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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 제국의 전쟁이 남긴 지옥의 심장

박영복(지호) 2006. 8. 31. 10:58
킬링필드, 제국의 전쟁이 남긴 지옥의 심장
유재현의 아시아 역사 문화기행 2 / 반공주의 마술사들이 집계한 '200만 학살설'의 진실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1975년 인도차이나에서 마침내 혁명이 승리를 거두었을 때 확실히 그 승리는 인도차이나 민중만의 것은 아니었다.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이 세계혁명으로 지칭했던, 세계의 대륙을 하나로 묶었던 '1968 투쟁'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는 인도차이나에서 미제국주의의 야욕을 무산시키는 것이었다. 대륙의 주요한 도시들에서 시위대는 체게바라의 포스터를 들고 '호! 호! 호! 호치민'이란 구호를 외쳤는데, 인도차이나에서의 투쟁은 바로 그 시대 혁명의 상징이었으며 정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68 혁명'은 무위에 그치고 말았지만 지난 1973년 '인도차이나에서 미제국주의의 패퇴'라는 유일한 승리를 보듬을 수 있었다. 이 승리와 함께 68 혁명으로 상징되는 한 시대는 완전한 종막을 맞았다.

1980년 인도차이나에서 해골의 무더기와 함께 '킬링필드'가 뛰어나왔을 때 특히 좌파들에게 이 악몽은 어떤 의미에서 68 혁명의 자랑스러운 유산에 던져진 오물과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이 악몽은 이념적 형제국인 캄보디아에 대한 배트남의 침공, 중국의 베트남 국경 침공, 미국과 중국, 태국의 크메르루주 지원, 소비에트와 동구권의 베트남 지원 등 냉전과 중소분쟁이 뒤범벅된 정신분열적 상황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들은 68 혁명이 부정했던 모든 것들이 인도차이나를 둘러싸고 일순간에 불거져 나오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긍지와 자존심의 근원이 판도라의 상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 판도라의 상자에서 뛰어나온 '킬링필드'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킬링필드의 등장

1984년 캄보디아에서의 민주캄푸치아 정권 시기 학살을 다룬 롤랑조페의 영화 『킬링필드』가 상영되기 시작하자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킬링필드는 느닷없이 세상에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1977년 1월 프랑소와 뽕쇼우(Francois Ponchaud)의 『캄보디아 0년』(Cambodge annee 0, 후일 『이어 제로(Year Zero)』로 영역 출판되었다)은 민주캄푸치아의 혹정과 학살을 고발한 최초의 출판물이자 르뽀르타쥬였다.

1975년 4월 17일 프놈펜이 크메르루주에게 함락되던 날 뽕쇼우는 프놈펜에서 그 현장을 목격했고 다행스럽게도(?) 5월8일 마지막으로 프놈펜을 떠난 외국인들의 행렬에 낄 때까지 3주 동안 프놈펜에 머무를 수 있었다. 프랑스로 돌아간 뽕쇼우는 이 3주간의 체험과 연구, 그리고 캄보디아 난민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솔직히 말한다면 뽕쇼우의 이 책은 악의에 가득 찬 반공주의자의 데마고그가 아니었다. 그는 선교사로서 10년을 캄보디아에서 보냈고 크메르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으며 분명히 크메르인에 대한 애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런 뽕쇼우가 주목했던 것은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실체적 비극이었으며 그는 그 이면에 '극단적인 혁명(The revolution of Ultras)'의 광기가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뽕쇼우의 『캄보디아 0년』은 특히 서구 지식인들에게 논쟁의 단초를 제공했다. 장 라쿠트(Jean Lacouture)와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사이에 벌어졌던 1977년의 논쟁은 대표적인 것이었다. 2차 인도차이나전쟁에서 반전 입장을 견지했던 프랑스 역사학자 라쿠트는 뽕쇼우의 저서에 대한 서평으로 캄보디아에서의 혁명을 야만적인 것으로 격렬히 비난하는 「피로 물든 혁명(The Bloodiest Revolution)」을 같은 해 3월 『뉴욕 북리뷰』에 발표했고 6월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엔 라쿠트에 대한 반론격인 「촘스키의 캄보디아에 대한 소고」가 발표되어 이후 작은 논쟁으로 발전했다.

왜 캄보디아인가

그런데 왜 캄보디아였을까.
혁명 후 인도차이나 3국 중에서 캄보디아는 유독 서방의 구설수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베트남과 라오스가 상대적으로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특별한 총애(?)였다. 이상한 일은 서방에서도 베트남에 대해서는 대체로 '기묘한 침묵'이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인도차이나 3국의 공산당이 한때 인도차이나공산당이라는 하나의 당이었으며, 전쟁에서 어깨를 걸고 미국과 싸웠고 또 동시에 공산화되었다는 사실은 은연중에 무시되었다. 따라서 촘스키가 당시의 논쟁에서 캄보디아 또한(!) 미국이 벌인 패권적 전쟁의 희생양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에 주력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베트남은 외면(?) 당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베트남이 안긴 트라우마(Trauma-정신적 상흔)가 그만큼 심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보세력에게 있어서 베트남은 반전과 평화의 상징이었으며 전후에는 미제국주의를 물리친 영웅적 나라였고 민족이었다. 서로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호치민은 체게바라와 함께 당대 혁명의 상징이었다. 반면 보수세력에게 베트남은 기억조차 하기 싫은 악몽이었으므로 두 진영 모두에게 베트남은 서로 다른 이유에서 금기의 영역이었다.

