역관이 설립되었다. 13세기 여행가 마르코폴로는 여러 번 "여
기에는 부와 사회적 지위가 있는 상인이 있다."고 술회한 바 있다. 항주의 킨사이에는 인도
나 그 밖의 지역에서 온 상인들이 시장 근처의 큰 돌집에 물건을 쌓아놓고 있었다고 말하기
도 했다. 어느 정도 발달된 상행위는 상왕조 시대(1766-1122 BC)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부
학자들은 상인에 대해 별로 평가를 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촌락에 대한 여러 연구는 상
점 점원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으나 상인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도시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수공예와 원시적 공업 생산, 그리고 상업이 주로 국내에서 또
는 일부 밖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중국 초기부터 여러 지방에서 도시문화가 번창하고 상인
부르주아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물론 이동성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농부가 점원
이 되고 점원이 상인이 되었으며 상인은 양반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은 시장
상태에 따라 부침했다. 시장뿐만이 아니었다. 개개인의 재산증식은 가계나 동업조합의 기금
을 불렸다. 한편 그들은 국가나 농민폭동에 수탈 당하기도 했다. 안정이란 오랜가는 법이 없
었다. 상인계급으로 옮아가는 한 가지 방법은 도제제도를 통하는 것이었다. 아편조합에 관한
해밀턴의 연구(1977)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 상인세계에서 흔한 가족사업은 친족이 아닌 사람을 고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수년 내에 자신들도 독립적인 수공업자나 상인이 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많은 상인들
은 처음에 아무런 장사 경험이 없는 집안 출신으로 업계에 들어온다. 하지만 어디가나 동일
한 도제제도는 그들에게 상업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누더기에서 일약 부자로 상승
시키기도 했다.
농장 자산도 마찬가지이다. 페이가 연구한 운남의 한 촌락의 예를 들어보면 이를 잘 이해
할 수 있다. 아편 중독자인 한 게으른 남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토지를 팔아야 했다. 같은
식으로 대가족은 그들의 토지를 나누어야 했기 때문에 자연히 가난하게 되었다. 즉 토지는
아들들에게 나누어주고 동산은 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 때문에 부잣집이라도 해도 영원
히 부자로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가난한 집이라도 아들이 하나뿐일 때는 돈을 모아 토지
를 늘려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하숙집 주인은 그 마을의 부자 중 하나였다. 그의 아버지
가 일찍이 죽어서 자식이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가까운 남계친 친척은 모두
가난한 노동자 계층으로 계속 남았다. 통합적인 운영에도 불구하고 한 집안이라도 경제적
상태가 현격히 다른 세대들로 구성될 수 있다. 청나라 때 신계지의 체씨는 상당한 신탁재산
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가계의 다른 사람들은 집을 소유하지 못했으며, 대
부분은 경작할 토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집을 갖고 있는 사람 중에는 토지가 없거나, 있어
도 아주 적은 사람뿐이다. 그들은 대신 신탁이나 가계 내의 다른 사람 또는 인근 사람으로
부터 토지를 빌릴 수 있다(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게 토지를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 중 일부는 다른 직업을 구해 그 마을을 떠나기도 했다. 이처럼 농민, 상
인 수준에서 단기간 내의 신분이동은 중국 전체를 통해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상류사회에
서는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상류사회 내의 이동성 문제는 더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한다.
관직을 얻을 수 있는 학벌은 부와 토지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이 같은 출세의 열
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달성하는 것이었다. 물론 부자는 돈으로 학벌도 사고 교
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많지만, 이 또한 부분적으로는 신분이나 가문의 덕분일 수 있다.
송나라 시대 관료는 시험제도를 통해 등용되었다. 이 때문에 상류사회에서는 후손들의 교육
을 위한 가족재산을 공동으로 조성해 영원히 남에게 양도할 수 없도록 한다. 이 같은 자선
기금은 가족의 모든 후손들을 교육시키고 유지하기 위해 1049년경 처음 창안되었다. 공동재
산을 소유한 부유한 가문은 어른들에 의해 운영되는 토지에서 나오는 이익금으로 자신들의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이 토지가 가문 내 사람들에게도 대여되었다는 점
이다. 물론 이 경우 학생들은 가문의 자손들에게 한정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는 후손들
에게 보다 좋은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 안웨이 성의 한 지방 엘리
트 가족에 대한 연구는 시험제도가 없어진 후에도 상류계급과 농민계급으로 나누어져 있음
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때 상류계급은 '유한계급'이라 불렸는데, 이들은 인구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관직을 갖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토지를 소유하여 자신들의 신
분을 유지했다. 물론 이 두 집단은 약탈자와 수탈자라는 대립적인 두 계급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씨족제도와 그 책무는 일정 형식을 취한 후 빈자와 부자를 한데
묶었다. 즉 모든 이들이 신탁기금으로부터 이익을 얻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
은 계급의 범주가 중국의 지방을 이해하는데 폭넓은 개념적 기초를 이룬 것만은 분명하다.
한편 이 같은 신분은 유한계급이라 할지라도 자동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생산자원을
이용한 재산증식 없이 즐기는 비용만 계속 나간다면 그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더욱이 아
들간에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하는 제도에서 각 가정, 특히 많은 자식을 두고 있는 집에서는
고정된 자산만을 갖고 생활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일부 가정의 지위와 소득은 공직으로부
터 나오는 혜택으로 유지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을 열심히 해
야 하고 아들들이 시험에 합격하도록 더 많은 준비를 시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자
식들이 오랫동안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충분한 재원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신탁재산(기금)
이 가문 내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을 제공한 반면, 가문 내 각 가정은 내적으로 상당한 정도
의 경제적 차이를 보였다. R. 왓슨(Watson)은 홍콩 하추엔의 등 가문을 소개하면서 이 가문
내에 최근까지 농부(소작인 및 노동자)와 지주계급으로 갈린 두 집안의 내력을 설명했다. 가
문에 대한 분석을 하면서 계층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성을 두지 않은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대규모 후손집단의 존재는 그들을 구분 짓는 계급의 상태를 모호하게 했기 때문에 그 같은
경향은 있을 수 있는 일이기는 하다.
사회계급과 결혼
신분의 변화는 잠시 접어두고 사회계급의 차이 자체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우리들은
이미 한 가계 내에서 신분 차이의 예를 알아본바 있다. 상류사회의 과부들은 재혼할 가능성
이 적다. 이혼도 적었으며 딸의 지위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의 가문은 구성
원들에게 교육 등 더 많은 혜택을 제공했다. 지참금에도 차이가 나 가난한 사람들은 간접적
인 지참금을, 부유한 집안은 직접적인 지참금을 주었다. 분할되지 않는 합동가족은 단위가정
에 비해 더 많은 재산을 축적하는 경향이 있다. 가난한 집안의 여성은 비교적 더 중요한 위
치를 차지했다. 가난한 남자는 데릴사위제로 결혼을 할 가능성이 높고 북쪽지방의 가난한
여자는 어린 나이에 장래 며느리로 남자 집에 들어가 살았다(이는 페이의 조사에 따른 것인
데 대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이런 것을 모두 일정한 경향으로 다루었는데 대부분
의 경우에 통계적 증빙자료가 요구되었다. 중국에서 가족규모의 문제는 복잡한 것이나 가난
한 집보다는 부유한 집에서 자식을 더 많이 두었다. 자연히 가족이 대규모화했다. 대가족의
사례는 도시와 농촌에 따라 달랐다. 우선 나는 가계의 규모에 영향을 주는 가계집단의 발전
적 순환에서의 차이를 강조하고자 한다. 프리드만은 중국 남동부 지방의 가계에 관한 두 번
째 연구에서 중국 전역에서 그렇듯이 부유한 집안과 가난한 집안이 서로 다른 유형을 보이
고 있음을 지적했다. 비교적 부유하고 지체가 높은 사람들은 결혼형태와 여성의 지위에 중
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부의 차이는 아프리카 사회와 비교할 때 유라시아 사회에 존재했
던 보다 복잡한 생산기반에 의해 초래되었다.
가난한 집안에서는 아들을 결혼할 나이가 되도록 키우고 또 여러 아들이 모두 집에 머무
르며 각각의 가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을지 모른다. 기껏해야 한 아들이 결
혼을 해서 같은 집에서 그 가계를 이어나가도록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은 결혼을 하더라도 늦게 했으며, 한 세대에 한 신부만 있는 것이다. 한편 부유
한 집에서는 여러 아들을 키우고 부모가 살아 있는 한 분가하지 않은 가족 형태로 살아간
다. 또 아들들이 어려서 결혼하기 때문에 심지어 4세대가 함께 사는 합동가족을 이루기도
한다(Freedman 1966:45)
부유한 집안의 합동가족은 각 세대가 재산을 나눌 경우 평균보다는 많을 것이나 아버지가
사망하거나 노약해져야 이를 실행한다. 그러나 재산에 대한 질투와 시기는 보다 일찍이 싹
터 특히 부인들을 갈등을 일으킬 수 있으며 남편들에게 분가를 재촉하기도 한다. 프라이드
(Fried)는 남경 근처 양자 평원의 추시엔 마을에 대한 연구에서 신분적 차이를 매우 강조했
다. 농부, 소작인, 소상인, 직공 등은 합동가족을 이루지 않는다고 기술하고 있다. 가난한 농
부는 그의 아들이 장성해서 결혼, 며느리, 손자들이 생겼을 때 함께 살며 가족 농토를 공유
하는 그런 상황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 상인사회에서는 상속된 기업을 함께 일으킨 형제들
간에 보다 단결력을 보인다. 합동가족은 추시엔 마을의 모모씨나 장씨 가족처럼 부유한 토
지 소유자뿐만 아니라 관리와 상인들 사이에도 존재했다. 모모는 상인이고 장은 지주, 관리,
그리고 학자 집안이었다. 가족구조의 차이는 재산의 차이와 관련되어 있다. 잘 사는 사람들
은 아들사이에 재산을 균등하게 나눌 수 있다. 재산분할의 증빙서류를 만드는 사람들은 주
로 중, 상류층이다. 20세기 초 대만에서 그랬듯이 비교적 번성하는 환경에서는 여러 지역에
서 합동가족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도 일부 농촌에서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간에 나누어 줄 땅이 부족한 영세농가에서는 한 아들에게만 농사
를 짓도록 허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때 농사를 짓는 아들은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형제들
에게 그들이 나누었어야 할 땅의 몫에 대한 대가로 소작료를 지불해야만 한다(후쿠타케
1967:86). 그러나 대가족과 소가족의 차이는 아들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지, 가족
사망률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다. 또 가난한 사람들은 출산율도 낮았다는 증거가 있다. 일본
점령하의 대만에서 토지가 없어 세금을 내지 않는 가난한 집안은 토지를 소유하고 세금을
낸 집안보다 출산율이 낮았다. 울프는 그 이유가 성적 접촉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공
산혁명 전 중국의 출산율에 대해서는 인구통계학자, 인류학자, 역사학자 간에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아이들을 양육하기 어려운 부정적 상황에서 한정된 자원으로 가족규모를 스스로
제한해야 했던 긍정적 자율통제 등이 있을 수 있으나, 어느 쪽이든 가난한 사람에게 더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민족지학적인 자료는 농촌에서도 이 같은 신분차이가 존재했음을 보
여주고 있다. 장래의 며느리를 데려와 양육하는 관습은 부자보다는 가난한 집안에서 더 많
았다. 또 가족규모를 조절해야 하는 부담도 한정된 자원 때문에 가난한 집안에서 더 컸다
(Smith 1899). 가족규모의 조절은 성적 접촉을 피해서 뿐만 아니라 고의적인 여아살해, 남녀
어린이들의 매매, 또 여자의 경우 조혼, 남자아이의 경우 데릴사위 제도를 통해서 이루어지
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규모의 조절은 남자 어린이가 관련되기도 하나 주로 여자아이를 통
해 이루어졌다. 혼인의 시기나 형태에 대한 선택은 신분과 성에 따라 달랐다. 상류집안의 여
자가 때때로 결혼을 늦게 하는 경우는 있으나 상류가정 남자는 결혼을 일찍 하는 경향이 있
었으며, 이들은 첩을 얻어 아들을 추가로 얻곤 했다. 사(Sa) 여사는 20세기 초 대만 도시에
대한 가계분석에서 첩과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상류 집단의 남자는 가난 때문에 혼인이 늦
어지는 하류집단의 남자보다 일찍 결혼한다고 술회했다. 사(Sa) 여사의 통계에 따르면 상류
층의 남자는 25세 때 92%가 결혼하지만 하류층의 남자는 67%가 결혼하는 것으로 나타났
다. 또 상류층에서는 26%의 남자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와 결혼을 한데 반해 하류층
에서는 7%의 남자만이 연상의 여자와 혼인했다. 상류사회에서는 가족들이 결혼비용을 충분
히 지불할 수 있고 또 첩을 통해서라도 아들을 얻을 수 있는 확신이 보다 강했기 때문에 비
일반적인 형태의 결혼이나 데릴사위 제도에 의한 결혼이 적었다. 물론 첩을 얻는 것은 아들
을 얻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으나 여성의 서비스에 대한 과시적인 지출의 요소도 있었다. 16
세기 초 명의 한 학자는 혜주 지방 사람들이 음식과 옷에 지독히 인색했으면서도 첩과 창
녀, 그리고 소송에 관한 한 '금을 모래알처럼 썼다'고 언급한 바 있다. 페이는 대규모 가족
이 함께 사는 한 대가족 집안을 이야기하며 이 같은 대가족은 상류층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런 대규모 가족은 그 가족 수, 즉 규모에서 뿐만 아니라 정서에서도 다른 점이
있다. 지주 집안, 특히 부재지주의 경우 농부 집안과는 달리 일찍이 독립을 하거나 재산분배
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족들이 가족 전체의 정치적인 힘의 배경과 함께 공유하
고 있는 재정적 지원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이는 도시에 있는 일부 복합가족
(multiple household)은 심지어 자신들만의 재판소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말했다. 계층에 따
른 가족의 규모와 구조의 실질적 차이는 가까운 친척간의 행동, 정서, 그리고 태도에 차이를
가져온다. 만일 형제들과 그 부인들이 함께 살지 않으면 하루하루 생활에서 오늘 갈등이나
긴장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공통적인 관심사도 줄어들 것이다. 만일 재산이 일찌
감치 분배되면 아버지와 아들간에 갈등이 적고 오히려 아들이 유력한 파트너가 되는 경향이
