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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문화의 복합성

박영복(지호) 2006. 8. 31. 10:52

베트남문화의 복합성

베트남의 국명은 월남이란 한자어의 베트남어 발음으로, 월남이란 1802년 베트남 최후의 전통왕조인 阮朝(1802~1945)가 세워지면서 당시 청나라의 승인하에 제정된 국호로부터 유래한다. 한때 월남의 별칭이었던 안남이란 말은 당이 월남에 설치한 안남도호부에서 연유한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우리와 많이 유사하여 일본과 더불어 중국문화권 내지는 한자문화권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근대에 들어와서는 우리가 일본의 식민침략을 받았듯이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는 두 나라 모두 남북이 나뉘어져 수 십년간 대치상태에 있다가 1975년 통일된다. 이러한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때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매우 유사한 역사적 전개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은 베트남 역사의 일면에 불과하다. 시각을 달리하면 베트남은 우리와 전혀 다른 역사적 성격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중국세계의 일부로서만 이야기되는데 비해, 베트남은 북으로 중국과의 관계에서 보면 중국적 세계의 일부였지만, 남으로 눈을 돌리면 거기에는 문화를 달리하는 참파(Champa, 占婆, 현 베트남의 중부해안을 따라 말라요-폴리네시안 계통의 인종들이 세운 소국들의 포괄적 명칭)와 크메르족의 캄보디아 등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접촉 내지는 그들 영토의 점령을 통해 인도와 인도네시아 문화를, 그리고 근대에는 유럽 문화를 받아들여 복합적. 중층적 성격의 문화의 성격을 더하고 있다.


베트남역사의 특징

월남인들은 지금도 음력 2월 6일을 민족적 기념일로 기리고 있다. 이 날은 서기 40년에 徵側과 徵貳의 자매(흔히 춘니 자매라고 한다)가 일으킨 중국의 한 왕조에 대한 대규모 반란이 3년 만에 실패해 그들이 자살하였다는 날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앞으로 전개될 월남사의 험난한 대외항쟁의 노정의 시작을 본다.

월남사에 있어 대외투쟁의 방향을 보면, 첫째가 중국과의 끈질긴 투쟁, 둘째가 참파. 캄보디아. 라오스. 시암 등 남방에서의 쟁패전, 그리고 세째가 프랑스에 대한 가열한 투쟁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어느 것이든 단속적이 아닌 끈질긴 것이라는 점이 또한 특색이다. 그들의 역사는 이 세 방향의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월남인은 국가의 초기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아왔고 독립을 위한 싸움을 끈질기게 전개했을 뿐 아니라, 독립이 되어 독자왕조를 세워 중국과의 봉공관계가 유지되는 동안 어느 한 왕조도 중국의 침략을 받지 않은 왕조가 없었다. 800년 동안 중국은 일곱번에 걸쳐서 월남을 침입하였는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중국의 침략이 빈번하였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침략도 모두가 실패로 돌아가버렸다는 데 있다. 아마도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기이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청의 쇠퇴후 프랑스의 침입을 받지만 끈질긴 저항으로 프랑스로 하여금 월남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프랑스의 바통을 이은 미국도 월남인의 끈질기고 거센 저항으로 미국 역사상 최초의 전쟁 패배라는 수모와 자존심의 상처를 안겨준다.


중국지배기


동남아시아에서 중국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는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1000년 이상이나 중국문화의 유입을 받아들여왔다. 월남의 신화 중에는 월남인의 조상이 중국의 炎帝 신농씨의 三世孫에 연원한다는 것이 있다. 비록 중국문화의 강한 영향을 입고 있지만 그와 동격이라는 자긍의 표현인 것이다.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정치적 지배는 대략 기원전 219년의 진나라 시황제의 남쪽 정벌에서 비롯된다. 이 남중국의 땅에 중국은 남해(지금의 광둥). 계림(지금의 광시), 그리고 베트남 북부에 이르러 象郡 등을 두었다. 진나라가 망한 후 지금의 광둥을 도읍지로 하여 남월이라는 나라가 생겨 세력을 떨쳤으나 한나라 무제가 기원전 111년에 남월을 멸망시키고 이 땅에 九郡을 두어 교주자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한 나라는 많은 중국인 죄수들을 이 지방에 보냈으므로 그 언어며 습관이 날로 그들 사이에 스며들게 되었다. 그런데다 관리를 보내어 적극적으로 교화정책을 폈기 때문에 화전농업에 중국식의 농경법이 혼합되고 혼인의 습관 등도 중국식으로 바꾸어졌다. 