한편 라오스는 전쟁 후 완전한 베트남의 속국이었다. 이미 라오스에는 5만의 베트남군이 주둔해 있었고 라오스 공산당은 베트남 공산당의 부하당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공산화 후 인도차이나에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라는 2개의 나라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국은 또 인도차이나의 공산화를 자신들이 2차 대전 후 줄곧 주장해 왔던 도미노 이론의 실체로 선전했다. 물론 어리석은 주장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이 베트남과는 전쟁을 벌였을지언정 캄보디아 및 라오스와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논리가 숨어 있었다. 말하자면 인도차이나의 공산화는 3국 중 한 나라의 공산화가 촉발시킨 것이라는 주장이었는데 도미노 이론에 따르면 캄보디아가 넘어지면서 베트남이 넘어졌고 또 라오스가 넘어진 것이었다. 첫 번째 도미노가 불과 12일 만에 다른 도미노를 쓰러뜨렸고 4개월 뒤에 마지막 도미노를 쓰러뜨린 셈이었다. 전쟁 기간에도 전쟁 후에도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군사작전과 맹폭을 인정하지 않았던 미국으로서는 도미노 이론이 자신들의 주장을 역으로 뒷받침해준다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미국의 이런 입장 또한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별개로 관측하는 경향성에 힘을 실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서구측 일부 좌파 지식인들의 아시아 공산주의에 대한 태도였다. 이들에게 아시아 공산주의는 서양의 공산주의와는 뭔가 다른,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사본(寫本)의 이데올로기였다(유럽에도 마오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 또한 이런 시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들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완벽하게 승리를 거둔 공산주의 혁명에 대해서 그 같은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베트남은 예외였다. 그 이유는 호치민 자신이 모스크바의 세례를 받았고 평생 코민테른의 완벽한 추종자였으며 스탈린주의자였고 자신의 이름에 '주의'를 붙이지 않는 대신 항상 '맑스레닌주의'를 앞장세웠기 때문이었다(이런 점에서 호치민은 분명 김일성과는 달랐다). 베트남은 진정으로 원본에 가까운 사본이었다.

반면 폴포트로 대표되는 캄보디아 공산주의자들은 모스크바보다는 베이징에 편향되어 있었으며 베트남의 지도를 따르기를 거부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사본(寫本)의 사본(寫本)이었고 그만큼 오류의 가능성이 증폭된 자들이었다. 혁명 후 캄보디아에서 기아와 학살의 소식이 들려왔을 때 서구 좌파들 중 일부가 주저 없이 '극단적으로 야만적이고 광적으로 이상주의적인 혁명'이라는 수사를 붙인 것은 그러한 정서와도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형제간의 전쟁과 킬링필드

킬링필드의 본격적인 시작은 1979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부터 예고되었다. 1978년 12월25일 저녁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이며 캄보디아와의 국경 인근인 반메뚜옷에서 한 방의 총성이 차가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 총성을 신호로 통일 베트남의 10만 대군은 국경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는 라오스 주둔군으로 라오스에서 국경을 넘었다. 1979년 1월 4일 메콩강 동안을 완전히 장악한 베트남군은 1월6일 프놈펜으로 진격해 8일에는 프놈펜을 점령했다. 이른바 '형제간의 전쟁'은 이렇듯 전광석화로 시작되어 이후 1988년 베트남군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서구의 좌파 지식인들에게 이 전쟁은 처음부터 계륵(鷄肋)과도 같았다. 그들에게 베트남에 대한 비난은 불경에 가까운 것이었고, 그렇다고 형제국을 침략한 베트남을 지지할 수도 없었다. 유일한 선택은 침묵이었고 그들은 모두 기꺼이 침묵의 카르텔에 동참했다.

공산주의 블록의 선택은 분열적이었다. 소련과 동구권은 베트남을 지지했다. 중국은 격렬하게 베트남을 비난했으며 북한은 비난의 일성은 내놓았으나 이후 침묵을 지켰다. 비동맹국가들의 경우 분열은 더욱 심했다. 1979년 쿠바의 아바나에서 열린 비동맹회의는 캄보디아 대표의 의석을 공석으로 비워두는 것으로 혼란을 미봉해야 했다. 베트남의 괴뢰정권인 캄푸치아인민공화국 대표와 태국 국경을 넘어야 했던 민주캄푸치아 대표는 모두 옵저버의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티토가 의장으로서 주재했던 마지막 비동맹회의였던 1979년의 회의에서 티토는 민주캄푸치아를 지지했고 쿠바의 카스트로는 베트남을 지원하는 연설을 행함으로써 혼란은 극에 달했다.