있다. 결혼과 형제자매간의 관계에는 대응효과가 있다. "신분이 낮고 단순한 가족구조에서는
각 형제들이 자신의 부인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부인이 비록 가난과 힘든 일로 비참한
생활을 할지는 몰라도 부인 개인으로서의 힘은 훨씬 강하다."고 프리드만은 적고 있다. 상류
집단에서는 형제들이 자신의 사회생활을 통제하는 강력한 아버지에 대항하기 위해 강한 응
집력을 갖는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인도에서도 이런 차이가 존재한다. 시집과의 특별한 관계는 R. 왓슨
의 홍콩 하 추엔 마을에 관한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그녀는 친정과 시집간의
중개자로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했다. 농부인 남편은 자신의 인척과 별 접촉을 갖지 않으나
여성은 그들과 유대관계를 가지며 남편보다도 더 외향적으로 활동한다. 한편 지주집단에서
는 남자가 친인척 등과 보다 폭넓은 관계를 갖는다. 그들은 아는 사람과 혼인하는 반면 가
난한 사람들은 자신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낯선 사람들과 결혼한다. 나는 앞서 신부의 인
척관계를 다룬 바 있다. 그러나 왓슨은 대만에서의 경우와 비교할 때 남자 농부들이 인척에
별 비중을 두지 않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녀는 그 차이가 가계집단의 세력 및 성격과 관련
이 있다고 보았다. 하 추엔에서 농부들은 지주사회의 가계집단에 포위 당해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소작인 또는 노동자들이며, 따라서 토지나 노동에서 부자가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
이다. 1905년 토지의 36%를 지주가계가 소유하고 있었으며, 49%는 조상 전래의 땅으로 역
시 지주가문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이런 차이는 어느 정도
의 신분변화와 결합되어 어느 가문, 친족집단에서나 잘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사는 사
람도 있음을 의미하다. 프라이드에 의해 기술된 중국 정부의 추 시엔 마을에서는 일부 부계
친들이 땅을 매입했는가 하면 다른 부계친은 땅을 팔기도 했다. 다시 말해 한 가계 내에서
도 서로 다른 결혼형태나 가족형태를 보였다는 것이다. 동시에 가계 자체가 주로 합동기금
에 대한 접근성으로 인해 보완적인 역할을 했다. 이 기금에서 나오는 수입은 우선 사당의
관리유지에 쓰여졌다. 그러나 이 기금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기능은 젊은 친족의 교육에 재
정적 지원을 하는 것이었다. 페이에 따르면 가문이나 혈통은 상류집단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유지되었는데, 그것은 이 같은 공동기금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페이는
자신의 가문을 예로 들어 합동기금을 위한 공동토지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자 그 가계가 제
각각 흩어졌다고 말한다. 따라서 가계가 효과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보통 조상들의 묘를
관리하고 자손들의 번영을 지켜주기 위한 불변의 공동토지를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가문 내 정부 고위관리가 토지를 희사하면 이 공동토지를 통해 다시 젊은 친족을 교육시켜
학자를 배출하고, 고위 관리직을 얻게 해 가문의 이익을 보호케 하고, 가문의 필요에 부응토
록 했다는 것이다.
지역적 차이
이에 대한 문제는 아서 울프나 미국 사회역사학자(Ebrey, Mann)등의 연구가 없었더라면,
여기에서 간단하게나마 논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우선 어
떤 특정 제도의 경계(이 한계는 어떤 민족이나 사회 또는 문화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님)
와 관련, 내외적 변화의 상태가 총체적인 특성을 식별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례
로 중국의 서로 다른 지방에서의 서류부가혼을 살펴보면 그 기능적 또는 구조적 변화와 함
께 부수적인 변화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적 변화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남쪽지방에서는 북쪽보다 가계, 최소한 합동가계에 보다 더 중요성이 주어지는
데, 이는 정치적, 역사적 차이와 함께 경제적 차이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남쪽은
쌀 생산지역이기 때문에 보다 부유하고 가문의 공동기금을 조성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 한
나라 시대에 이르러 토지의 이용이 가능했던 남쪽지방에서도 정착이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이를 확보하고 방어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한 혈통으로 이루어진 일부 마을에서는 처음
이주를 하고 그 다음에는 다른 씨족을 추방함으로써 한 혈통의 마을이 유지되었다. 정치적
으로 이 지역은 중앙으로부터 멀어서 대체로 지방 사회관습 형태의 사회적 통제에 의존하고
자 자립 자조해야만 했다. 결혼거래와 관련된 지역적 편차는 19세기 초 선교사 스미스에 의
해서도 지적된 바 있다.
중국 남부에서는 딸의 약혼 때에 남자의 부모가 여자의 부모에게 돈을 주는데 이는 단순
하고도 순수한 구매라는 실제적인 목적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중국의 다른 지방에서는
서방에서처럼 신부 가족으로부터의 지참금 외에는 이 같은 거래의 예를 전혀 들어보지 못했
다.
스미스가 결혼거래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었는지 여부는 제쳐두고 그는 북쪽지방에서의
지참금은 유럽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중국 전문가들은 북쪽지방에서는 직접
적 지참금이 보다 강조되었고, 남쪽에서는 간접적 지참금이 보다 비중을 차지했다는데 일반
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양쪽 지방 대부분의 결혼형태에서 찾아볼 수 있
었던 현상이기 때문에 엄격히 대조를 이루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그 차이는 북쪽에서는
농민이라도 상당한 지참금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대만에서의 예를 볼 때 촌락 사람들도 역
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계급에서 보면 결혼예물은 토지가 대부분 포함되지 않은
남쪽에서 더 큰 차이를 보였다. 만일 그 차이가 실질적인 것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
마도 간접 지참금에 보다 비중을 둔 강한 합동가계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여기서 말하는 간접 지참금이란 물론 신랑 가족으로부터 신부에게 가는 선물을
말하는 것이다. 우선 공동토지의 존재는 시장에 매물로 나오는 토지의 양을 상당히 줄이는
결과로 나타났다. 즉 공동토지는 유럽에서 남에게 영구히 양도할 수 없도록 하는 토지이전
금지 형태와 마찬가지이다. 이 같은 땅은 개인적인 기부나 증여가 안 되도록 되어 있다. 공
동토지제에서의 토지에 대한 권한은 돈이나 재물 또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여 받는 형식이
다. 하지만 간접 지참금은 가문의 재산 형식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혼인할
때 주어지면 대부분은 신부와 함께 돌아오며,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은 남편이 죽을 경우 합
쳐지기 때문이다. 한편 부유한 가정에서는 일반적으로 딸에 대한 직접적인 증여에 중점을
두는데, 이런 관습은 보다 여유롭게 살던 남쪽에서 더 자주 발견되고 있다. 또 결혼형태와
가계 계속성의 매커니즘도 지역적 편차를 보이고 있다. 나는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이를 '
상속의 전략'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가계 계속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다. 일례로 남자가 여자 집으로 들어가 살며 장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서류부가혼의 경
우가 바로 그렇다. 이 서류부가혼은 아버지가 딸만 두고 아들을 갖지 못했을 때, 특히 유라
시아에서 널리 행해지던 관습이다. 일부 지방에서는 딸만 있는 집안이 생각보다 많았다. 남
쪽 복건성 지방의 차오-메이에서 A. 울프는 첫 결혼의 26.4%가 서류부가혼임을 발견했다.
이는 많은 젊은 남자들이 동남 아이사에 노동이민을 갔기 때문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이 숫
자는 1886-1915년 대만의 해산에서 결혼한 남자 중 10.8%가 서류부가혼이었던 것에 비해
높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수치는 이런 식의 결혼이 1935년 전까지 평균 30%에 이른
같은 섬의 충세(Chung-she) 마을의 수치보다는 낮은 것이다. 버클레이에 따르면 대만에서
1906년 당국에 신고된 결혼 중 21.8%가 남편이 신부 지에 들어가 산 것으로 나타났으나 세
월이 지나 1943년에 이르러서는 이 숫자가 6.3%으로 떨어졌다. 남쪽지방 대부분에서 아들이
없는 집안은 사위를 맞아들였다며, 친딸이 없을 때는 양녀를 얻은 다음 혼인을 시켜 사위를
맞아들이기까지 했다. 일부 지방에서는 이런 일이 적지 않았는데, 이는 남자들이 많이 이주
해가거나 아들이 너무 어려 성인 남자의 일손이 부족한 것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중국의
다른 지방, 특히 북쪽에서는 이런 식의 혼인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나라 시대에 남자
가 과부와 결혼해서 과부 집으로 들어가는 경우는 있었으나, 처녀와 혼인해서 그 집으로 들
어가는 경우는 없었다. 중국인들은 남쪽지방이라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복잡한 계약으로 맺
어지는 혼인을 경멸했다. "일반적인 동의에 따라 남자를 양자로 맞아들이는 것이 가계의 영
속성 문제를 해결하는 보다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Pasternak 1985:324)." 대만의 일부
지방에서는 가난한 집안은 사위를 자기 집으로 맞아들이고 부잣집은 양자를 얻는 것으로 인
식되었다. 이는 가문의 혈통이라는 점에서 어느 쪽이 더 강한 것인가는 따져봐야겠지만, 왓
슨이 말한 '보다 강한 혈통'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만에서 특히 상례적이었던 다른 결
혼형태는 민며느리 제도이다. 장차 신부가 될 여지가 어렸을 때 장래 신랑의 집으로 들어가
사는 것으로 결혼비용이 별로 들지 않는다. 데릴사위제의 경우와는 달리 이런 형태의 결혼
은 중국 사회 전체에 분포되었으며, 대만 일부 지방과 복건성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보였다.
1886-1905년 기간 동안 대만 해산에서는 남자 첫 결혼의 40%가 이런 형태의 결혼이었다.
1943년 복건성 남서쪽에서 실시된 한 조사는 각 과정의 51%가 장차 며느리감을 양육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식의 결혼이 널리 행해졌음에도, 울프는 북쪽지방에서의 이런
관행은 남쪽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북쪽에서는 이것이 소녀가 고아가 될 경우를 염려해서
또는 기근으로 부모가 딸을 양육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의 결과로 나타났다. 즉 소녀
를 친가족으로부터 떼어내 남에게 주어버리거나, 팔거나 또는 혼인의 형식으로 처분하는 것
이다. 남쪽에서 이는 두 가족 간 결혼의 형태로 정착되어 지역 전반에 걸쳐 행해졌으며, 여
기에는 일부 긍정적인 요소도 있었다. 이에 비해 통상적인 결혼은 분명히 데릴사위제와 부
정적으로 상호 연관되었다. 북쪽에서 민며느리 제도가 비교적 적었다는 것은 그 지방에서
통상적인 혼인형태가 지배적이었음을 의미한다. 민며느리 제도는 여러 가지 형태로 가난, 또
는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한 배려가 깃들여 있다(결혼비용을 절약하거나 딸의 양육
비를 절감하기 위한 것 등). 또 신부가 부족할 때 이를 선취하기 위한 것이라든가 출산을
조절하기 위한 것 등도 그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관습은 데릴사위제와 마찬가지로 당
시 기세가 높던 한나라 문화의 유교적 규범과 상충되는 것이었다. 데릴사위제의 일반적인
한 형태는 남자 성인이 없을 때 대리인으로서의 남자 상속인이나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다. 특히 전족 관습으로 여자가 농장 일을 하기 어려운 사회에서는 노동력을 획득하는 기능
을 했다. 노동력은 다른 방식으로 충족될 수도 있다. 하지만 상속은 어떤가, 그 대체방법으
로 채택된 것이 양자제도로, 이는 유교의 규범이 일반화돼 있던 북쪽에서 보다 널리 행해졌
다. 남, 북의 지역적 차이를 설명하는 문제는 합동가계를 논하는 과정에서 제기되었다. 가문
의 공동기금은 새로운 정착지로서 비교적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쌀을 경작하는 남쪽지방에서
그 예를 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지역은 중앙에서 거리가 멀어 토착민들의 저항이
생기고, 가문이 비교적 독립적이었기 때문에 중앙의 통제가 강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정치
적, 이념적, 경제적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연계되었던 것이다. 데릴사위제가 많이 행해진 것
은 일견 강력한 혈통과는 상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반면 민며느리 제도는 자신
의 딸로서의 지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남의 딸을 강력히 통제하기
위한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가계의 세력과 관련된 여성의 지위에 대한 논란의 이론적 배경
은 아프리카의 자료에 근거하고 있으나 가계구조의 차이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경
우든 가계세력에 대한 발상은 모호하게 공식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 논란은 결론이 나지 않
고 있는 셈이다. 한편 남쪽지방이나 한나라 시대에 이미 장악된 곳이긴 하지만 비교적 최근
에 확장된 지역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처럼 보통의 예를 벗어난 결혼형태는 한나라가 새
로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발견된다는 울프의 지적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영토확장이라는 것
은 부분적으로 정복을 의미하는 것이며, 다른 일부는 지배자 친족의 대량 이주를 뜻하는 것
이기도 한다. 새로 이주한 사람들은 남쪽지방의 비옥한 땅에 자리를 잡고 일부는 집약적 농
사를 짓거나 이동경작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들의 경작방식은 북쪽의 한나라에 비해서는
덜 발달된 것으로, 태평양 중남부의 여러 섬에 사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의해 점령된 남
중국으로 그 영역을 점차 넓혀갔다. 이들이 대만까지 세력을 펼친 것은 명나라에 이르러서
였다. 이민 온 사람들 중 일부는 종종 혈족결혼을 했는데, 그들은 분명 모계에 기반을 두었
다. 일반적인 관습을 보다 상세히 들여다보면 이 지역에서는 한나라 중앙정부의 관념이 퇴
색하고 유교적 교훈이나 영향이 사라져 그 규범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임기
응변적인 요소와 토착인들의 관습, 그리고 농장의 필요와 변화에 기꺼이 적응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북쪽이 한나라 사회의 근본 터전이면서도 인접 유목민들의 침입에 보다 노출
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그 일부 지역은 이슬람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유목민들 중에는
가문의 역할이 강한 민족이 있어서 그 자체가 중국의 한 전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따
라서 중국 남, 북 지방의 관습에 있어서 일반적인 개념의 차이를 단순한 계급대결처럼 말하
는 것은 원색적인 이분법에 지나지 않는다.