하지만 외국의 지배가 베트남인의 뜻에 맞지 않아 압정이 계속될 때는 자주 반란이 일어났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오늘날 베트남 국민으로부터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추앙되고 있는 춘착. 춘니자매의 반란이다. 춘자매는 교지군 출신인데, 춘착의 남편이 불법으로 중국관헌에 잡힌 것에 분개하여 함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40)

그들의 군세는 급증하여 춘착은 한때 왕을 지칭하기까지 했는데, 한나라는 마원장군으로 하여금 3만의 병사를 이끌고 이 난을 진압하게 했다. 그후에도 베트남에는 평화와 반란이 계속 반복되었다.

한편 저항운동과는 다른 일면에서 중국관리들과 접촉하는 소수의 베트남인 사이에 중국문화가 서서히 전파되었다. 기원 후 2백년 경에는 월남인 李進이 그곳 지방장관이 되어 월남인과 한 중앙정부의 박사와의 토론을 요청할 정도였다. 당대에는 한국의 신라, 일본의 헤이안기처럼 적지 않은 당과거 출신을 배출하였다.


독립왕조기

오랜 중국의 직접 통치를 받았고, 또 고도의 중국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중국에 동화되지 않는 월남인의 생명력은 마침내 서기 939년에 吳權(고구엔)에 의한 월남 최초의 독립왕조(吳朝:938~968)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이는 중국에서 당이 망하고 五代의 혼란이 게속되던 시기에 해당한바 그뒤 丁朝(968~980). (前)黎朝(980~1010)를 거쳐 李朝(1010~1225)에 이르러 비로소 장기적인 안정 왕조가 세워졌는데, 과거제, 구품관인제 등 중국적 통치체제를 받아들인 이조는 그때까지의 월남인의 활동범위인 북부월남을 처음으로 넘어서서 남쪽의 참족의 국가 참파(占城의 후신)을 공략하여 지금의 廣平(강빙). 廣治(강찌)省 지방을 영유하기에 이르렀다. 

참파는 인종면이나 문화면에서 인도화된 나라로서 중국적 문화에 바탕을 둔 북방의 국가와 달랐다.
한편 참파의 서남방에 위치한 오늘날의 캄보디아, 眞臘(진랍)과의 투쟁도 이 왕조때 전개되었는데 이는 동경(통킹)평야에 근거를 둔 월남인의 남진정책의 표현이었다. 이 당시의 캄보디아는 그 화려한 앙코르와트의 창건자로 이름난 수우랴바르만 2세 치하였는데 월남은 李朝의 신종 때 10년 동안에 세 번이나 캄보디아를 침입하였다. 캄보디아는 때로 월남을 공격할 뿐 아니라 남방 참파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는 사이이기도 하였다.

이조 다음의 陳(찬)왕조가 1225년 성립하면서 북방 몽고의 압력을 받아 여러 번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과감하게 물리쳤을 뿐 아니라, 서쪽의 라오스, 남쪽의 참파를 쳐서 이들에게 조공을 받기도 했다. 월남은 당시 세계 어느 곳에서도 패배를 로르던 원의 침입을 세 차례나 승리를 거둔 것(1257, 1284, 1287)은 월남인들은 지금도 크게 자랑하는데 족히 그럴 만한 저항이요 통쾌한 승리였다. 월남과 참파를 나누는 海雲關은 이 무렵에 월남령으로 귀속되어 앞으로의 월남세력의 남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었다. 물론 월남의 남진이 항상 용이했던 것은 아니고, 陳朝 후기에 가면 참파의 북진에 적지 않은 곤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陳朝에 이어 短命의 胡朝, 그리고 연이은 명대 중국의 직접 통치를 겪은 뒤, 1427년 後黎(레)朝가 성립하거니와, 참파가 다시는 월남에 대항할 힘을 못갖게 되는 것은 後黎朝의 성종(탕통) 때였다. 월남에 반기를 든 참파의 제15왕조 2대째 왕인 반 라 자드안의 10여만 군이 성종에 의해 격파되고, 수도 비자야(오늘날의 平定)는 함락되고 왕도 포로가 되었다.