한편 미국이 주도했던 유엔은 민주캄푸치아의 대표권만을 인정했다. 유엔의 대부였던 미국은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략함으로써 완성된 인도차이나에 대한 베트남의 패권주의가 동남아시아의 나머지 동맹국들 특히 태국을 위협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미국은 폴포트의 민주캄푸치아를 임시정부 형태로 존속시켜 베트남과 맞설 수 있도록 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중국 역시 입장은 같았다. 프놈펜을 탈출해 베이징에 도착한 시하누크는 폴포트 정권 하에서 내내 연금되어 있던 처지였지만 반베트남 투쟁에는 이견이 없었고 론놀쿠데타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폴포트의 크메르루주와 손을 잡고 반베트남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이처럼 인도차이나에서 또 한 번의 전쟁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고 있기 전인 1977년부터 캄보디아에 대한 서구의 비상한 관심은 이미 도를 넘어설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재빠른 학자들은 캄보디아의 '뭔가 이상한 혁명'에 대해 후각을 곤두세웠고 1979년 이후에는 야수가 되어 캄보디아로 향했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략이었다. 좌파가 베트남에 대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궁색한 처지에 빠져 있는 동안 우파는 마음껏 민주캄푸치아를 난자하기 시작했고 그 키워드는 학살(Genocide)이었다. 선두에 선 인물 중 두각을 나타낸 것은 예일대학의 벤 키어넌(Ben Kiernan)이었다. 1979년 단숨에 태국으로 달려가 캄보디아 국경의 난민촌에 자리를 잡은 키어넌은 난민들을 대상으로 수많은 인터뷰 자료들을 모았고 그 자료들을 근거로 민주캄푸치아 시대(1975∼1978)에 무려 100만 명의 크메르인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논문과 기고문을 양산해내기 시작했다. 키어넌의 수치는 앞서 이루어진 핀란드의 마이클 비커리(Michael Vickery)가 밝혔던 70만 명을 뛰어넘는 수치였다. 그러나 키어넌은 100만 명에 머물지 않고 150만 명에서 다시 200만 명으로 추정치를 높이기에 이르렀다.

물론 대량학살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키어넌이 처음은 아니었다. 라쿠트도 1977년의 리뷰에서 1976년 한 해에만 폴포트정권이 2백만 명의 크메르인들을 살해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키어넌과 같이 방대한 자료와 근거를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라쿠트 이외에도 1977년 존 바론(John Barron)과 안토니 폴(Anthony Paul)이 『조용한 나라의 살인(Murder of a Gentle Land)』에서 유사한 주장을 폈지만 역시 캄보디아에서의 학살이 설득력을 얻은 것은 1979년 이후였다. 1984년 롤랑조페의 『킬링필드』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학술적 성과들이 탄탄한 기반을 구축한 다음이었으며 이는 킬링필드의 대중적 완성일 뿐이었다.

민주캄푸치아의 대량학살 주장에 대해 서구의 좌파들이 모두 침묵을 지킨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촘스키는 1979년 전후에 발표한 자신의 짧은 글에서, 같은 기간 동안 사망자 수를 50만∼100만 명으로 밝히고 있는 CIA 내부 문건을 제시하며 마이클 비커리(핀란드인으로 정부지원을 받지 않은 독립적 연구자였던)가 가장 객관적인 수치(70만)를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79년 발표한 『격동 이후: 전후 인도차이나와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부흥』에서 보다 깊이 있는 논지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연구는 대량학살설에 반론을 펼치기 보다 주로 2차 인도차이나 전쟁 기간 동안 캄보디아에서 자행되었던 미국의 죄상을 입증하는 데에 열중했다. 물론 전쟁 기간 동안 캄보디아에 자행된 미군의 비밀폭격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만성을 지적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했지만 사실 문제는 미국이 아니었다. 뽕쇼우의 『캄보디아 0년』은 물론 심지어는 영화 『킬링필드』조차도 미국이 캄보디아에서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대해 언급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 대중의 관심은 '학살'에 있었던 것이지 '미국의 전쟁범죄'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왜? 이미 전쟁은 끝났고 미국은 인도차이나에서 패퇴한 후였던 것이다. 대중은 죽은 자의 무덤에 대해서는 관대했고 이제 막 뛰어나온 킬링필드에 대해서는 경악했으며 한편으로는 열광적으로 분노했다.