시대에 따른 변화
중국의 친족과 결혼제도를 논하면서 공산혁명 전의 계급과 지역에 따른 편차를 잠시 다루
었다. 그 중 초기 변화에 대한 문제는 합동가계 및 다른 가계에 이르는 역사적 사실들을 논
하긴 했지만 사실 내 능력 밖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폭넓은 결혼의식이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됐고, 이것이 중국 전역을 통해 결혼예식과 혼인절차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사를
제공했다는 점은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통칭 '전통적'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으나 그렇다고 정체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제도가 아무리 허
술하게 정비되어 있다고 해도 계급과 지역적 차이를 허용하고 있음은 그 사회가 탄력적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비록 그 역동성이 외부세력으로부터 파급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내부
에서 발생하는 것이거나 이미 존재하는 환경에 대한 상이한 적응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
이다. 장기간에 걸친 친족형태의 변화는 최근 에브레이(Abrey)에 의해 연구되었으며, 그녀
는 기본적으로 증여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의 결혼거래에
대한 분석에서 그녀는 내가 말한 간접 지참금이 직접 지참금으로 변하는 데 대한 중요성과,
상당한 결혼비용이 이제는 신랑의 가족보다는 신부의 가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인식했
다. 물론 직접, 간접 지참금 양쪽 모두 큰 몫은 결혼한 부부, 때로는 부인에게만 주어졌다.
에브레이는 이 같은 변화가 그 당시의 사회현상이었던 경제팽창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다.
거기에는 물론 도시의 증가, 토지분배에 대한 국가통제의 감소, 배타적인 정부관리 임용에서
시험제도에 의한 관리 선발, 불교의 쇠퇴, 신유교 사상의 등장, 중국 문화의 남부 이동, 그리
고 지방가문의 발전 등과도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녀는 그 같은 변화가 다음 세
가지 요인과 결부되어 있다고 보았다. 첫째, 상업주의의 신장과 보다 자유로운 형태의 토지
임대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지참금을 줄 수 있는 여력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당시 엘리트들이 지참금을 정치적 장악, 즉 일종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위해 이용했을지 모
른다는 것, 셋째는 다른 것과 일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상황의 변화로 특히 엘리트층에
서 다양한 상속이 개발되어 점차적으로 평민층에 전파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부가
증가하고 학자 및 상류층의 증대로 상황이 유동적이 되자 엘리트층은 결혼 커넥션의 확보
방법으로 지참금 제도를 이용하게 되었다고 에브레이는 주장한다. 물론 많은 지참금은 딸들
의 지위를 높이고 남편의 부에 대한 접근 기회를 증대시켰을 것이다. 한편 남자는 마찬가지
로 잠재적으로 힘이 있거나 돈이 있는 사람의 딸을 유인하기 위해 많은 약혼선물을 제공하
기도 했을 것이다. R. 왓슨은 홍콩의 부유하고 세력 있는 가문이 혼인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어떻게 지참금을 사용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송나라 시대와 현재 홍콩에서 상류층은
결혼으로 보다 폭넓은 인연을 맺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가난한 사람들에 비해 부유
한 집안의 일반적인 특색이 되고 있다. 결혼 인척의 세력이 강할 때 직접적인 지참금이 최
고로 높다는 것은 명백하다. 기본적으로 이런 인척 유대는 에브레이의 지적대로 어느 쪽 선
물에 의해서든 간에 맺어지고 또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지참금을 '뇌물'이라고 말하
는 것이 더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만일 이 시대에 실제적인 변화가 있었다면
이는 다른 지역의 추세와 마찬가지로 증가된 부의 순환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거의 틀림
없다. 그러나 어떤 변화가 발생했든 이는 정도와 강도의 문제이지 종류나 범주의 문제는 아
니었다. 그것은 결혼거래라는 것이 오랜 옛날부터 중국에 존재해왔으며 오늘날에도 모두 행
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송나라 시대에 부유한 남자는 왕의 친척 딸과 결혼하기 위해
엄청난 간접 지참금을 지불했다. 청나라 시대 왕족의 딸과 결혼한 남자는 특별한 허가 없이
는 처가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부인이 지위에 따라 공직을 얻었으며 궁정에서
제공한 집에서 살기도 했다. 부인의 지위와 거처가 남편의 지위와 거처를 결정한 것이다. 하
지만 이것은 구매가 아니고 귀한 여자와 결혼하는 대가인 셈이다. 어쨌든 간접 또는 직접
지참금이 배우자의 지위를 높이는 데 이용되기는 했지만, 정상적인 혼인은 동급 배우자간에
대체적으로 비교될 수 있는 사회적 신분의 두 가족이 뭉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지참금의
중요성의 변화는 10세기경에 일어났다. 합동가계의 증대는 약 2세기 후에 일어났다. 에브레
이는 부계혈통에 대한 강조는 부분적으로 다양한 상속의 전파에 대한 반응이라고 해석했다.
또 가문과 혈통집단의 증가는 사치금지법의 형태로 지참금에 제어를 가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강력한 가문의 전통을 갖고 있는 지역의 예를 보더라도 지참금은 부유한 집안
에서의 문제이지 가난한 집의 일은 아니다. 지참금과 합동가계의 상호관계는 분명 복잡하기
이를 데 없고 부분적으로는 경제장악의 여러 변화 요인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중동과 이도, 그리고 일부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여자들에게 할당된 재산의 증대로 문제가
발생했으며, 이 때문에 사치금지법이 제정되곤 했다. 동시에 이처럼 여성에 대한 지참금은
남계친 집단에서 원칙상 주어버린 재산을 자신들이 관리하여 일부는 가문 공동기금을 조성,
여자보다는 남자 후손들에게 혜택을 주기도 했다. 지참금은 가문사회에 존재하는 모순을 해
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그 제도 내에서 역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에브레이는 지적
하고 있다.
4. 대만에서의 지역적 차이
편차는 계층뿐 아니라 지역 그리고 지방에서도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대만에 와서 정착
한 본토 주민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 결과 밟혀졌다. 현장 조사자들은 이 지역에 용이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으며, 1895년 시작된 일본 식민정부는 이곳 인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같은 이유로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에 대한 버클레이
(1954)와 황(1980)의 연구를 다루었다. 이들은 모두 일찍이 연구되었던 인류학에서의 가계
모델에 문제점을 제기하는 데이터와 함께, 유교 모델과 다른 대만의 변화를 증거문서로 제
시했다. 여기에서는 다시 대만 내에서의 각 지방 차이와 그곳에서 행해졌던 세 가지의 서로
다른 결혼형태의 개인간 관계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대만에서처럼 다른 식민정부에서 사람
과 재산에 관해 체계적으로 기록한 것은, 사회적 통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하고 전리품에 대
한 기록과 과세에 대한 기초자료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5년부터 일본 경찰은 사람
들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 모든 세대에 그 가족을 등록하도록 지시했다. 또 인구 센서스
데이터, 정부 통계와 함께 토지 및 토지세에 대한 등기를 하도록 했다. 인구통계학자들이 이
용하는 자료는 바로 이런 것들로, 버클레이의 연구는 여자가 적절한 절차를 거쳐 남편의 가
계에 편입되는 유교식의 대규모 가부장적 가족과 중국 남부지방의 현실과의 차이를 보여주
고 있다. 그러나 대만에서 각 세대의 가족 수는 엄청나게 많았던 것이 아니다. 이들의 평균
가족 수는 유럽이나 아시아의 다른 지역보다 크게 많지가 않았다. 연도별 수치를 보면 다음
과 같다. 당시 다른 민족, 즉 중국 본토나 일본인 이주민 등의 가계별 가족수는 이보다 적어
4.0명이하였다. 이 같은 수치는 1930년대 중국 본토 가족에 대한 버크(Buck)의 조사 결과와
부합되는 것으로, 그 가족 수는 평균 5.2명이었다. 이는 또 당나라 시대(AD 780)의 평균 가
족 수 5.5명과도 유사한 수치로, 당시 핵심집단은 기초가족이었다. 다른 지역의 가계별 가족
수를 비교해보면 1574-1821년 영국 잉글랜드 지방은 4.8명, 17세기에서 1955년까지 일본에
서는 4.9명이었다. 중국의 가족규모가 일본이나 유럽의 핵가족과 비교하면 대가족으로 간주
되고 있긴 하지만 그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규모를 비교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중국이나 인도 같은 사회에서처럼 주거, 생산, 소비나 재산소유 단위 중 어느
것을 중심으로 다루느냐에 따라 그 가족 구성원의 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또 가
계별로 공식적인 분리가 이루어진 후에도 오랫동안 같이 살기도 하는 등 그 양상이 분명하
지 않을 때가 많다. 분가의 과정이 길 때는 시간이라는 요소가 중요한데, 이는 단순히 어느
한 시점에서 어느 집단의 규모나 구성원을 헤아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전개되는
상황, 노동수요, 상속, 가족의 통제, 그리고 체면과 재산 등 시간에 따라 변하는 여러 요인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라시아 사회에서는 이런 요소들이 명백하게 분리되지 않아 유럽
과 아시아의 가족 및 결혼의 차이점을 조사하는 최근의 연구는 가족 수보다는 세대의 구성
에 초점을 두고 있다. 성별에 의해 나누어지는 대만 가계의 구성을 살펴보면 현격히 드러나
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두 번째 아이의 성 비율에서 남아 대 여아가 119 대 100으
로 남아가 여아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다. 둘째, 여성 가장의 비율이 상당히 높아 1920년과
1930년에는 12%였다. 혼인과 관련해서 이 수치를 살펴보면 보다 흥미롭다. 중국 사회는 결
혼에 관한 한 특별한 선택이 없다. 1905년 35세 이상의 남자 중 결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의
비율이 95.3%인 반면 여성의 비율은 99.7%로 그 비율은 상당히 높았다. 결혼에 대한 압력
은 30세 이하의 남성에게는 점점 더 강해지고 여성에게는 점차 약해지는 추세임에도 불구하
고, 이 수치는 상당 기간 동안 변하지 않았다. 동시에 버클레이는 결혼시장은 적령기의 여성
이 얼마나 있느냐의 성 비율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는 남아와 여아를
달리 취급하는 데 따른 것으로, 남녀의 성 불균형은 살해나 고의적이든 아니든 양육 소홀에
서 비롯되었다. 여야 살해는 대부분의 아시아 사회의 특징이 되고 있다. 부유한 집안에서는
너무 많은 딸들 때문에 지참금을 지나치게 많이 소비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고 가난
한 농부 집안에서는 모든 아이들을 제대로 먹여 살릴 수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중국
에서 여아 살해는 주로 후자가 그 원인이었다. 가난 때문에 많은 집안에서는 원치 않은 아
이를 낳았을 경우 유기 또는 고의적인 태만으로 제거했던 것이다.
