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메르루주를 능가했던 69~73년 미군의 대량폭격학살… 책임자 키신저부터 국제법정에 세워야
1970~80년대 ‘문화교실’이란 게 있었다. 요즘도 그런 게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선생이 학생들을 이끌고 단체로 극장에 가는 군대식 문화행사였다. 그렇게 줄지어 가서 본 영화들이 <성웅 이순신 장군>이었고 <의적 홍길동>이었다. 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외국 순정물도 있었다.
“전두환 독재타도”를 외치는 함성과 최루탄이 하루도 멈춘 날이 없던 1984년, 전국 극장은 여고생들로 울음바다가 됐다. 여고생들은 길거리로 쏟아져나온 뒤에도 메케한 최루탄 기운 탓인지 아니면 ‘감동’이 식지 않은 탓인지 연신 눈물을 찍어댔다.
영화 <킬링필드>엔 꿍꿍이가 있다
사진/ 살아 있는 크메르루주쪽 학살범으로 엥 사리(오른쪽)를 기소하겠다면, 적어도 아메리카쪽 학살주범인 키신저(왼쪽)를 같은 법정에 세워야 한다. (GAMMA/ 정문태)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라는 영화, 그 문화교실은 시대상과 뒤섞여 감수성 예민한 여학생들을 자극했고, 그들은 중년이 된 지금도 가슴 한쪽에 <킬링필드>를 매달고 있지 않나 싶다.
<킬링필드>는 시드니 샨베르그라는 <뉴욕타임스> 기자와 그를 도운 캄보디아 현지 기자 사이에 폴 포트가 집권한 ‘1975~79년’이라는 정치공간을 집어넣고, 이별과 만남 같은 통속적인 주제로 감성을 자극해 크메르 루주에 대한 저주를 증폭시키는 동시에 아메리카 학살사를 교묘하게 은폐시킨 영화였다.
“영화가 지닌 창작성을 인정하더라도 ‘실화’로 강조한 다음에는 역사를 왜곡할 수 없다. 특히 민감한 정치적 사안은 ‘선전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크고, 그렇게 되면 영화는 이미 음모가 되고 만다.”
1975년 4월17일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에 입성할 당시 시드니와 함께 마지막까지 프랑스 대사관에 남아 캄보디아를 취재한 종군기자 나오키 마부치( 뉴스 카메라맨)의 말마따나 현장에 있던 대다수 기자들은 <킬링필드>가 인물관계에서도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모두 ‘아메리카 지상주의’를 살포한 무슨 ‘꿍꿍이’가 있는 영화라 혹평했다.
그럼에도 <킬링필드>는 전설이 됐다. 전설은 곧 역사가 되었다. 희생자들이 두 눈 빤히 뜨고 살아 있는 기껏 30년 전 캄보디아 현대사는 그렇게 아메리카가 만든 ‘킬링필드’에 묻혀 전설 따위나 기록하는 어처구니없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킬링필드’든 무엇이든 학살을 이야기할라치면 적어도 아래와 같은 세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학살자가 누구였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는가” “왜 학살을 했는가”
캄보디아에서도 아메리카에서도 또 한국에서도 ‘킬링필드’ 전설에 따르면 대답은 간단하다.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 루주.” “200만명.” “공산주의 체제 건설한답시고.”
이렇듯 아무도 의심하는 이 없이 모든 책임을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운 채 역사가 돼온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놓고 1997년부터 국제사회는 학살범을 처단하겠다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출발부터 아메리카 정부가 쥐고 흔드는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 사이에 승강이만 벌였지 정작 재판도 한번 열어보지 못한 채 5년 가까운 세월만 흘려보냈다.
“누구를 재판에 회부할 것인가” “재판정은 어디에 설치할 것인가” “비용은 누가 부담할 것인가” “캄보디아와 국제사회가 판사를 각각 몇명씩 배치할 것인가” “형벌을 사형으로 할 것인가 무기형으로 할 것인가” 이런 것들을 정하는 데만도 무려 5년이나 걸렸다. 그 과정은 그야말로 희생자들을 두번 죽이는 정치적 흥정이었고 음모였다.
69~73년 제외, 훈센과의 흥정
사진/ 아메리카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건물에 차곡차곡 쌓아둔 유골들. 이래도 아메리카는 1969~73년에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을 숨겨왔다. (정문태)
이 마가 낀 킬링필드 학살재판을 통해 취약한 정치적 합법성을 국내외로부터 인정받겠다는 캄보디아 훈센 총리의 야심과 킬링필드에 종지부를 찍어 모든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아메리카 속셈이 충돌한 한판이다 보니 처음부터 ‘순정’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었지만.