세계가 킬링필드의 충격적 영상에 전율하고 있는 그 시간 폴포트와 크메르루주는 캄보디아 서북부의 정글에서 베트남 침략군을 상대로 치열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들에게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온정적인 시각을 보내지 않았다. 어떤 비난, 예컨대 소비에트연방군이 헝가리와 체코를 침공했을 때 서구의 우파와 스탈린주의자들을 제외한 좌파가 한목소리로 쏟아냈던 비난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 베트남

다시 1979년으로 돌아가 보자. 베트남에 의해 점령된 프놈펜에서는 새로운 국호와 정권이 급조되었다. 민주캄푸치아의 깃발은 지워졌고 캄푸치아인민공화국이 탄생했으며 베트남이 침공 전 급조한 캄푸치아구국전선 출신의 헹삼린이 괴뢰국의 대통령으로 내세워졌다. 캄보디아에서 무언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그런데 혁명 후 인도차이나는 서방에 대해서는 또 하나의 '죽의 장막'이었다. 1979년 이후 캄보디아에 대한 놀랍고 끔찍하며 충격적인 사실들이 서방의 매스미디어에 그처럼 생생하게 등장했던 것은 당시 냉전체제의 와중에서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태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베트남 정부였다. 결국 베트남이 서방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킬링필드를 등장시켰던 것이다.

1979년 태국 국경까지 물밀듯이 진군했던 베트남은 자신들의 침략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민주캄푸치아와 폴포트의 학정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프로파간다(선전)의 핵심은 구원자이자 해방자로서의 베트남이었다. 1979년 중반 소련과 동구권의 방송과 신문기자들이 베트남의 초청으로 하노이를 거쳐 프놈펜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소련과 동구권의 방송과 신문 지상에 캄보디아의 처참한 사진들과 기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베트남의 기대처럼 반향은 크지 않았다. 무엇보다 외교적으로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예컨대 캄푸치아인민공화국은 유엔에서는 물론 비동맹회의에서조차 여전히 인정받지 못했다. 중국의 비난은 점차 거세졌으며 중국-베트남 국경의 군사적 긴장은 급격히 고조되었고 이는 마침내 '버릇 고치기'를 명분으로 한 중국인민해방군의 침공으로 이어졌다.

베트남이 서방의 매스컴에 캄보디아의 문을 열어젖히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베트남은 1980년 서방의 기자들을 하노이로 초청해 프놈펜으로 직송했으며 파격적으로 캄보디아의 어느 지역이든 그들이 원하는 곳은 모두 가볼 수 있도록 허용했다. 물론 베트남 영토에서는 여전히 단 한 걸음도 정해진 경로를 벗어날 수 없었다. 서방의 기자들이 방문하기에 앞서 캄보디아의 모든 도시들에는 모두 킬링필드로 일컬어지는 학살현장이 선전장화 되어 있었다. 예컨대 프놈펜 외곽의 킬링필드로 일컬어지는 처웅엑도 당시에 조성된 것이었으며 프놈펜 시내의 툴슬렝 박물관도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베트남이 기대했던 것처럼 캄보디아에서의 킬링필드는 급속하게 서방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알려졌다. 세계의 여론은 베트남의 침략에 대한 온정적 태도를 강화시키기 시작했다. 곧이어 베트남은 국제무대에서 입지를 확대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국제 정치외교 무대는 베트남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엔에서 캄보디아의 대표 의석은 여전히 민주캄푸치아였다. 또한 미국과 유럽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략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의 대중적 여론은 캄보디아의 전 정권에 대해서 극도로 신랄했으며 덕분에 베트남에 대한 압력과 공세는 현저하게 수위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이 전쟁 전과 후를 통털어 추진했던 국제적 프로파간다(선전) 중 이처럼 대단한 성과를 거둔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베트남의 선전이 효과를 거둔 동력은 서방의 반공주의였다. 서방의 우파들에게 있어서 캄보디아는 공산주의의 야만성과 폭력성, 비인간성을 만천하에 입증하는 생생한 사례였다. 말하자면 『킬링필드』는 더없이 훌륭한 반공영화였고 베트남은 세계사에 족적을 남길만한 반공 선전 하나를 몸소 남긴 셈이었다.

혁명 후 캄푸치아의 대약진운동

도대체 프놈펜이 크메르루주에게 함락된 1975년 4월17일 이후 캄보디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킬링필드적 관점에서 1975년 4월에서 1979년1월까지의 44개월은 극단적인 공산주의의 광기가 지배했던 지옥이었다. 폴포트의 민주캄푸치아가 급진적인 공산주의적 정책들을 실현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폴포트의 이 같은 시도는 누구의 눈에도 옳은 것이 아니었다. 1950년대 말 중국이 겪었던 대약진운동의 끔찍한 실패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선례였다. 그런데도 민주캄푸치아는 바로 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1975년 혁명 직후 베이징을 방문한 캄푸치아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키우삼판(이후 민주캄푸치아 국가수반)에게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충고라고 할 수 있는 말 한 마디를 던졌다.