인도의 상류집단에서는 그 같은 일이 주로 지참금 때문에 벌어졌다. 고대 로마에서도 부
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원치 않은 자식이 태어나면 재산을 보전하고 식량을 절약하기 위해
유기 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일제 치하 대만 호키엔의 지주들도 여아를 위기상황이 아닌
평상시에 심지어 가난한 집안에 '어린 며느리'로 주어버리곤 했다고 울프는 지적했다. 분명
딸에 대한 차별이 있음을 인식해서였다. 이것은 여자에 대한 증여제도의 역설적인 현상 중
하나다. 여자들도 가족 재산과 명예에 대한 권리가 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여아 살해와 차별은 어느 면에서는 여자가 재산과 관련해 비교적 동등하게 취급되
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딸을 남에게 주어버리거나 살해하는 행위가 딸이 유아거나
어렸을 때 이루지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딸이 여성으로서 또는 소녀로서 자신의 정체
성을 확립했을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그들은 혼인을 하거나 재산의 증여가 이루어지는 것
이다. 선교사들은 일찍부터 중국 본토와 대만에서 없애려고 노력했다. 이는 일본이 대만인들
의 출산에 대해 행한 몇몇 긍정적인 조치 중의 하나였다. 도쿠가와 시대 일본의 각 가정은
자신들의 생활수준을 높이거나 최소한 현상 유지할 수 있도록 가족 구성원을 일정 수준으로
제한하는 일련의 전략을 사용했다. 일본 사람들은 당시 양자뿐만 아니라 낙태와 영아 살해
를 통해 최적의 가족규모를 유지했다. 즉 자녀가 넘치면 남에게 주어버리고 부부가 소망하
는 자녀의 수를 채우지 못하거나 원하는 성별의 자식을 낳지 못하면 얻어오는 식이었다. 이
같은 관습은 페이가 중국의 예에서 기술한 것처럼 경제적인 핍박으로 이루어진 처절한 행동
이 아니고, 적정의 가족 구성원을 만들려는 고의적인 것이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낙태를 했
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영아 살해 같은 것은 불교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가정에서는 출산 후 영아 살해, 또는 남녀 아이를 매매하거나 양자로 보냄
으로써 자녀의 수를 조절하려 했다. 또 남쪽지방에서는 어린 소녀를 결혼시키는 방법으로
가족 수를 조절하기도 했다. 고의적인 영아 살해는 그만두더라도 어린아이에 대한 양육 태
만은 성 비율을 뒤틀리게 했다. 1895년 이전 여자아이가 영아기를 거쳐 소녀기까지 살아남
을 확률은 대단히 적었다고 버클레이는 말하고 있다. 물론 해가 지날수록 여자에 대한 핸디
캡은 점차 줄어들었다. 결과적으로 1905년 15세부터 19세까지의 연령집단에서 남자는 여자
1백 명당 20명이 더 많은 비율을 보였다. 한편 일본에서도 여자 어린이 사망률이 남자 어린
이보다 높았다. 인도에서도 성별로 차이가 났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여자 어린이에 대한 위험
은 유아였을 때 닥쳐오고, 어린이 시절은 그 위험이 없어졌다가 14세부터 55세 때까지 다시
닥쳐온다. 이는 조혼과 관련 있음을 시사하는 것인데, 인도의 조혼은 중국보다 빨라 사춘기
직후 바로 남편과 합류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Miller 1981). 이 같은 현상은 사회환경이 그
원이 되고 있다. 결혼이 사춘기 전후 또는 사춘기 때 이루어지는 곳, 특히 혼전 성관계가 세
심함 보호에 의해 금지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결혼 전 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가 별로 없다.
영아 살해나 유기는 혼인한 부부가 어린아이를 처리하는 가족의 전략문제인 것이다. 중국에
서 영아 살해는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있다. 1953년까지도 남아 선호가 분명히 존재하여, 전
체적인 남녀의 비율이 107.7 대 100이었다. 남자의 비율이 높은 것은 출생신고 때 남아의 경
우에 더 많이 하는 데 기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아이가 한 명만 있는 가족을 조사해
보면 남녀의 성차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성 비율의 불균형은 여자아이를 양육하고 결
혼시키는 비용이 더 많이 든다는 데도 일부 기인한다. 그런 한편 딸들은 신부로서는 분명
탐나는 존재이다. 성의 불균형은 전반적으로 남성의 결혼이 늦어지고 여성의 결혼이 어린
나이에 이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결혼할 것으로 기대
되는 사회에서는 젊은 신부를 구하는 데 일종의 압박이 작용, 세계 곳곳에서 조기 약혼이
행해졌다. 중국 남부 일부 지방에서 보았듯이 신부를 구하고 딸을 처분하는 문제가 양녀 또
는 양육 후 며느리로 삼는 제도로 해결점을 찾았다. 이 제도를 통해 딸의 부모는 양육비를
절감하고 양가 부모는 혼인비용을 절감함으로써 양아 살해에 대한 건설적인 대체방법이 된
것이다. 어린 신부가 장차 남편이 될 사람의 집에 들어가 사는 제도는 유교사상과 어느 정
도 일치하는 것이나 데릴사위제는 그에 어긋나는 것이다. 대만에서 발견된 다른 두 가지 혼
인풍습, 과부의 재가와 이혼도 유교사상과는 맞지 않는다. 상류사회에서, 그리고 보편적인
성문규범은 과부가 재혼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한 남편에 대한 충성과 혼인의 유대는
대단히 강한 것이어서 인도에서처럼 과부는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자살을 하기도 했
으며, 이는 갸륵한 일로 여겨졌다(Johnston 1910:217). 다른 과부들은 정절을 지키며 살았으
며, 이들에게는 특별 표창이 내려지거나 지방관보에 자서전이 실리고 열녀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프리드만은 이 같은 관행은 여자가 남편 가계에 편입되면서 생기기 시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정절을 지키며 혼자 사는 과부에 칭송이 모아지기는 했지만, 사회적으
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은 재혼을 했다. 아버지가 죽은 가족은 단순히 충절을 지킨다는 의지
만으로 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혼은 많은 지역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울프는
대만 북부지방에 대한 연구에서 과부가 50%가 재혼을 했다고 적고 있다. 그는 또 대부분의
과부가 정절보다는 남편의 죽음에서 비롯되는 독립을 유지하는 데 더 관심을 가졌다고 말했
다. 과부가 가난한 사람과 재혼할 수도 있으며 재혼으로 남자가 더 이득을 볼 수도 있다. 또
재혼에는 별 비용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과부가 이미 자식을 두었을 때는 문제가 보다 복
잡해진다. 이때는 새 남편이 여자 집으로 들어와 사는 경우도 있었다(Barclay 1954:212). 일
부는 배우자의 사망이 아니라 이혼으로 혼인을 끝맺기도 했다. 여기에도 다시 이상과 현실
의 차이가 있었다. 이혼을 하면 남편의 변덕 때문이라고 말하는 여자는 불명예를 안고 친정
으로 돌아간다. 그러고는 다시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버클레이가
지적했듯이 이를 완화하는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다양해진 상속방식이다. 이혼
의 비참함은 장차 남편 가족에게 돌아갈 여자의 지참금을 여자에게 주거나 다른 자비로운
배려에 의해 경감되었다는 것이다. 일제가 보관하고 있는 대만 주민의 이혼(별거도 포함)에
대한 자료에 따르면 1906년 결혼 5년 이내에 이혼한 비율이 22.3%로 높았으나 점차 낮아져
1929년에는 3.0%로 나타났다. 이혼한 사람의 상당수는 재혼을 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남
자보다는 여자가 재혼할 기회가 많았다. 이혼을 했거나 과부가 되었던 사람들이 재혼하는
경우가 높은 데 비해 남녀가 초혼을 하는 비율은 놀라울 만큼 낮았다. 1906년에 58.5%이었
던 초혼의 비율이 1943년에는 86.4%로 높아졌다. 당시 많은 남자들이 재혼하는 여자를 자신
의 첫 부인으로 맞이한 것이다. 1940년에 이르러서는 남녀 양쪽 모두 더 오랫동안 결혼이
지속되었는데, 이는 결혼 선택의 범위가 보다 넓어졌음을 반영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 같은 세 가지 유형의 결혼은 울프와 황(대만) 연구의 초점이 되어 이들의 저서, <중국
의 결혼과 양자 1845-1945(1980)>에 상세히 고찰되어 있다. 이들은 이 저서에서 중국 친족
의 중요도 변화를 예시했다. 이 역저의 특징은 해산 지방의 역사적 기록뿐만 아니라 집중적
현장조사의 기초가 되고 있다. 이들의 연구는 전에 인류학자들이 응용한 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과거를 재구성했다. 이들은 개인의 삶의 역사와 증빙서류, 그리고 일제시대의 상세
한 기록에 연구의 기반을 두었다. 이처럼 다른 접근 방식(다른 데이터의 이용)은 전과는 다
른 관심과 결론으로 이어졌다. 우선 50%의 결혼이 일반적 결혼형태로 정상적으로 이루어졌
다. 40%s는 일반적이 아닌 형태의 결혼으로 가족이 아들의 부인(민며느리)을 양육하거나 다
른 10%는 데릴사위제였다. 데릴사위는 양자를 맞는 것과 마찬가지의 기능을 한다. 이는 또
일반적이 아닌 결혼에서 민며느리를 들이는 것과 일반적인 결혼에서 신부를 얻는 것이나 마
찬가지인 셈이다. 하지만 해산 지방에서 데릴사위의 비율은 민며느리에 비해 16.2%이었다.
또 양자가 정상적인 아들의 수에 비해 5.5%에 그친 데 반해 민며느리가 되기 위해 남자의
집에 들어간 '양녀'는 정상적인 딸에 비해 14%로 그 수치가 더 높았다. 양자는 두 가지 형
태로 나눌 수 있다. 즉 친족 내에서 데려오느냐 아니면 친족 밖에서 데려오느냐 하는 것이
다. 해산 지방에서는 남계친에서 양자를 데려올 경우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다. 중국
의 여러 지역에서는 남계친이 아닌 혈통에서 양자를 맞는 것을 엄격히 금했다. 다만 남계친
쪽에 적당한 아들이 없을 경우에 한해 예외를 인정했는데, 이는 유교적 관습 때문이었다. 양
자는 양부모에 대해 아들로서의 권한과 의무를 원래 가족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아니었다.
부계친 외에서 양자를 들인다는 것은 낯선 사람의 지식을 양자로 맞거나 심지어 누나의 아
들을 양자로 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때의 남자를 '솜벌레'라고 하는데 이는 벌통에서 초록모
충을 낚아채는 장수말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비 부계친에서 양자를 들일 때는 상업
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며, 양자는 본가와 완전 결별한다. 이때의 양자는 흔히 상인이 먼 곳에
서 데려온다. 어떤 방식의 양자이든 양아버지가 사망하면 아들로서 완전한 상복을 입는다.
그러나 '솜벌레'는 친아버지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석을 한다면 그는 상주의 친구들이 하는 것처럼 붉은 줄이 간
흰 띠를 팔에 두른다. 한편 부계친족에서 들어온 양자는 친아버지로부터의 재산상속 여부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 양자의 세 번째 형태는 사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상속자 없이 사망하면 그 형제가 고인의 이름으로 아들을 하나 할당한다. 이 같은 관습은
과부가 고안이 된 남편의 형제와 혼인하는 수혼이나 수단 남부의 누에르(Nuer)족에서 행해
지는 영혼결혼식과 유사한 것이다. 물론 이는 부인 대신 어린이를 거래하는 점이 다르다. 이
때의 양자도 당연히 상속을 받는다. 울프와 황은 한 남자가 그의 조상을 모신 사당에 데리
고 가서 그의 아들을 죽은 형에게 양자로 줄 때 맺었던 계약서를 빼내 보여주는 모습을 기
술하고 있다. 당시 상자 속에는 두 개의 계약서가 있었다. 하나는 그 남자가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동생이 형을 따라 작성한 것이었다. 이는 형의 아들들이 가족재산을 지나치게
많이 요구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이라고 그 사람이 설명했다. 혈통이 강해야 된다고 믿는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외부로부터 양자를 들이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친족 내에서 양자
를 찾아야 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혈통의 강약 비교는 그 기준에 문제가 있어 학
자들간에 합의된 것이 없다. 그럼에도 가계가 합동형인 남쪽에서는 어떤 형태의 양자이든
드문 일이었으며 가문의 지속을 위해 다른 방법이 이용되었다. 만일 당신이 아들이 없고 그
래서 데릴사위를 데려와 가문을 잇기를 원한다면 족외혼의 규정 때문에 딸을 씨족 내의 남
자와 결혼시킬 수 없다. 이는 족외혼이 아니었던 지중해나 근동 지방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형제와 딸, 즉 사촌간의 결혼은 혈통의 강화보다는 가내 그룹의 재산이나 재화 보
존과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이런 목적이라면 다른 방법이 동원되었다.
족외혼처럼 족외 양자가 혈통을 강화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약화시키는 것인지는 판단하기가
불가능하다. 족외 양자는 북쪽지방에서 기대되는 것처럼 유교 규범에 보다 걸맞는 것이다.