“1969~73년에 벌어진 일들도 재판에 포함시켜야 한다.” 훈센은 막힐 때마다 이 카드를 은근히 뽑아들었지만, 유엔과 아메리카 정부는 그때마다 경제지원을 들먹이며 달래기도 하고, 두들겨패기도 하며 결국 자신들 뜻대로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1975~79년의 기간만을 학살재판 대상으로 삼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 아메리카는 킬링필드 학살재판에서 사력을 다해 ‘1969~73년’을 제외시켰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1969~73년에 아메리카가 먼저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걸 편의상 제1기 킬링필드라고 하면, 1975~79년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발생한 학살은 제2기 킬링필드에 해당한다. 캄보디아 양민학살은 이렇게 10년 동안 서로 다른 두 집단이 두번에 걸쳐 자행했고, 따라서 크메르 루주 집권기만을 범죄대상으로 다루면 킬링필드 역사를 온전히 밝혀낼 수 없거니와 결국 모든 책임을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우겠다는 아메리카식 음모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
진 라코처가 쓴 <이어 제로>(Year Zero, cited Pol Pot official)가 있다. 크메르 루주가 200만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한 이 책은 아메리카에게 ‘성경’ 같은 책이었다. 그런데 이 작자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스스로 그 수를 조작한 것이라 해명하는 촌극을 벌였다. 그래도 지금까지 그 책은 크메르 루주가 200만명을 죽였다는 전설, 그 공식적인 자료로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100만명이든 200만명이든 학살 희생자 수를 따지려면 1969~73년에 아메리카가 폭격해서 죽인 60만~80만명에 이르는 양민들을 흔히 알고 있는 킬링필드 전설에서 분리시켜야만 온전한 역사가 된다.
이미 알려진 대로 마오이즘을 본떠 1975년 캄보디아 혁명에 성공한 크메르 루주는 화폐통용 금지, 무역 금지 같은 조치들을 취하며 공상적 사회주의라 부를 만한 극단성을 드러냈다. 특히 크메르 루주는 아메리카 괴뢰정부 론 놀에 봉사한 이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10만명에 이르는 지식인과 시민들을 처형했고, 1975~79년의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과로와 질병이나 기아로 죽은 이들이 70만~80만명을 웃돌았다. 이 기간에 발생한 기아와 질병 사망자는 아메리카가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의 대캄보디아 구호사업을 차단해버린 데서 비롯한 일이기도 해서 크메르 루주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리가 상당한 설득력을 얻어온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튼 결과만 놓고 보면 크메르 루주는 시민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시민들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크메르 루주 킬링필드가 존재했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가 시민을 살해했다는 사실만으로 10년 동안 자행된 킬링필드 책임을 모조리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워도 좋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얼마나 죽었는가
사진/ 캄보디아 땅은 아직도 아메리카 비밀폭격 상처를 안고 있다. 이런 대형 폭심지도 크메르루주가 만들었다고? (정문태)
학살 제2기에 해당하는 1975~79년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죽은 사람들 수는 연구자나 정치적 배경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수많은 캄보디아 연구서들을 쏟아낸 데이비드 챈들러나 마이클 비커레이 그리고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가 대체로 극단적인 추산을 피한 경우로 꼽혀왔다. 챈들러는 크메르루주가 처형한 수를 10만명으로, 비커레이는 처형한 수를 15만~30만명 정도에 기아·질병·중노동으로 죽은 이들을 약 75만명으로, 그리고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는 사형과 질병, 기아로 죽은 이들을 합해 약 100만명으로 각각 밝힌 바 있다. 이런 조사연구를 기준삼아 전문가들 사이에는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죽은 이들 수를 80만~100만명이라 여겨왔다.
여기에 학살 제1기에 해당하는 1969~73년에 아메리카가 폭격으로 죽인 양민 수를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는 약 60만명으로, 위 다른 연구자들은 40만~80만명 정도로 각각 추산했다.
이렇게 해서 제1기 아메리카 학살과 제2기 크메르 루주 학살을 모두 합해 10년 동안 약 150만~160만명에 이르는 양민들이 살해당했는데, 이게 킬링필드의 전모다.
이래도 아메리카가 주장하는 대로 1975~79년 크메르 루주 집권기만을 킬링필드로 부른다거나, 10여년 동안 진행된 킬링필드 책임을 모두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이 온당한 일일까
아메리카는 킬링필드를 모두 크메르 루주가 저지른 짓이라 잡아떼겠지만, 프놈펜에서 1번국도를 따라 약 35km 떨어진 프레크트렝 마을을 기억해보라 권하고 싶다. 1973년 B-52 전략폭격기가 무차별 포격을 가한 마을주민들은 아직도 당시 희생자 유골을 담은 보따리를 간직하고 있으니.
끝내 아메리카가 시치미를 떼겠지만 프놈펜에서 남쪽으로 베트남 국경에 이르는 어디든 좋다. 어느 마을이든 가보라 권하고 싶다. B-52에 폭격당하지 않은 마을을 발견할 수 있으면 당장 아메리카는 자유로워져도 좋다. 모든 학살책임을 크메르 루주에게 돌려도 좋다는 뜻이다.