"동지들. 천천히 하시오. 단숨에 공산주의를 실현할 수는 없소. 한 번에 이루려고 하기 보다는 한 걸음씩 내딛으시오. 작은 한 걸음이 모이면 큰 걸음이 되는 것이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하시오."

그러나 베이징에서 돌아온 키우삼판은 당시 국가수반으로 추대되었던 시하누크 왕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저우언라이의 충고에 대해 화답했다.

"이제 우리는 공산주의를 실현할 백퍼센트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린 심지어 중국을 앞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폴포트의 민주캄푸치아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혁명 이후 급진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꿈꾸었다는 것이고 그 결과인 급진적 공산화 정책이 킬링필드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그 모델은 중국의 대약진운동이었다고 평가된다. 1958∼1960년, 중국 대륙을 뒤흔들었던 대약진운동은 2천만∼3천만 명의 아사자를 발생시키면서 처참한 실패로 귀결된 바 있다. 이 운동을 주도했던 마오쩌둥은 실권의 위기에 처해 문화대혁명으로 간신히 살아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1960년에 과오가 드러났던 대약진운동을 1975년의 폴포트가 모델로 삼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1965년 베이징을 방문한 캄푸치아공산당 대표단에게 중국 외상인 이진은 이렇게 말했다.
"(대약진운동 후 중국에는) 더 이상 굴뚝에서 연기를 뿜는 공장이 없다. 공장에는 기계가 없고 우리에게는 돈도 없다."
1975년 저우언라이가 키우삼판에게 던졌던 충고는 이처럼 뼈저린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5년 5월20일 캄푸치아공산당 특별중앙위원회에서 폴포트가 발표한 다음과 같은 '긴급한 8가지 현안'에서는 이미 대약진운동의 '급진성'이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1. 모든 도시에서의 인구 소개 2. 시장 폐지 3. 론놀 정권의 통화 폐지와 혁명정부 통화의 인쇄 4. 모든 승려의 승적 박탈과 농업에의 종사 5. 론놀 정권의 고위직 인물들의 처형 6. 전 지역에서의 공동취사와 협동농장의 건설 7. 베트남인의 추방 8. 병력의 국경 배치, 특히 베트남 국경으로의 배치

 

 

   

식량난과 캄푸치아공산당의 과격성

1항의 '인구 소개'와 6항의 '공동취사와 협동농장의 건설'은 협동화와 집산화를 명시한 것으로 두말할 나위 없이 대약진운동이 기치로 내걸었던 그것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바로 그 전 달인 1975년 4월 중국공산당 기관지 『홍기(紅旗)』에서는 후일 4인방의 한 사람인 장춘차오(張春)가 「부르조아지를 극복할 일반 독재에 대한 훈련」제하의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대약진운동의 과오를 반성하고 있었다.

"국유화 바람이 다시 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아직도 우리 조국은 풍부한 재화를 갖고 있지 못하다. 코뮌이 아직 국유화를 자청하지 않고, 우리 인민의 소유인 기업들이 8억 중국 인민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재화를 풍부하게 생산해낼 수 없다면 우리는 노동에 따른 분배와 화폐에 의한 교환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1975년의 폴포트와 캄푸치아공산당이 형제당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공산당의 이 같은 맹렬한 반성을 전적으로 도외시했다고는 납득하기가 어려울뿐더러 상식적이지 않다.(혹자는 캄푸치아공산당 지도부의 무지함과 야만성을 들먹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이런 결정들을 내렸던 캄푸치아공산당 지도부는 폴포트를 위시하여 키우삼판과 이엥사리 등 모두 프랑스 유학파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캄푸치아공산당의 급진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놈펜을 함락하기 이전부터 엄연한 현실이었던 대규모의 식량난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크메르루즈 게릴라들이 마오쩌둥식의 농촌 해방구에서 도시로 진공작전을 펴던 과정에서 프놈펜엔 대규모의 난민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1975년 프놈펜이 완전히 고립되자 론놀 정부군과 시민들은 마치 한때의 서베를린처럼 미군이 공수하는 물자와 식량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4월17일 크메르루주 게릴라들이 프놈펜을 함락했을 때 프놈펜은 이미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1/5인 150만 명이 밀집한 대도시가 되어 있었다. 분명한 사실은 '해방' 이후 미군으로부터 식량공급이 끊긴다면 이 인구에 대한 식량조달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오랜 전쟁과 미군의 폭격으로 캄보디아의 농업은 완전히 붕괴된 후였기 때문이다. 식량자급율은 20%에 불과했다. 외부로부터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북베트남도 중국도 당시로서는 그럴 수 있는 여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현실적으로 대규모의 식량난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래서 캄푸치아공산당은 프놈펜을 함락시키기 전부터 '긴급한 8가지 현안'을 준비해놓고 있었고, 혁명 이후엔 실제로 프놈펜 인구를 신속하게 농촌으로 소개시키기 시작했다. 도시로부터의 인구소개는 2가지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첫째는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서의 대규모 아사를 막는 것이었고 둘째는 노동력을 농촌으로 집중시켜 식량생산에 동원하는 것이었다. 또한 절대적으로 식량이 부족한 현실에서 공동취사와 협동농장은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집산화와 협동화는 공산화의 계획이라기보다는 현실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득이한 위기 조치의 성격이 강했으며 절대적으로 부족한 자원 특히 식량을 공평하게 분배하기 위한 공산화였다. 그보다 나은 대안은 적어도 폴포트와 캄푸치아공산당 지도부가 보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베트남의 잠재적 위협이었다. 이미 1960년대 초반부터 심화되기 시작한 베트남과의 갈등은 혁명 이후 군사적 위협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캄푸치아공산당이 사이공에 앞서 프놈펜을 해방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현안의 7항과 8항은 그러한 우려의 반영이었다. 혁명 후 민주캄푸치아는 경제난과 군사적 위협이라는 두 마리의 괴물과 싸워야 했다. 특히 군사적 위협은 전후 재건에 나서야 했던 민주캄푸치아로서는 두 겹의 고통이었다. 혁명 직후 민주캄푸치아는 미국의 재도발과 베트남의 위협에 대비해 태국 국경인 서부전선과 베트남 국경인 동부전선에 군사력을 집중해야 했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혁명 이후 캄푸치아공산당이 비타협적인 집산화 정책에 대해 지나친 자신감을 표출했다는 징후는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캄푸치아공산당 지도부가 보기에 중국 대약진 운동의 실패는 근본적으로 공산주의적 정책의 완결적 형태, 요컨대 사적 소유의 완전한 폐지 또는 이에 가까운 형태에 대한 대중적 저항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농업 생산성의 저하, 그리고 국유화된 기업에 대한 경영의 실패, 하방된 인텔리들의 저항 등은 공산화에 대한 일종의 대중적 사보타지의 결과이기도 했다. 달리 말하면 대중에 대한 공산당의 불철저한 지도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했고 캄푸치아공산당은 이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사실은 기대)했다.