울프와 항은 장차 신부가 될 사람이 남자의 집에 들어가 사는 것을 '양녀'제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찍이 수양딸이나 며느리라고 부르는 것이 선호되었다. 장차 며느리가 될 사람은
결혼을 할 권리가 없는 구매된 하녀와는 엄연히 구분된다. 하지만 짝이 지어진 장래 신부와
짝이 지어지지 않은 장래 신부는 다르다. 이는 한 배우자가 다른 집안에 들어갈 때 장래의
짝이 존재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전자는 후에 혼인을 하지만 후자는 반드
시 혼인을 한다는 보장이 없다. 일부 소녀는 치료적 요법이 목적으로 짝이 없는 채 다른 집
안에 들어가기도 한다. 즉 그러면 그 부모가 아이, 특히 아들을 낳을지도 모른다는 속설이
있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울프는 이 같은 남부 관습과 북부 관습의 차이를 지적했는데, 북부에서는 고
아가 장래 처가에 의해 양육되기도 했다. 양자를 데려와 친족으로 삼는 것보다는 장래 신부
로 삼기 위해 데려다 양육하는 제도가 조혼의 형태나 조기 약혼 그리고 여자가 귀한 곳에서
의 배우자 선취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조혼은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이
점이 있다. 중국에서는 '씨를 뿌리면 일찍 수확한다'는 말과 함께 '며느리를 일찍 보면 손자
를 보는 기쁨이 있다'는 말이 있다. 즐거움은 전체적인 노동력의 수를 늘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시에 논밭 일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 적시란 바로 할아버지들
이 활발한 활동을 펴지 못하는 은퇴시기에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이
를 위한 가장 값지고 효과적인 방법은 사내아이를 얻는 것이다. 이는 고의적인 전족풍습으
로 여자는 농장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특히 그렇다. 따라서 집안 어른들을 일
찍부터 아들을 위한 신부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동시에 가난한 집안에서는 빨리 가문을
잇기를 바라는 집안에 딸들을 보내 양육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자신의 딸을 결
혼할 연령까지 키운 집안은 결과적으로 남의 집안의 재 생산자를 양육한 셈 인만큼 결혼선
물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때의 선물과 결혼이 어떤 연관이
있을지 몰라도 이것이 어떤 중요한 몫의 신부값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특히 과거
신부의 가족이 흔히 약혼선물을 지참금의 형식으로 신랑집에 되돌려주어 이들의 독립자금이
되도록 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Croll 1985:115). 어떤 형식의 조혼이든 이런 것들은 모두
자신들의 선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주선에 의해 이루어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 이
경우 딸들에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자금을 떼어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랑 가족은 이런
식의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문의 지속성을 위해 다른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더욱이 세대간의 간극이 적을 때는 일찌감치 서로 무거운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런 장점은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더 중요했을지 모르다. 어떤 경우든 농촌사
회에서 연로한 부부가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 것보다 애석한 일은 없다.
통상적이 아닌 결혼은 일반적인 결혼보다 어린 나이에 이루어진다. 성적으로 성숙한 2-3년
후에 그들은 대부분 통상적인 결혼 때와 마찬가지의 예식을 올리다. 가난과 무지로 일반 관
습을 지키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시 행해지는 관습을 따
르는 것이다. 통상적인 결혼의식 몇 가지 특징은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대만의 경우 몇 가
지 더 들어보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식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 중 하나는 신부
가 집을 떠나 신랑의 집으로 가는 과정으로, 이때 이전되는 재산은 만인에게 공개된다. 이날
전시를 위해 일부 사람들을 물건을 빌려 쓰고 돌려주기도 하지만 여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전시되는 물건은 점점 늘어갔다. 이에 비해 소작인이나 농장 노동자가 딸을 시집보낼 때는
전시되는 것이 신부의 소유물 정도에 그치고 만다. 이런 의식을 공개적으로 치르는 것은 신
부에 대한 권한이 친정아버지 쪽으로부터 신랑집으로 이전되었음을 만천하에 알리려는 것이
다. 통상적인 혼인의 경우 그 다음에는 신부가 새로운 지위를 갖고 친정을 다시 방문한다.
첫 단계는 신부값과 지참금에 대한 어려운 협상을 벌이고, 이것이 끝나면 상티아라고 하
는 예식을 올린다. 신부 아버지 조상의 사당 앞에 앉아서 신랑의 어머니가 신부의 왼손 가
운데 손가락에 구리와 금반지를 끼워준다. 이날부터 신부의 명판은 신랑집에 놓여진다. 만일
신부가 결혼일 전에 죽으면 신랑은 다시 결혼한다(Wolf & Huang 1980:72).
혼인하는 날 두 번째 과정은 신부가 여왕의 것을 본따 머리장식을 하고 중매자의 안내로
그녀의 새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처음 며칠동안은, 일례로 손잡이에 흙이나 검댕이 묻은
큰 칼 등이 시험으로 주어진다. 그런 후 친정을 방문하는데 그때는 손님 대접을 받는다. 물
론 이때의 방문이 끝이 아니다. 신부는 그 후에도 때때로 친정을 방문하는데 그때는 손님
대접을 받는다. 물론 이때의 방문이 끝이 아니다. 신부는 그 후에도 때때로 친정을 방문하며
따라서 유대가 계속된다. "시집간 여자가 설날에 3년 동안 계속 친정을 방문하지 않으면 친
정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여겨져, 그녀가 자신의 남자형제들의 행운을 비는 특별의식을
치르기 전에는 다시 친정을 방문할 수 없다." 울프와 황은 이것을 신부가 신랑의 가족에 편
입되는 과정으로 보았으나, 우리는 분명히 친정과 여러 가지 연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이
같은 개념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더욱이 다른 곳에서처럼 해산 지방에서도 여자가 결혼
할 때 남편의 가족으로부터 받은 것과 자신의 직접, 간접 지참금으로 스스로를 정립하고 있
기 때문이다. 신랑의 가족은 신부에게 '약혼금'으로 상당한 돈을 주는데 이는 '친정에서 그
녀를 양육한 데 대해 감사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의 문제점은 그 돈
을 받은 후 신부는 금, 은, 보석, 가구, 옷, 그리고 예외적이긴 하지만 부잣집에서는 토지 등
의 지참금을 갖고 시집으로 가는 점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딸을 기
르는 것은 도둑을 기르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신부는 신랑의 선물뿐만 아니라 친정
에서 받은 선물까지도 모두 가져가기 때문이다. 결국 여자는 양가 집안으로부터 증여를 받
는 셈이다. 프리드만은 신부 가족들이 이처럼 희생을 하는 것은 신부가 어떤 경제적인 권리
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지참금의 공개로 자신들의 신분지위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울프와 항은 이런 설명이 부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가난한 농부가 무엇 때문에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가. 그것은 신부의 가족들이 무엇인가
보내야 신부가 시집에서 대접을 잘 받을 것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지
참금을 준 후에도 만일 신부가 학대를 받으면 친정 가족의 항의를 하고, 그녀가 죽으면 장
례식에 참석해 시집에서 잘못해서 죽은 것이 아닌가 확인을 한다. 신부 가족의 지위에 영향
을 미치게 된다는 프리드만의 해석은 가계혈통에 대한 그의 이해와 일치하는 것이다. 지위
는 오로지 경제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서로 관련이 없다고 보
기는 정말 어렵다. 더욱이 이때 고려되는 지위는 결혼 때뿐만 아니라 딸이 부인으로서 영위
해야 할 삶에 적용되는 것이다. 결혼과 지참금은 딸을 떼어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딸을
높든 낮든 그녀의 수준에 맞게 정립시켜주기 위한 것이다. 딸은 일단 출가하면 그녀가 혼인
한 가족을 지속적으로 지원할 권한을 부여받는다. 만일 그녀의 남편이 죽는다면 "그의 형제
들이 과부가 된 형수를 지원하거나 가족재산 중 고인의 몫을 형수가 갖도록 허용해야 한
다." 후자의 경우 과부는 과부산과 함께 지참금도 차지한다. 이 경우 친정에 생계보조나 재
산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와 친정 가족은 계속 그녀의 위치에 대해 걱정하며, 어려
운 환경에 처해질 경우 그녀를 지원한다. 혼인할 때 딸을 부인으로서 넘기는 과정은 또한
앞으로 그녀가 적절히 보살펴지는가를 살펴보겠다는 의미도 있다. 부잣집에서는 딸이 시집
갈 때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옷, 가구와 함께 하인, 그리고 시집가서 처음 몇 주
동안 먹을 음식까지 싸서 보낸다. 심지어 대만 북부 지방에서는 시집가는 딸에게 변기와 죽
을 때 입을 옷, 즉 수의까지 보내기도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보낸다."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다. 지금까지 설명한 결혼거래는 공산혁명 전 중국 농촌과 현재의 대만에서 관찰된 것
이다. 이 같은 예식의 중요한 요소는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다른 계층에서, 그리고 전역에 걸
쳐 발견된 것이다. 비교적 동질성을 보이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결혼이 춘추전국 시대
(481-221 BC) 및 그 후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예절과 예식'에 관한 책으로 전해 내려왔
다는 점이다. 홍콩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에 결혼이 가족과 개인의 배경과 함께 생년
월일을 따져 이루어졌다. 약혼선물과 징표가 오고간 후 지참금 전달 예식을 치렀다. 지참금
의 모든 항목을 대장에 적은 지참금 목록이 점검을 위해 신랑집에 전달되었다(Anon
1986:25). 부유한 집안에서는 지참금에 신부를 돌볼 하인을 포함시키기도 했는데, 이는 가문
의 지위를 자랑할 좋은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딸에 대해 얼마나 염려하고 있는가
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상류 가정에서는 딸이 한 개인으로서 정립되면 그녀는
그 가족의 대표가 될 수 있었으며 부모의 재산에서 증여를 받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지참
금은 다른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중국 남부 부르주아 계급 사이에 행해진
정착된 결혼의 한 특징이었다. 송나라 시대의 기록은 약혼과 결혼 때 계약서를 써서 양가가
서로 교환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명세서에는 신랑이 신부에게 무엇을 선물할 것인가를
적고 있는데 거기에는 논밭 등이 포함되기도 했다. 또한 신부 역시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를
적어 보내는데 여기에는 논밭, 주택, 사업체, 정원 등이 포함되기도 했다(에브레이). 결혼은
서식과 서류를 이용하는 적절한 기회로, 종이와 그 양식은 큰 도읍의 문구점에서나 구입할
수 있었다. 서류를 작성해놓으면 약혼이 깨지거나 다른 불화가 생길 때 증빙서류가 되었다
(Naquin 1988). 부유층에서 행해진 직접적인 지참금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결혼의 법률적
효력은 그 같은 증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 사회에서의 경우처럼 이는 간접적
지참금(에브레이는 이를 약혼선물이라고 불렀다)이 좌우했다. 리 치(Li Chi)에 따르면 "약혼
선물을 받지 못하면 계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인척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이다(Legge 188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 시대의 신부는 친정의 재산 유무에 따라 여러
가지를 제공받았으며 현재 인도에서도 가족의 소득과 지참금 규모에 상호 연관성이 있다고
프라사드(Prasad)는 주장했다. 남편의 지위나 신부의 매력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
다. 형제자매들이 나누어 갖는 몫이 확정되어 있는 경우 지참금은 거의 할당되지 않았다. 근
대 초기 프랑스의 한 지역에서는 지참금이 유산에 의해 정해진 몫의 일부를 구성하기도 했
다. 결혼한 여성에 대한 지원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다. 펄 리버 델타(Pearl River
Delta)의 샤오란에 재미있는 예가 있다. 그곳은 경작농지가 계속 확대되는 지역으로 토지가
때때로 지참금의 일부가 되었으며, 그 계약서가 붉은 틀에 보존되어 혼인식 날 운반되었다.
또 다른 경우는 한 여자에게 평생 동안 토지가 할당되어 남편이 이를 관리했으나, 부인이
죽자 이를 그녀의 친정에 돌려준 경우도 있다.
세 번째 예로는 딸에게 할당된 토지를 친정아버지가 관리하면서 여기서 나오는 소득을 시
집간 딸에게 제공한 경우다. 이때 딸은 이 돈을 자신의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 후자의 경우
출가 계약서에 포함되며 그 부인은 친정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도 상속의 일부로서 그 토지에
서 나오는 소득을 계속 받는다. 신부 지참금의 어느 정도가 부모로부터 직접 나오고, 시부모
로부터 어느 정도 나오는가는 계급에 따라 달랐다. 중국에서 신부에 대한 재산 할당은 사실
상 신혼부부에 대한 재산 증여였다. 왜냐하면 아들들은 분가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자신의
재산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과정이 상속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이 있다. 그것은 형제자매간에 균등한 몫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증여의 규모
는 경쟁 및 과시의 요소와 함께 얼마나 상응하는 결혼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그 결과 때로
유라시아의 다른 지역처럼 혼인할 때 과도한 선물을 하는 데 대한 사치금지법이 발동되기도
했다. 이는 오랫동안의 사회문제가 되어왔으며, 사치금지법은 북부왕조시대(AD 386-581)에
약혼선물의 규모를 규정하기도 했다. 이 같은 거래의 한 단면은 해럴(Harrell)과 딕케이
(Dickey)가 강조한 것처럼(1985) 만인이 보도록 전시한다는데 있다. 이들은 지참금을 설명하
면서 이 같은 사실을 밝혔는데, 지참금의 전시는 부분적으로는 신분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
한 것이다(어쩌면 단순히 신분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선물은 가난
한 사람들보다는 부잣집에서 보다 중요시되었다. 농부와 도시의 상인 가족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뚜렷하다. 하지만 상류층 모두가 이런 방식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다. 일부 사회에서
는 결혼을 조용히 치렀으며, 특히 소유물 이전에서 그랬다. 중국에서는 농부와 지주에게 모
두 기본적 생산기반이었던 토지에 대한 권한 이전은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조기 약혼의 형
태는 유럽의 경우와 달랐다. 유아로 또는 어린 소녀로 남편의 집에 가서 딸의 신분과 비슷
한 일종의 수양딸로서 키워진다. 그에 따라 가족관계가 통상적인 결혼과 질적으로 달라진다.
페이 샤오-퉁(Fei Hsiao-Tung)은 양자 마을의 가족생활을 소개하면서 39%가 이런 형식의
결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반적인 결혼에서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적으로 간주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 양가간에 갈등이 일어나면 그것은 항상 있는 일로 여기고 양자간
에 화합이 잘 되면 이는 특별히 칭찬할 일로 간주되었다."고 적고 있다(1939:48). 그는 더 나
아가 유아기의 소녀가 어떻게 장래의 남편 집에 들어가는가를 기술하고 있다.