캄보디아가 너무 멀다고 그러면 이번에는 아메리카 안에서 찾아보라고 권할 수도 있다.
“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으나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목표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캄보디아 불법폭격을 고발한 도널드 도슨(당시 공군 대위·B-52 부조종사)을 아메리카는 1973년 6월19일 폭격명령 거부죄로 법정에 세웠다.
아메리카 군사자료를 종합해보면, 1969~73년에 아메리카는 B-52 전략폭격기를 동원해 캄보디아에 무려 53만9129t에 이르는 각종 폭탄을 투하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메리카가 일본에 투하한 총량 16만t을 3배나 웃도는 엄청난 양이었고, 파괴력은 히로시마 핵폭탄 25배를 웃도는 것이었다. 그렇게 캄보디아에 퍼부은 폭탄이 불바다를 만드는 네이팜탄이었고, 고엽제로 자손 대대 치명상을 입히는 에이전트 오렌지였고, 수백개 새끼탄을 까며 시민들을 살해한 클러스터밤(CBU)이었다. 1957년 제네바협약을 송두리째 위반한 이 폭탄들은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말썽이 나자 자취를 감췄지만, 클러스터밤만은 여전히 걸프전과 코소보전, 최근 아프가니스탄전에서도 악명을 떨치며 아이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베트콩 잡겠다며 캄보디아 민간인 학살
게다가 B-52란 놈은 핵무기 수송수단으로 개발한 탓에 공군전략사령부 소속이었으나 캄보디아 폭격에 비밀스레 동원한 B-52는 아메리카 남부 베트남사령부에서 명령을 내렸고, 심지어 국방장관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 불법작전을 수행했다. 그렇게 비밀불법전을 통해 학살한 캄보디아 양민 수가 60만~80만명이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만천하에 드러난 크메르 루주쪽 학살주범 폴 포트와 달리 아메리카쪽 학살주범은 누구였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모든 관련자들이 ‘최고 명령권자’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안보고문(1974년부터는 국무장관)을 지목했다.
“베트콩들이 남베트남과 국경을 맞댄 캄보디아를 보급거점으로 삼아 준동하고 있다. 캄보디아 폭격으로 캄보디아공산당(CPK)과 북베트남 연대를 끊어야 한다.” 당시 국가안보회의(NSC)를 주도하며 닉슨을 주무른 헨리 키신저가 강조한 캄보디아 비밀폭격 논리였다.
“캄보디아에 대한 공격이 아니었다. 캄보디아에 거점을 둔 베트콩을 공격했을 뿐이다.” 이건 1973년 들어 결국 대캄보디아 비밀폭격을 눈치챈 의회가 공습을 중단하라며 난리를 치자, 키신저가 맞받아친 말이다. 키신저에 따르면 60만~80만명에 이르는 캄보디아 양민들이 베트콩이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결론이 난다.
키신저, 왜 그를 학살주범으로 기소해야 하는지는 처음부터 이렇게 분명했다.
전쟁선포도 하지 않은 중립국에 융단폭격을 가했다는 사실도, 전쟁과 무관한 중립국 정부를 쿠데타로 뒤엎은 사실도, 시민들에게 공습경고 한번 내리지 않은 사실도, 제네바협약을 어기며 불법 폭탄을 퍼부은 사실도, 4년 동안 폭격하면서 의회에 대한 보고의무를 한번도 수행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군 명령권자가 아니면서 폭격점까지 지시하며 권력을 남용한 사실도, 군 명령과 보고체계를 무시한 채 비밀전쟁을 수행한 사실도, 캄보디아 폭격에 대한 진실을 철저하게 부정한 사실도, 그렇게 해서 양민 60만~80만명을 살해한 죄목은 모두 키신저 몫이다.
살아 있는 크메르 루주쪽 학살범으로 엥 사리, 키우 삼판, 눈 치에, 타 목을 기소하겠다면 적어도 아메리카쪽 학살주범인 키신저를 같은 법정에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 ‘감동적인 눈물’의 진실
세계적 석학이니 국제전략전문가라 불리며 호사스러운 여생을 보내는 키신저를 기소하지 않고는 킬링필드도 학살재판도 모두 영원히 반쪽짜리 전설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밀불법전쟁을 주도한 키신저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아메리카식 킬링필드에 침묵해온 언론들은 키신저를 존경하는 석학이라 떠들어대며 거금을 주고 글 나부랭이나 받는 걸 명예로 여겨왔다. 옳은 일인지 어떤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아메리카식 정의만 있는 캄보디아 학살재판, 아메리카식 킬링필드를 지우려는 캄보디아 학살재판, 그래도 이 학살재판을 인정할 것인가 그래도 킬링필드 전설을 따라 감동적인 눈물을 흘릴 것인가
현대사에 최고 최대 거짓말인 아메리카식 킬링필드 전설을 끊어버리는 일이야말로, 앞으로 더 이상 세계 시민사회가 아메리카로부터 ‘개죽음’당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경고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네트워크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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