이런 자신감은 혁명을 승리로 이끈 주체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교만함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불가피한 선택에 대한 혁명적 자기도취이기도 했다. 폴포트의 1차4개년경제계획은 고작 4년 만에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화의 단계로 접어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1980년에는 모든 인민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장밋빛 전망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전망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대규모의 기근과 아사였으며 그 벽을 넘어 단기간 내에 장밋빛 미래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폴포트 역시 그 점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2백만명 학살설’의 진실

분명히 극심한 식량난에 직면해야 했던 민주캄푸치아 시대(1975~1978)에 수많은 크메르인들은 목숨을 잃어야 했다.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이 있는데 누구도 정확한 사망자 수를 입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시하누크 시대인 1962년 이래 최근의 1996년에 이르기까지 캄보디아에서는 한번도 인구센서스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1975년에서 1978년의 기간 동안 어떤 공식적인 통계도 발표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캄보디아 학살 전문가들이 민주캄푸치아 시대 44개월 동안 2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캄보디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객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사회통계학적 표본조사의 승리였다.

예컨대 이 분야의 연구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둔 연구자들 중 하나였던 영국 런던대학의 스테판 헤더(Stephen Heder)는 1980년 태국국경의 캄보디아 난민촌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조사 중의 하나를 이끌었고 1천5백 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난민들에 대한 조사는 출생지와 거주지 등에 대한 간단한 설문과 함께 중점적으로는 사망자에 대한 증언에 치중한 것이었다. 증언은 ‘당신이 알고 있는 친척 또는 지인들 중에 몇 명이 (또 왜) 죽었습니까?’ 따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고 증언자들이 허위로 또는 자신의 처지를 과장해서 답변할 수 있다는 농후한 가능성은 배제되었다. 헤더는 이 인터뷰 조사의 결과 민주캄푸치아 44개월 동안의 사망률을 21%로 추정했다. 혁명 이전 캄보디아의 인구는 대략 7백10만 명에서 7백8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었으므로 44개월 동안 1백5십만 명에서 1백6십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셈이었다. 이 숫자는 곧 헤더가 주장한 사망자수가 되었다.

벤 키어넌의 연구결과가 1백만 명에서 2백만 명으로 그 숫자를 늘린 비밀의 해답 역시 인터뷰에 따른 통계의 마술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여러 차례 태국 국경의 난민캠프와 심지어는 프랑스와 미국의 캄보디아 난민들을 대상으로 조사 작업을 벌였고 그들의 증언에 따라 사망자수는 상승곡선을 그렸다. 적어도 1996년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은 자들의 입을 빈 이 숫자들은 가장 과학적(?)인 조사결과였으며 해골의 흔적에서 원래의 얼굴을 복원해 낸 인문적 법의학자들의 놀라운 쾌거이기도 했다.