소년의 부모는 아주 어린 나이의 소녀를 수양딸로 삼는다. 장래 시어머니가 될 소년의 어
머니는 그 소녀에게 젖을 먹여 키워 결혼할 나이에 이르게 한다. 이 같은 환경에서는 시어
머니와 며느리간에 친밀도가 대단히 높다. 이들은 종종 친딸처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시어머니에게 친딸이 없을 경우는 더욱 그렇다. 시어머니가 설혹 그녀를 학대했다 하더라도
그녀는 시어머니를 보호자로 존경한다.
이런 경우 결혼에서 오는 어려움은 결혼 파트너간에서 발생한다고 울프는 말하고 있다.
조기 결혼은 주로 소년 어머니의 압력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어머니가 함께 잘 지낼 수
있는 며느리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울프는 설명했다. 따라서 통상적이 아닌 결혼에서는 아버
지보다 어머니가 수양딸과 아들을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만에서는 이때 소녀
의 공급보다 수요가 많았다. 따라서 아프리카에서 때로 아직 태어나지도 않는 임신상태의
아이와 약혼이 이루어지듯이(계약된 약혼), 장래 며느리감에 대한 선취현상이 늘어났다
(Goody 1956). 울프는 대만에서의 비전통적인 결혼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전의 학자들은 이
같은 비정상적인 결혼형태를 무시하고 성년이 된 아들이 성년이 된 신부를 얻어 신랑집에서
사는 유교사상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비전통적인 결혼이 대단히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젊은이들은 누이나 오빠와 결혼하는 것 같아 이를 싫어했다(Wolf & Huang 1980). 따라
서 일제하의 젊은이들이 부모의 유대관계에 덜 의존적이면서 1930년대부터는 그 숫자가 급
격히 줄어들었다. 가족주의에 반대하는 중국 및 인도의 젊은 개혁론자들은 한결같이 조혼과
중매결혼에 반기를 들었다. 1911년 훨씬 이전에 중국의 개혁 운동은 여성의 지위를 변화시
킴으로써 가족을 근대화, 즉 서구화하려 했다. 전족 습관을 버리고 배우자간의 권리를 동등
하게 인정하며 강제결혼보다는 자유연애, 남녀간의 합의결혼을 촉구하고, 결혼연령을 늦추자
는 것이었다. 또 여성이 교육을 받고 일부일처제를 행하며, 이혼을 할 수 있고, 혼인데 돈을
지불하는 행위를 모두 폐지하자는 것이었다. 젊은 남녀들은 비전통적인 결혼을 일반적으로
싫어했는가. 그리고 이런 결혼을 했을 경우 결혼생활에 어려움이 제기되었는가. 만일 그렇다
면 어렸을 적부터 친밀하게 지내고, 또 그래서 오랫동안 지속된 관계 때문에 근친상간이라
는 관념에 영향을 받아 성적인 매력을 상실하지는 않았는가. 비전통적인 결혼을 한 일부 사
람들은 이런 결혼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또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이 같은 거부
감은 이스라엘의 집단농장 키브츠에서도 발견되어 그곳에서는 친한 친구간에 거의 결혼을
하지 않았다. 대만의 해산 지방에서는 동아리 그룹간에 종종 결혼을 했다. 그러나 울프는 이
같은 결혼은 남편과 부인 모두에게 간통, 출산, 이혼 등 어려운 문제를 야기 시킨다고 주장
했다. 중국 농부들은 점잖지 않았으며 성을 멀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간통이 종종 일어났
다. 간통이 발생했을 경우 여자는 저주를 받았으나, 남자는 남의 집 부인이나 이웃집 딸이
아닌 경우 어렵지 않게 성적 만족을 채울 수 있었다. 도시에서는 특히 매춘이 성행했으며,
부자(부는 혼외정사의 중요한 결정인자였다)는 소녀를 정부로 삼곤 했다. 어떤 여자들은 매
춘을 하다가 후에 결혼을 하기도 했으며, 오빠나 남동생이 없는 여자는 남편을 구하기 위해
또는 임신을 하기 위해 매음굴에 보내지기도 했다. 매춘으로 돈을 벌어 가족생활에 도움을
준 것은 물론이다. 일제 하에서 혼전임신이 엄청나게 늘어 데릴사위의 경우보다도 그 수치
가 높았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대만에는 중국의 다른 지방에서와 마찬가지로
결혼과 성에 상업적 요소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티베르 여자들 역시 인도의 일부 계급
여자들과 유럽의 가난한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매춘을 통해 돈을 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음굴이 그 여자를 영원히 책임지지 않는 한 여자가 매춘부로 사고 팔리는 일은 거의 없었
다. 따라서 매음은 일반 노동자처럼 노동을 하고 그 대가를 받아 집으로 송금하는 성적 서
비스 거래와 흡사했다. 그론월드(Gronewald)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매춘이 부인과 첩을 포
함한 여성의 한 거래형태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만(Mann)은 중국 왕조 말기 여성의 성을
규정한 이중구조 개념을 정립, 보다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즉 만에 따르면 결혼
과 출산은 매춘 및 성의 구매와는 대치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간통은 상업적 성보다도 더
분석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울프는 1881-1935년 사이 전통적인 결혼을 한 여자의 16.5%가
혼외정사를 했다는 수치를 제시했다. 이에 비해 같은 기간 동안 비전통적인 결혼을 한 여자
의 간통비율은 37.7%에 달했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현격한 것이기 때문에 울프는 이것이
배우자간에 경험한 만족의 차이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출산 역시 결혼의 형태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비전통적인 결혼에서 특정 연령
층의 출산율은 전통적인 결혼에 비해 26-30%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낮은 출산율
은 배우자간의 권태감 이상의 원인이 있을지 모른다. 어렸을 때 시집에 와서 양육된 며느리
는 친부모에 의해 길러진 여자보다 사망률이 높았을 것이다. 또 살아남았다 해도 건강이 안
좋다면 출산이 적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려서 남의 집에 들어갔다 해도 그 집 아들과 결
혼하지 않은 여자는 일반 여자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많이 낳음으로써 부부간 염증설을 뒷받
침해주고 있다. 중국 본토에서 이혼은 매우 드물었고 또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해산에서는 역시 잘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드물지 않은 현상이었다. 사회적으로
잘 용납되지 않았음은 이혼서류에 사인을 한 후 그 일부를 불에 태우고 남은 잉크를 버림으
로써 악귀를 쫓아버린다고 믿은 풍습으로 알 수 있다(Wolf & Huang 1980:178). 이 같은 부
정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1901-1940년 사이 첫 결혼의 약 12%가 이혼을 했다. 그러나 이
혼비율은 혼인형태에 따라 다양해서 전통적인 결혼에서는 5.9%로 가장 낮았다. 해산에서는
강한 혈통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가계와 부부간의 결혼생활과는 별 관계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가계가 중요시됐던 해산의 이웃 지방에서는 전통적인 결혼에서는 이혼이 적었고 데
릴사위 등의 결혼에서의 이혼이 많았다. 가계가 강했든 약했든, 또 가계가 존재하든 안 하든
통상적인 결혼에서는 여자가 친정에서의 권한을 많이 포기했다. 그러나 이혼할 경우 친정으
로 돌아갈 수 있으며, 그 후에는 다시 결혼을 하거나 매춘을 하거나 했다. 어쨌든 이혼은 양
가 모두에게, 또 배우자 쪽에서 특히 여자 쪽에서 볼 때 결혼생활의 갈등을 푸는 좋은 방법
이 아니었다. 여자가 고용될 가능성이 있다면 결혼은 해체되기가 쉬웠을 것이다. 광동 비단
공장에 대한 토플리(Topley)의 연구(1975)는 여자 노동자가 상당한 독립성을 가졌음을 보여
준다. 서부 아프리카에서 시장의 여자들은 결혼에 관한 한 대등한 독립성을 가졌다. 일부 전
통적인 사회에서조차도 여자들은 월경이 중단되었을 때 일정기간의 별거를 위해 정기적으로
친정에 돌아가곤 했는데, 이것이 이혼으로 잘못 보여지기도 했다(E. Goody 1973). 성숙한
여자에게 결혼을 대체하는 삶의 방법이 있었다면 그것은 친척들과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러
나 중국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 같은 가능성이 별로 없었다. 한편 대만에서 남자에
게는 대체방법이 열려 있었다. 데릴사위제가 다른 결혼방식보다 이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전통적인 경우의 이혼률이 2.3%인 데 비해 이는 16.9%를 기록했다. 배우자의 가계합
병이 이혼을 어렵게 한다는 이론에 따르면 비전통적인 결혼은 보다 안정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사실 그 이혼률은 15.5%로 엇비슷한 수준에 달했다. 이처럼 이혼률이 높은 것은 배
우자들이 서로 염증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혼은 여자가 시집에 일찍 들어가면 갈
수록 높아졌다. 여자가 시집에 일찍 들어가는 것은 시어머니가 원하는 바로, 시어머니와 며
느리간에는 친밀도가 높아져 시어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부부가 이혼할 가능성이 낮았
다. 그러나 시어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부부가 이혼할 가능성이 낮았다. 그러나 시어머니
가 사망하면 그 가능성은 높아진다. 여자가 시집에 일찍 들어가는 것은 결혼생활을 지속하
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울프와 황은 대만 특정 지역의 기록을 갖고 연구했
으나 버클레이는 대만 섬 전체에서 나온 데이터를 이용했다. 이에 대한 차이는 중요한 것으
로, 여러 가지 결혼형태의 비율은 다른 사회적 형태와 마찬가지로 근처 공동사회에서도 서
로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주자에게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경우 그들은 자신들만
의 것을 오래도록 간직한다. 그러나 그런 여지 속에서도 특정 한도 내에서 어떤 것은 부수
적인 요인으로 보다 지배적인 현상을 이루기도 한다. 대만 남서쪽 옌-랴오의 하카 마을에서
는 1866-1906 사이 비전통적인 결혼이 거의 없었다고 코헨은 보고서에서 밝혔다. 한편 충-
세의 호키엔 마을에서는 보다 많이 발견되었으나, 울프가 조사했던 섬 북부의 호키엔 마을
과는 다르게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중부에서는 남자의 첫 결혼 중 8%만이 비전통적인
결혼이고 33.3%가 데릴사위제였으며, 북부에서는 이것이 각각 40.5%와 10.9%이었다
(Pasternak 1985:314). 파스테르나크는 이 차이가 인종적 배경과는 관계가 없고 서로 다른
농업환경 탓이라고 보았는데, 그것은 양쪽 모두 호키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충-세는 척
박한 찰흙 땅으로 농사를 위해서는 더 많은 물과 노동이 필요했다. 농사는 강우량에 의존하
며 연중 한 번만 수확하기 때문에 관개수로로 물을 대는 농장보다 대규모여야 했다. 그러나
강우량은 인력으로 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 오는 시기에 맞춰 노동력을 교환하는
것이 어려웠다. 따라서 농장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생산단위 내에 충분한 남자 노동력을
확보,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결과적으로 나이가 많은 농부는 자신의 젊은 아들이 성
장하기를 기다릴 수가 없다. 만일 아들보다 나이 많은 딸이 있을 경우 상속은 물론 노동력
을 위해서도 사위를 불러들여야 했다. 부유한 집에서는 노동력을 고용할 수 있을 테지만 가
난한 집에서는 결혼을 시켜야 했다. 어쨌든 이 때문에 사위가 처가에 들어가 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식으로 경제적 생산양식과 자손 번식은,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는 사람들에게
는 그 관계가 서로 얽혀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사회적 행동과 관련 제도를 살펴보았다. 양
자와 같은 일부 제도는 중국 전역에 걸쳐 행해졌는데, 그 정도가 지역마다 상당히 달랐다.
어떤 관습은 한 지역에서는 횡행했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른 관습은
인종에 따라 차이가 났다. 일례로 전족 풍습은 하카 지방에는 없었으나 호키엔 지방에는 있
었다. 이런 관습은 다른 사회 문화적 관습과 연계되어 하카 여자는 밭갈이 등 들에 나가 일
을 했으며, 어린 나이에 차 제조공장에 고용되기도 했다. 부수적인 요인이 작용하기도 했다.
차 산업에 고용될 수 있는 기회가 늘자 호키엔 여인들도 전족 관습을 버렸다. 후에 일본 정
부 역시 이 같은 관습을 철폐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그들은 상당기간 동안 밭에 나
가 일하는 것을 피했다. 하카족 부모들은 일반적으로 딸이 비전통적인 결혼을 하거나 일할
사위를 맞아들이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섬의 남북에 살고 있는 하카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
진 비전통적인 결혼의 비율은 실제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남쪽에서는 비교적 그 수가 적
었으나, 북쪽에서는 호키엔 보다는 적지만 상당한 숫자였다. 울프는 이를 하카와 호키엔 어
머니들이 젊은 예비신부들을 데려오는 것을 선호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후에는
관습이 다양화되고 도시와 시골 간에도 차이를 보였다. 이는 대북의 가계에 대한 사의 조사
와 해산에 대한 울프의 연구를 비교해보면 잘 나타난다. 1906년 시골에서는 거대가족(grand
family)이 23.3%를 차지했으나, 도시 프롤레타리아 계층에서는 3.7%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상인과 상점 점원들 사이에는 9.3%이었으나 상류층에서는 42%에 이르렀다. 거대가족이란
여러 형제가 함께 사는 대가족과 아버지가 한 명 이상의 아들과 같이 사는 경우를 포함한
것이다.