이어 월남은 참파라는 장애를 넘어서 그 남쪽의 캄보디아 서남령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중부월남에 이웃한 라오스에 대해서도 정복의 손을 뻗어 버마 국경지대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렇듯 참파의 사실상 영유와 라오스에의 지배권 확립이 이루어진 黎朝의 성종 대는 우리 나라의 조선 세조. 성종대에 해당된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의 월남 남부는 이 무렵에도 완전히 월남화되어 있지 못한 정복지였던 것이다.

16세기 초엽에 권신 莫씨의 찬탈을 계기로 혼란이 일어나 남북 항쟁의 대립형세가 전개되어, 阮氏가 順化를 배경으로 남방정권을 이룩하여 남쪽으로 진출함으로써 대북방 정권(鄭氏)에 대항할 힘을 기르려 하면서부터 남진의 성과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오늘날의 사이공이 위치하게 된 메콩델타 유역에 월남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캄보디아는 월남을 종주국으로 삼아 조공을 바치게 된다. 이너 1739년과 1755년에 차례로 완씨는 캄보디아와 교전하여 캄보디아의 해변 영토를 완씨령으로 편입하였다. 따라서 오늘날의 월남이 불과 200여년 전에야 형성단계에 들어간 것과, 남부 월남이 마지막을 월남에 귀속된 지역이라는 사실은 월남의 남북문제를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전통의 관련 하에서 살필 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西山의 완씨 삼형제의 반란이 남방의 완씨 영내에서 일어나 이른바 新阮(西山당)과 舊阮간의 싸움이 벌어지자 구완은 조상 전래의 근거지인 순화에서 밀려나와 嘉定(갸딩, 오늘날의 사이공 근처)으로 쫓겨나면서 서남 해안지대는 결정적으로 월남화되기에 이르렀다. 정치적 쟁란 때문에 문화적 중심이 변경지로 이동함으로써 그 곳의 문화수준을 높여 전국적인 문화수준으로 향상시킨 예는 중국사의 경우 동진이나 남송의 남천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으며, 현재의 대만도 그 현저한 예라 할 것이다. 

그뒤 嘉定은 구완세력을 축출한 서산 삼형제 중 東定王 阮文呂(구엔 반 류)의 통치 중심지가 됨으로써 남부월남의 월남화를 더욱 촉진하게 되었다. 비록 서산당의 지배는 짧았지만, 월남의 북부. 중부. 남부를 포함한 오늘날의 월남 전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한 것은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

서산당을 격파하여 새 왕조를 세운 舊阮一族 출신의 阮朝는 서산당에 의한 통일을 바탕으로 월남전역을 단일체제로 통치한 최초의 왕조가 되었다. 이때가 1802년이니 지금으로부터 200년이 채 못된 아주 가까운 때의 일이었다.


프랑스의 침략과 베트남인의 독립운동

월남의 남부는 월남사의 남진방향의 종점으로, 월남전통에 가장 늦게 젖음으로써 남부는 북부나 중부에 비해 월남적 전통이 약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남부가 월남전토중 가장 일찌기 식민지화 되었다는 사실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월남 남부를 침략의 첫 희생물로 삼았던 프랑스인의 대월남 진출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전국적 통일의 바탕 위에 선 최초의 왕조인 완조의 창건과 때를 같이하였다. 완조를 창건한 阮福映(구엔 푹 앙) 즉 후일의 嘉隆(갸롱)帝가 서산당에 쫓기어 사이암灣의 섬들을 전전하였을 때 프랑스 신부 피뇨가 완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었던 것이다. 피뇨가 얻어온 의용병과 무기. 탄약은 阮福映의 대서산당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프랑스는 구완에 대한 군사원조의 대가로 베트남 남부지방에 대한 할양을 요구하여 점령하고 이를 '코친차이나'라 하여 직할 식민지화하였다.(1862) 그리고 뒤이어 1873~1885년 사이에는 베트남의 중부와 북부를 점령하여 이를 각각 '안남'(1884)과 '통킹'(1884)으로 명명하고 남부와는 달리 명목상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완조의 군주는 폐위되지 않고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프랑스 지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독립운동은 전통주의, 민족주의, 공산주의의 세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전통주의란 1900년 이전 까지의 전통적 문신계층을 중심으로 완조에 대한 충성심에서 전개된 운동이다. 이 저항운동은 이른바 勤王運動으로 대표된다.