   
1996년 3월, 1962년 이래 34년 만에 캄보디아에서는 인구센서스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캄보디아의 인구는 1천7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1998년 다시 또 한 번의 인구센서스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는 1천1백42만 명이었다. 비로소 우리는 살아남은 자들의 가장 신빙성 있는 증언을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헤더와 키어넌 등의 연구조사결과를 바탕으로 간단한 숫자놀음을 해보기로 하자. 학살의 광풍이 훑고 지나간 1979년의 캄보디아 인구를 5백60만 명으로 추산한다면 1998년에 이르러 인구증가율은 100%를 웃도는 것이 된다. 6백1십만 명으로 추산했을 때에는 87.2%의 증가율이다.

20년 만에 100%이거나 혹은 87.2%이거나. 어느 쪽이든 일종의 난센스임에는 틀림없다. 이 난센스를 조롱하기 위해서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남한의 예를 들 수 있다. 한국전쟁 후 남한이 베이비붐 시대에 접어들었던 1955년에서 1974년까지의 인구는 2천1백50만 명에서 3천4백69만 명으로 61.3%의 인구증가율을 보였다. 이 수치는 인구증가에 있어서 한민족의 역사상 유례가 없던 가장 급격한 인구증가였다.

1979년에서 2000년까지의 남한의 인구증가율은 25.2%에 머물렀다. 하물며 1979년에서 1991년 평화협정까지의 캄보디아는 여전히 전쟁 상태에 있었고 인구는 비상하게 늘기보다는 오히려 정체되거나 줄 수도 있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87.2~100%의 인구증가를 보였다는 것은 인간을 가공할 번식력의 쥐이거나 바퀴벌레로 보지 않으면 불가능한 수치였다. 서구의 캄보디아 학살 전문가들은 이 불가능한 수치를 가능한 수치로 만든 마술사들이었다.

학살의 진실

캄보디아 연구자들의 헌신적인 조사 작업과 분석은 학살이 대부분 정치적으로 자행된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데에 바쳐졌다. 물론 그들이 보기에도 죽음의 대부분은 식량난에 따른 굶주림에 의한 것이었다. 누가 그 죽음에 대해서 책임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들은 예외 없이 민주캄푸치아를 통치했던 잔인하고 야만적인 극단적 공산주의자들을 희생양으로 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조사와 연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전제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미신과 주술'은 이들의 다양하고 방대한 연구의 기저를 관통하는 맹목적인 사상적 편향의 실체로 그 정체는 반공주의였다.

이 점에 관한 한 방대하고 혼란스러운 인터뷰 사례와 마술적인 숫자들이 난무하는 딱딱하고 비대중적인 학술 서적보다는 롤렝 조페의 영화 『킬링필드』를 보는 편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효율적이다. 간단하고 명쾌하며 직설적이어서 이해하기 쉬운 『킬링필드』는 결국 이 저작들이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수정 없이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어야 하는 수고를 덜어준다.

『반지의 제왕』을 책으로 접하지 못한 독자들이 영화로 그것을 대신 한다고 해서 이 위대한 판타지 소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 게다가 대중은 펜보다 강한 이 탁월한 장편의 영상 데마고그로 소련과 중국, 아프리카와 남미, 아시아에서 끊임없이 계속되어온 공산주의 혁명의 실체에 대해 다시 한 번 깨닫고 다시 한 번 환멸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막이 내리고 관람객들 중 누구도 '왜 협동농장이 그 때 그 곳에 세워졌는지', '왜 동남아시아의 이름도 낯선 나라의 사람들은 그토록 굶주려야 했는지', '왜 영화의 초반에 사람들은 프랑스 대사관으로 몰려들었는지', '어떻게 저토록 야수와 같은 정권이 세워졌는지'…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미 그들의 뇌리에 박힌 것은 하나의 이미지이자 상징일 뿐이다. 또 하나의 동물농장에 대한.
그러나 그것이 『킬링필드』의 위업이었다고 해도 이 영화가 1980년대 초반 대규모로 이루어졌던 학술적 성과에 의해 뒷받침 되지 않았다면 그토록 대단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을 것임을 간과할 수는 없다.

캄보디아가 감내해야 했던 처참한 비극은 캄보디아 인민, 캄푸치아 공산당 그 어느 편도 아닌 미제국주의에 의해 배태된 것이었다. 1970년 이전까지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에서 부유한 편에 속하는 쌀 수출국의 하나였다. 동남 아시아의 인구가 평균 1일 400그램의 쌀을 소비할 때에 캄보디아는 600그램의 쌀을 소비할 수 있었다. 1970년 CIA의 공작에 의한 론놀의 쿠데타와 미국의 야만적인 맹폭은 혁명 후 캄보디아가 감당해야 했던 참극의 근원이었다. 특히 1969년에서 1973년까지의 미군의 대대적인 캄보디아 영토에 대한 폭격은 사망자 수만 최소 15만 명에서 80만 명까지로 추산될 만큼 대규모의 인명살상을 야기했고 이는 농업노동력의 급격한 소실로 귀결되었다. 이 기간 동안의 사망자 수는 킬링필드에 대한 다양한 연구에서 부주의하게 취급되거나 때로는 무시되기도 했다.