모든 차이점이나 유사점을 같은 형식이나 논리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부는 비교
적 자유로운 변화로 보여지기도 하고 일부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찾은 결과로 나
타나기도 한다. 또 일부는 새로운 개혁이나 문화적 표류로 보여지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같은 변화를 공통적인 주제에 대한 다양한 변화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후자는 너무 모
호하고 동시에 사실과 이론을 결부시키기에 너무 한정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나는 아
프리카 로다가아의 장례식을 분석하면서 이 같은 수준의 변화를 경험적으로 처리하려 노력
했다. 새로운 낱말이나 새로운 의식이 신화나 예식에 도입될 때 일부는 분명히 의도적이다.
그러나 다른 일부 변화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 문화적 변화가 있기도 했다. 사회적 상호작용
이 가계집단 수준에서 보다 긴밀하게 생산체제와 관련되어 있을 때 그 구속력은 더 커진다.
신화나 의식을 취급할 때와 비교해 언행의 연결이 더 엄격해진다. 하지만 아무리 여타 사회
문화 제도를 억압한다고 해도 사적인 개혁이나 변화를 추구할 여지는 항상 있다. 따라서 장
기적으로 어떤 그룹이나 사회수준에서 변화는 있게 마련이다. 대만에서 발견된 여러 변화와
중국에서의 보다 광범위한 변화는 이런 자연발생적 변화의 증거이다. 제도이든 어떤 우연에
의한 것이든 이처럼 여러 계층의 변화에는 공통적인 요소, 특히 사상적 수준에서 공통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유교적 가르침으로, 이는 상류사회의 관습에 높은 가치를 부
여했다. 유교적 가르침은 이미 존재한 관습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거나 때로 권력자들
의 동의 여부는 상관없이 새로운 관습을 채택하기도 했다. 상류사회에 종속되었던 사람들은
이런 관습에 적응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사회계급 내에 유교사상에 의해 지배된 선택과 제
도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계급에 대한 평가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층집단의 관습
은 천해 보였고, 그래서 스스로 보다 나은 조건으로 변화하기 위한 동안을 제공했다. 일례로
대만에서 데릴사위제 등 비전통적인 결혼은 일제치하에서 사회적 연대감이 느슨해지고 환경
이 개선되었으며 개인이나 집단이 계급사회로 부상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웃
사회나 계급 또는 인종간 대체할 것이 존재함으로써 강압적이 아닌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
는 기반이 생겼다. 즉 특정 관습이 변화하는 외부환경 때문만이 아니라 많은 인간조직을 특
징짓고 있는 내적 모순이나 어려움 때문에 적절하지 못한다고 느꼈을 때 기능적으로 동등한
다른 대체물로 바뀌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주로 사회행동의 대체 가능한 형태에 의한 의
식적인 모델을 논하고자 한다. 인간의 의도성이 없이는 어려움에 대한 자각, 선택된 대체물
에 대한 인식, 가치판단 및 가능성에 대한 선택 등의 과정이 서로 상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가능성이 배려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 제도
내에서 이론적으로 가능한 선택적 대체물을 말한다. 즉 전반적으로 유사한 사회에서 행해진
관습은 서로 유사한 목적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 예로 중국에서 상속녀는 아버지 형제의 딸
의 아들처럼 가까운 부계친과 결혼할 수가 없다. 이는 분할되지 않은 합동가족, 거대가족 내
의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럼에도 가까운 친척간의 결혼이 가능했는데, 그것은 상속
이 다양해지면서 재산의 분산을 막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 이 같은 결혼이 근동과 인도에서
도 물론 조금씩 다른 형태로 행해졌다.
5. 티베트의 토지, 일처다부 및 독신생활
중국과 인도는 흔히 조혼과 거대가족의 모델에서 일본 및 서방과 대비된다. 한편 위의 3
개 아시아 국가에서 결혼 방식은 사실상 만인에게 공통적인 것으로 일본은 결혼연령과, 다
른 납득할 만한 방법을 통해 인구의 증가를 조절했다. 중국의 대가족과 일본의 단일 상속인
가족의 모형에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대로 평균 가족 수는 사실상 큰 차이
가 없었으며, 유교적 윤리가 중국은 물론 일본 교육의 강한 특징이 되고 있다, 또 많은 유사
한 관습이 두 나라에서 발견되었다. 일본에서 마키오카(Tanizaki 1957)와 같은 거대가족은
가족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분산된 상태였으며, 형제들간의 관계도 어떤 경우는 평등주의
가 팽배했는가 하면 다른 경우는 계급적이어서 서로 매우 달랐다. 티베트는 스케일에서 이
웃 중국이나 인도와는 크게 달랐으며, 정치적으로 예속된 중국과는 같은 관습이라도 상이한
변화와 다양성을 보였다. 이곳에서는 동일시기에 대가족과 함께 핵가족이 발견되기도 했다.
또 여자 상속인과 데릴사위, 때로 일부다처, 양자, 남자의 만혼(특히 부유한 집안에서), 그리
고 남자는 수도원에, 여자는 처녀 또는 이혼녀로서 상당히 많은 독신자가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결혼은 하지만 형제들은 재산과 함께 집안을 유지하기 위해 일
처다부의 혼인을 했는데, 이는 서유럽의 특징과 유사한 것이다. 또한 평생을 함께 기거하는
하인과 같은 부수적 형태도 발견되었다. 유럽식의 특징도 일부 발견되었다. 남편이나 부인의
친인척으로부터 떨어져 사는 니올로캘러티(neolocality, 새로운 주거지 정착)와 주로 하류층
에서의 핵가족,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 사이의 관습으로 친족들이 부근 거주지에 분산되어
사는 것 등이 그것이다. 중국과 인도 사이에 자리잡은 티베트의 문화는 양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전수 받았다. 중국으로부터는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많은 부담을 짊어졌고, 인도로부터
는 불교를 전수 받았다. 고원에는 유목민과 농부가 살고, 평지는 사원에 소속된 토지가 주류
를 이루었다. 도읍에는 상인, 무역업자, 수도승, 관리들이 거주했다. 경제적으로 농업은 아시
아의 형태의 영농과 축산의 형태를 띠고 있다. 고원지대에는 특수작물이 재배되고 특정 동
물들이 길러졌다. 경작이 널리 이용되었으며, 따라서 수자원에 대한 조절이 긴요했다
(Goldstein 1978). 농업은 집약적이었으며 기능공, 수도승, 성직단체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식량을 생산했다. 승려, 귀족계급, 평민, 멸시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부랑자 등으로 나
뉘는 계급조직은 강력했다. 동아시아와는 달리 서아시아처럼 여자는 농장이레 상당한 역할
을 했다. 따라서 남녀는 생산제도도 또한 상당히 상호 의존적이었다. 티베트의 가족과 농장
에 대한 자료는 티베트 밖, 즉 인도의 라다크, 스피티, 라울 등과 네팔에 사는 티베트인들로
부터 얻을 수 있다. 산악지대인 라다크의 자원은 좁은 계곡으로 인해 농장을 넓힐 여유가
없다. 이집트에서처럼 척박한 땅과 비옥한 땅이 확연히 구분되어 있다. 라울의 티베트 여자
는 훨씬 더 많은 농사일의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 거름을 주고 밭갈이 후 흙을 고르고 배수
가 잘 되게 이랑을 만들고 잡초를 뽑는다. 때로 남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밭에 물을 주고 수
확을 하며 타작을 하고 키질을 하고 농작물을 운반한다. 라다크에서도 유사한 분업형태가
보고되었다. 한편 스피티에서는 여자가 밭갈이를 제외하고 모든 농사일을 했다. 여자가 그렇
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남자는 장사를 하거나 소작토지의 대가로 지주에게 노동력을 제공
해야 했기 때문이다. 장사나 노동력 제공은 모두 그 사회가 갖고 있는 사회경제적 제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남편과 부인은 진정한 의미의 합동생산 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토지소유와 결혼, 그리고 가족은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토지가 가장 중요한 생산수
단인 티베트에서 토지제도는 사회구조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티베트에 대해 연구를 한 카
라스코(Carrasco 1959:35)는 라다크와 스피티에서는 가족재산이 결혼을 통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겨진다고 말했다. 이 같은 재산이전은 결혼의 성격과 함께 장자가 늦게 결혼
하는 것과 분명히 관련돼 있다. 왜냐하면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결혼하지 않았기 때
문이다.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남자 하인이 되어 때로 평생 동안 부유한 지주의 집
에 기거했다. 그들은 주인의 식탁에서 남는 것을 먹고 온갖 집안 잡일을 하며 결혼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때로 주인집의 결혼하지 않은 여자나 이웃집의 여자와 다정하게 지내기도
했다. 티베트 관습은 장자가 결혼하면 커다란 집으로 이사하며 부모는 발이 달린 조그만 집
으로 가 은퇴를 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소유토지 내에서 일종의 '니올로캘러티'를 실천하
거나 유럽 사회에서처럼 최소한 결혼 거주지를 분리한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같
은 세대가 항상 일반적인 의미의 핵가족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인은 남자형제들이 공유할
수 있으며, 형제들이 결혼하지 않는 것은 자원에 맞추어 인구를 조절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
이다. 농장을 소유한 가족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근세 초기 서유럽에서 형성
됐던 모델보다도 훨씬 급격한 것이었다. 일처다부의 관습에서는 형제들이 한 부인을 취하고
그 아들 및 딸들과 함께 산다. 만일 부모가 죽으면 그 작은 집은 다시 장자에게 돌아간다.
한편 장자는 재산을 소유하는 대신 세금을 내고 국가에 노동력 제공 등 각종 의무를 떠맡는
다. 토지 중 일부는 그 집에 의존하고 있는 친척들과 가족 중 승려가 되는 사람을 위해 따
로 떼어놓는다. 승려들은 증여 받은 재산을 갖고 수도원에 들어간다. 토지가 이런 식으로 가
족 내에서 분할되기도 하지만 가능하면 최소한만 조각 낸 채 대부분이 온전하게 다음 세대
로 이양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일처다부제와 수도원 제도는 비록 그 관계가 복잡하지만 생
산체제 및 상속과 연결되어 있다. 집안의 나머지 아들은 형제의 토지를 공유하거나 수도원
에 들어가는 것이다. 형제의 토지를 공유한다는 것은 부인도 공유한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그녀의 아이들에 대해 부모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다.
일처다부제와 분가
라다크에서는 일처다부제가 만연되었다.
장자는 가족재산을 모두 상속하며 한 아내와 결혼할 권한도 갖는다. 결혼은 그의 이름으
로 이루어지며, 그는 신부의 아버지나 신부의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에게 신부값을 지불한
다. 만일 그에게 단 두 명의 형제만 있다면 그들 형제들은 장자인 형과 함께 그 부인의 사
실상 남편이 된다. 만일 두 명 이상의 형제가 있으면 그 중 일부는 승려가 되거나 그 집을
떠나야 한다. 두 형제 이상은 장자의 부인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지방에 일처다부제가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해서 경제사정이나 개인적인 여건에
따라 달리 선택할 수는 있는 일부일처제나 일부다처제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부다처
제는 혈통을 유지하는 방법으로서 양자보다 선호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남자가 부자라면 남자는 두 번째 부인을 얻을 수 있으며, 그 여자마저도 아이를
낳지 못하면 세 번째 부인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고도 아이가 없다면 이번에는 같은 가족
남자 중 한 사람을 '추가'로 불러들여 아이를 가지며 이것마저 성공을 못 하면 그제야 양자
를 택했다. 이때 양자로 들어온 아들은 그 후 남자가 얻는 어떤 아들에 비해서 우대된다. 한
가지 관점에서 보면, 형제들이 부인을 공유하고 만일 상속자가 없거나 경제적 사정이 허락
할 때 추가적으로 부인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상황은 일처다부제의 극단적인 형태를 보여주
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예를 보면 부인을 하나만 두는 결혼이 일부다처제보다 많은 출산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물론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얻었을 때 한 여자에게서 보다 많은 자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일처다부제는 가장 경제적인
결혼형태였으며 생산수단의 소유와 가계집단의 분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이다. 펀자
브(Punjab)의 한 인도인은 라울에 관한 이야기에서 "라울 사람들은 별로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되는 이 일처다부제 관습에 대해 변명을 해보라고 하면, 그들의 재산이 쪼개기에는 너무
적으며 경험에 의하면 각각의 남편을 갖는 동서들과 가족이 함께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가
말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들은 두세 명의 형제가 한 부인을 소유할 때는 어렵지 않게 어
떤 일에 동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티베트 사람들이 일처다부제를 선호하는 데 대한 스스로
의 설명은 대단히 물리적인 측면이 있다고 골드슈타인은 말한다. "그들이 형제간 일처다부
제를 선택하는 것은 자신들의 합동가족을 위한 재산을 다음 세대에 고스란히 넘겨주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가족의 수를 제한하는 한 방법인 동시에 형제들의 부인들간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 중국이나 인도에서처럼 부인들은 형제들간 분란의 원인으로 여겨진 것이다.
물론 다른 곳에서처럼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동서간의 관계처럼 서로 비판적이다. 네
팔의 티베트 사람들이 사는 나인바(Nyinba)에서도 네팔의 다른 거주자처럼 사촌간 결혼을
허용했다. 어머니의 가까운 친척과 결혼을 하면 갈등을 보다 쉽게 피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일부다처제에서 부인들이 자매일 경우 보다 화목해질 수 있다. 여자들은 그래도 일처다부제
결혼을 유지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녀는 또 다른 부인과 살아야
하고 그녀의 자식들은 상속재산을 나누어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티베트인 스스로가 일처다
부제를 재산분활과 연관시켜 생각한다는 것은 나인바의 이야기에서 매우 분명히 나타난다.
그들은 처음 정착민들이 일부일처제식으로 결혼했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일처다부제로 결혼
(1983년 49%)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일처다부제가 가족재산의 분산과 토지의 분할을 막
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또 일처다부제가 가계의 확산과 촌락의 증대를 억제한다고 주장한다
(Levine 1988). 한편 일부일처제로 결혼한 사람은 상속재산을 나누고 독립된 가정을 꾸미기
위해 자신들의 부를 분산시킨다. 가정의 구성요소는 한정된 재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
문에 그 구조는 재산보유에 따라 다양하다. 전에 공식적으로 농도였다가 이제는 자유민이
된 가난한 사람들은 지주나 임금을 위해 노동을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작은 가정을 유지한
다. 그들은 형제들간 분가를 하지 않고 함께 살 재산이 없다. 따라서 그들은 일부일처제로
결혼, 핵가족을 이룬다(Goldstein 1988). 전에 농도였던 사람들은 결혼해서 여자 집에 살았으
며, 지금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다. 토지 등 재산을 늦게 나누는 것은 단순히 재산분할을
막아보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충분한 노동력을 확보하고 가족 확산을
막는 인구통계학적 효과도 있는 것이다. 티베트인 자신들이나 학자들은 분할을 피하고자 하
는 노력은 강한 경제적, 신분적인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티베트에서는 파
하리(Pahari)와는 달리 일처다부제가 가난한 사람보다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 더 보편화되었
다. 또 일처다부제가 형제들의 우애 측면에서도 중요한 규범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형제들
의 단합과 함께 재산유지는 여러 형제가 한 여자와 결혼을 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으로 확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상속재산의 분리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아들은 보통 부모와 함께 집에 기거하거
나 수도원에 들어갔다. 실제 스피티(Spiti)에서 정상적인 지주들에게는 일처다부제가 없었다.
어린 형제들이 모두 라마승이 되었다(나인바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독신자가 거의 없고 일처
다부제가 보편화되었다). 하지만 장자가 아들이 없어 죽으면 젊은 다른 아들이 수도원을 나
와 형수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이는 일반적인 수혼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형
제들이 그전에 이미 형수를 공동의 부인으로서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젊은 동생이
아들을 낳아도 이는 죽은 형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해
도 아들이 없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데 딸이 있을 경우 중국의 여러 지방에서 행해졌던 데
릴사위제 혼인이 이용될 수 있다. 자기 집에서 토지를 상속받지 못하는 신랑이 여자 집의
양자로 들어가 그녀의 이름을 취하며 함께 산다. 이 경우 그 여자는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
아 그 가정의 가장이 된다(Carrasco 1959). 형제간이 아닌 일처다부제에 들어간 그 남자는
상속권이 없기 때문에 그의 새집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는 상속자를 낳고 또
노동을 제공하기 위해 여자 집에 들어갔으나 재산상의 권한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마찬
가지로 여성 노동력이 부족할 수 있다. 이 같은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여자의 결혼이 늦
춰지거나 어린 아들을 나이 많은 여자에게 일찍 장가보내는 풍습이 행해졌다. 손아래 형제
들은 자신만의 부인과 결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는 대신, 어떤 상속전략을 택할 것
인가를 결정할 때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만일 한 형제가 아들이 없어 사위를 데려다
같이 사는 방법으로 딸을 결혼시키려 한다면, 수도원에 들어갔던 남동생이 이를 반대할 수
있다. 즉 남동생은 수도원을 나와 결혼, 아들을 낳겠다고 위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위가 될
사람을 양자로 데려올 때도 남동생의 허락이 필요하다. 남동생이 형과 함께 형수와 동거, 아
들을 낳으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한편 형수가 너무 늙으면 남동생은 형과 형수를 작은 집
으로 보내고 자신은 부인을 새로 택해 살 수도 있다. 손아래 동생이 수도원을 떠나기 싫다
면 그 가족의 토지 내에 사는 서자가 후계를 이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도 반드시 데릴사위
가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데릴사위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친척이나, 아들이
없는 형이 양자를 택하는 것에 반대하는 손아래 남동생이 있을 경우, 이들에게 그 보상으로
토지의 일부를 할애할 수도 있다(Carrasco 1959). 형제들이 공동책임을 지는 상황에서 이혼
은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라다크에서 손아래 형제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인가 이
혼하겠다고 고집한 장자는 부인과 손아래 형제들에게 함께 살 토지를 주어야 했다." 이혼녀
에 대한 이 같은 재산증여는 일처다부제가 없는 스피티에서도 발견된다. 여자의 동의 없이
이혼하려는 남자는 그녀에게 한두 뙈기의 밭을 떼 주어야 한다. 이혼녀에 대한 재산증여는
결혼 때 지참금 형식으로 주어졌던 그녀의 원래 재산과 관련이 있다. 티베트 중부에서 아버
지는 아들이 결혼하면 은퇴하며, 이때 가장 능력 있는 아들이 승계한다. 그러면 다른 아들들
은 그 부인과 토지를 공유하거나 승려가 된다. 만일 아들이 없을 경우 딸이 승계하며, 이 딸
에게는 젊은 남자가 남편으로서 간택된다. 레바인(Levine)에 따르면 나인바의 여자들은 인
도 북부에서 볼 수 있는 만큼의 대규모 지참금을 가져오지 않는다. 한편 레바인은 그들이
평생 사용할 토지, 하인, 가축(부자일 경우)과 다른 재산을 가져오고 그 재산은 결혼이 지속
될 것이라는 확산이 생길 때까지 별도로 보관된다고 말했다.
여자들은 지참금을 가질 권한이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결혼을 하지 않을 경우 전 생
애 동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재산을 부여받을 권리가 있다. 이 둘은 서로 보완적이어서,
만일 한 딸이 지참금을 받고 시집을 갔다가 다시 친정으로 돌아온다면 이는 묵인 아래 이루
어지는 것이다. 현재 네팔 법에는 만일 딸이 결혼을 안 하면 그녀는 상속재산에 대해 남자
형제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으로 되어 있다. 티베트에서 지참금이라는 말은 부동산 공
유자라는 의미이다. 이 부동산에는 보석, 옷, 때로는 하녀, 소 또는 그녀가 죽으면 친정에 돌
려주어야 하는 토지사용권도 포함된다(Goldstein 1978). 이런 예는 중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여자가 남자형제가 없는 여자 상속자로서, 지참금 형식으로 남편
이 죽거나 이혼을 함으로써 결혼이 해체될 때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사회를
보았다. 마지막의 경우 여자는 재산을 친정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혼인으로 이루어진
결혼기금에서 받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그녀의 지참금이 기여한 몫도 있다. 다양한 상속
제도가 있는 다른 사회의 일부 특징이 티베트에서도 발견되었다. 또 일부는 서유럽과 유사
한 것도 있다. 남자 상속자가 늦게 결혼, 남편이 되면서 동시에 가장이 되는 경우도 있다.
티베트에서는 보통 결혼하면 본가나 친정에서 떨어져 산다. 각각의 신혼 가족은 자신만의
집에서 살면서 부인에게 보다 독립을 주며,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부담도 덜어준다. 그
러나 재산이나 일부 생산적인 측면에서 보면 아직도 분할되지 않은 합동가족을 구성하고 산
다. 분할되지 않은 합동가족(undivided joint family)은 대부분 통합가계(소비단위)로 운영된
다. 언제나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식사의 경우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저
집에서 이 집으로 왔다갔다하면서 한다. 이처럼 공존하는 가계집단 형태는 복잡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일처다부제를 제외하면 결코 티베트에 국한되는 현상은 아니다. 이들은 당시
의 대만이나 현재의 인도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대가족이나 합동가족 또는 핵가족에 대한
오해는 그 가능성의 범위나 범주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즉 가족간 상호관계
의 질을 먼저 이해해야 된다. 핵가족이 한 가족의 집을 이어받은 아들 또는 딸에 의해 구성
되고, 그 부모는 '양로원'으로 옮겨가는 곳에서는 노인 세대의 은퇴가 관련되어 있다. 티베
트에서는 장자가 결혼하면 부모는 은퇴하고 일부 형제는 결혼에 공동 참여하며, 다른 형제
는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상속녀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상속녀와 결혼하는 경우는 흔치 않
았다. 왜냐하면 일부다처제, 데릴사위제, 양자제도가 종종 이용되었기 때문에 남자 후계자가
없는 아버지는 별로 많지 않았다. 사실 나인바에서는 결혼 중 7%만이 데릴사위제에 의한
것이라고 레바인(Levine) 여사는 보고했다. 이 같은 환경에서 수직적 직계상속은 가계 지속
성의 관점에서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희생하는 대가로 형제들의 단합을 유지하는
것이다. 즉 오직 한 사람의 아이들만이 가족재산을 상속하는 것이다. 한편 그들의 누이동생
들은 출가할 때 재산을 증여 받는다. 일부 남자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또 다른 남자들은 공
동의 부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 분명 인구성장을 생산자원과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는 또한 노처녀가 많이 남아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혼은 드물었기 때문에 영원히 혼자 사
는 독신 여자들이 그 사회의 보편화된 특징이 되었다. 이런 문제는 티베트 캄스(Khams) 지
방에 대한 첸(Chen)의 연구에 잘 나타나 있다. 첸의 연구는 결혼을 한 적이 없는 여자보다
는 현재 결혼상태에 있지 않은 여자들을 다룬 것으로, 그의 조사에 따르면 9개 마을 5백44
가족 중 39.5%가 결혼한 부부로 이루어진 가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가계의 가장들은
대부분 독신 여자들로, 이들의 재산은 '큰 집' 즉 분할되지 않은 합동가족 재산의 일부이며,
따라서 큰집에 의존해 살았다. 남편이 없는 여자의 비율은 이보다 훨씬 높아 사회계급의 집
단간 흥미로운 차이를 보였다. 즉 남편 없는 여자는 상류층보다 하류층에 훨씬 많았다. 이는
분명 이혼이 자유스러웠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상류층 여자가 보다 매력적이었음을 나타낸
다. 일처다부제는 북부나 동부보다는 서부에 보다 보편화된 풍습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중국
의 영향 탓으로 보여진다. 가계집단의 발전적 단계에서 여성의 지위는 티베트 서부지방을
참고하면 보다 분명해진다. 라다크(Ladakh)에서 소위 '큰 집'이라고 말하는 분할되지 않은
합동가족은 '작은 집'뿐만 아니라 작은 집보다 더 작은 집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작은 집
이란 노부모가 은퇴 후 거처하는 집을 말한다. 장남이 늙어 은퇴할 때까지 그 부모들이 살
아 있다면 그 나이 많은 장남은 부모를 그냥 작은 집에 두고 자신은 그보다 더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겨야 한다. 이를 양-충-파(Yang-Chung-Pa, 더 작은 집)라고 한다. 그러나 가작
작은 집은 대개 가장의 결혼하지 않은 누이들이나 사촌 또는 서자들이 거처한다. 왜냐하면
누이들은 그녀 자신의 땅과 집을 갖게 해주거나 남자형제들과 동등한 권리로 가족 집에서
살게 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여자들이 아버지와 남자형제들 집에서 살았는데,
그것은 결혼할 기화가 적었기 때문이다(Carrasco 1959:31). 인도 일부 지방에 존재했던 승혼
(또는 힌두교도인 여자가 자기보다 높은 카스트의 남자와 짝을 맺는 결혼)과는 달리 부유한
집의 딸들을 자체집단 또는 자신들보다 낮은 신분의 신랑에게 매력적인 신부이기 때문에 이
들 중에서 남편을 얻을 가능성이 더 많았다. 사생아가 생겼었다는 사실은 여자가 상속자를
출산할 수 있는 결혼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엄격한 의미의 독신자로 남아 있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님을 말해준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티베트에서의 독신자는 성스러운 것과 세
속적인 것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진다. 성스러운 독신자는 성직자로서 또는 승려로서 조직
적이고 은둔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모두 승려가 독신자는 아니다. 일본에서
불교승려는 결혼하며 티베트에서도 일부는 그런 형태를 취한다. 지역사회 내의 성직자는 독
신자가 아닐 가능성이 많다. 수도원 생활을 하는 독신자와 결혼한 성직자의 차이는 옛날부
터 동서 기독교회를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독신을 선서한 성직자라 할지라도 수도원이라는
규정된 환경에서 사는 승려보다 성생활을 덜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독신을 선서한
성직자들은 내연의 처와 사생아의 범람에 대한 논의의 초점이 되었다. 내연의 처와 사생아
는 결혼과 성생활 절제의 규정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이다. 히말라야산맥 불교도의 독신주의
는 남녀에게 각각 서로 다른 의미를 지녔다. 여자에게는 오직 세속적인(수도원 밖에 사는)
독신주의가 있을 뿐이다. 여자는 종교에서 공식적인 지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독신주의는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도 아니고 또 종교적인 목적도 없다. 이런 여자들은 비공
식적인 종교적 의미를 갖는 초모(chomo)라고 불린다. 하지만 이들은 실제로는 집단 내의 하
인을 뜻한다. 이들 대부분은 결혼한 남자형제나 노부모와 함께 생활한다. 그러나 일부는 그
들만이 집단을 이루어 독립적으로 살며, 특정 수도원을 위해서 수도원의 부엌일을 돕거나
승려들을 위해 식사를 마련하기도 한다. 초모생활에는 재미있는 일이나 우스운 일이 많다고
그림셔(A. Grimshaw)는 기술하고 있다(personal commun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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