미 제국주의가 배태한 캄보디아의 비극

한편 폭격에 따른 농토의 황폐화는 동부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어 1973년 이후 급전직하한 식량자급율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인도차이나 전역을 대상으로 한 미군의 폭격에서 캄보디아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였다. 라오스의 호치민 트레일을 겨냥한 북동부의 폭격은 고원지대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가공할 폭격의 정도에 비해 인명과 농토의 피해는 적었다. 또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역시 맹렬했지만 (상대적으로 폭격의 피해가 적을 수밖에 없었던) 비옥한 농업지대인 남베트남이 남겨져 있었다. 캄보디아는 미국의 제국주의전쟁이 남긴 지옥의 중심이었다.
마지막으로 1979년 이후 지속적으로 고조되었던 캄보디아 학살에 대한 연구성과들의 이면을 살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캄보디아에서의 ‘학살’은 1980년대 내내 꾸준히 과대하게 평가되는 경향성을 뚜렷하게 띠고 있었다.

아마도 사소하게는 대학에 자리 잡은 대개의 정치, 사회적 연구그룹들이 암묵적으로 기대하는 ‘충격효과’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늘 센세이션한 소재를 찾아다니며 연구 역시 충격을 재생산하고 확대시키는 경향성을 보이게 마련이다. 그 동력의 하나는 연구에 대한 현실적 지원(연구비)의 확대로 연구비를 지원하는 대학, 연구소, 재단 등 역시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예일대학의 벤 키어넌은 이 점에서 확실히 성공했다. 그는 여전히 ‘학살’에 관한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고 있는 연구자 중의 하나로 ‘예일 국제 및 지역연구센터’의 ‘학살 연구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다. 한때 그는 캄보디아의 학살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조사활동을 왕성하게 벌렸으며 그때마다 대단한 지원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캄보디아에서의 학살’이라는 주제에 매달린 대부분의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던 이념적 편향성 즉, 반공주의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서구 학자들의 연구는 언제나 공산주의에 대한 일방적이고 부당한 선입견과 예단에 의해 좌우되는 성향을 띠어왔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언제나 부도덕적이며 야만적이고 야수적인 동시에 침략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이런 태도를 고수하는 한 캄보디아의 민주캄푸치아 통치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미국의 침략적이고 폭력적인 태도와 정책, 전쟁의 수행이 초래한 결과는 실제보다 언제나 축소되기 마련이다.

설령 언급되는 경우에도 전개되는 논리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치부된다. 이들의 주장은 언제나 광범위하고 폭넓은 사회학적, 정치학적, 외교학적 증거와 수치들에 의해 뒷받침되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한 가지 목적, 즉 공산주의에 대한 비난과 힐난 그리고 비타협적 공격을 위해 봉사해 왔다. 1980년대 캄보디아는 흔치 않은 희귀한 사례로서 반공주의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선전하는 요새로 활용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종류의 공격은 현실적으로 실패한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 더욱 거세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베트남이나 중국보다는 캄보디아에 치중되며 다시 그 논거를 통해 공산주의 일반을 공격하는 과정을 밟았다.

그 모든, 밝고 어두운 우리의 유산들

상처투성이의 킬링필드는 이제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1989년 베트남군의 철수와 1991년의 파리 평화협정, 총선, 쿠데타로 이어지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 크메르루주는 소멸했고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 3국 중 가장 처음으로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제는 아무도 킬링필드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2백만의 학살, 크메르루주의 학정, 공산주의의 만행이라는 단어와 이미지만이 몽환처럼 음습한 그늘 아래를 떠돌아다니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 글을 1968년으로부터 시작했다. 1968년은 어느 해가 아니라 한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1964년 마틴루터킹이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다.(I have a dream this afternoon)’라고 말했을 때 의심할 바 없이 그 시대의 오후에는 꿈이 있었고 1968년 혁명은 그 꿈의 육화(肉化)였다. 킬링필드는 그 시대가 오후를 지나 자정의 어둠 속에 묻혔을 때 세상에 뛰어나왔지만 심지어는 그조차도 그 시대 오후의 유산이었다. 아마도 누군가 다시 꿈을 꾼다면, 그리고 '지금 나에게 꿈이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지난 꿈들의 그 모든 밝고 어두운 유산들을 다시금 꿰뚫어보아야 할 것이다. 자정의 어둠이 걷히면 다시 태양은 뜨고 우린 또 한 시대의 아침을 맞이할 것이며 그 새로운 시대의 오후 누군가 다시 ’나에게는 지금 꿈이 있다.‘고 말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