1900년 경부터는 중국어 번역서들을 통해 들어오는 서구의 근대적 사상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운동이 潘佩珠(판 보이 쩌우)와 潘周楨(판 쭈 진)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儒者 출신 潘佩珠는 중국의 변법운동이나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은 자강조국을 만들고자 활동하였다. 그는 1906년 월남 유신회를 조직하여 초기의 손문과 비슷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우선 일본에 접근하여 일본으로부터 무기를 원조받아 봉기하려 하였다. 

그가 단신 일본으로 가서 의지한 사람은 중국의 변법파 망명객 양계초였다. 그의 도움으로 일본의 朝野와 접촉하고 이후 일본을 월남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고자 하였다. 그가 아무 소개도 없이 양계초를 찾아가 독립운동의 뜻을 밝히고자 필사하여 양에게 준 것이 뒤에 양의 알선으로 1905년에 출판된 <월남망국사>인데 이는 당시 우리나라의 뜻있는 사람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는 경고의 글로서 유명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프랑스가 해외에 정세를 살피거나 신학문을 배우는 것을 꺼려 월남인의 해외유학을 금지하였는데, 이에 대항하여 일본으로의 유학을 권장하는 東遊運東을 전개하였다. 한편 潘周楨은 근대적 사설학교인 東京(통킹)義塾에 적극적이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난 뒤에는 그에 자극받아 군주제 아닌 공화제 독립을 꾀하여 1912년 월남광복회를 조직하고 중국국민당과 손잡고 광동성 일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종사한다.

월남 광복회보다 더 근대적인 독립운동 조직으로서는 阮大學(구엔 다이 혹)의 월남국민당과 월남공산당이 있다. 중국 국민당을 본따 河內(하노이)에서 결성된 월남국민당은 1930년 초 조급하게 봉기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다음에는 항불운동의 주도권이 베트남 공산당으로 넘어갔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이 시기의 무장봉기에 부정적이었다.


인도차이나공산당(베트남노동당)의 지도

베트남의 현대사의 전환점에는 4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1930년 2월의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결성과 그 활동이고, 둘째는 1945년의 8월혁명의 성공과 노농국가의 수립, 셋째는 1954년의 7월의 반불항거의 승리로 국토의 절반을 해방시켜 사회주의로의 진전을 이룩한 것이며, 넷째는 1975년의 춘계 대공세와 봉기의 성공으로 반미 구국항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전국토의 해방 및 사회주의 개조와 건설로 전진하게 된 것이다.

월남공산당은 阮愛國(구엔 아이 곡, 후일의 호지명)에 의해 지도되었는데. 일찌기 파리에서 프랑스 공산당 창립에 참여하였던 그는, 1925년 광동에서 「월남청년동지회」를 결성하였고 그뒤 1930년에 월남공산당(뒤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이라 함)으로 결집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중 일본이 불령인도지나에 진주하자, 본국없는 식민정부(프랑스 본국은 독일에 항복하였다.)는 일본에 충실히 협력함으로써 식민통치를 유지하였고, 일본도 프랑스의 식민통치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일은 삼가하였다.

2차대전의 종결이 가까와서야(1945.3) 일본은 그때까지도 명목적으로 존속하고 있던 保大(바오 다이)황제로 하여금 안남(중부)과 동경(북부)의 독립을 선언케 했지만, 이 역시 일본인 고문이 통치하는 또 하나의 식민정부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권위가 시드는 전환기를 이용하여 월남독립군은 불군을 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불군에 속한 월남인병사를 탈영케하여 조직을 확대하면서 일본의 패전을 맞았다. 이것이 2차대전 후 동경지방에서의 월남인정권의 기초가 되었다.

호지명이 이끄는 좌익세력은 지하활동을 하다가 중국에서의 항일 국공합작에 힘입어 중국을 근거지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중심의 하나는 1941년에 결성된 월남독립동맹의 성립이었다. 그러므로 월남에서는 바오다이를 중심으로하는 표면기구와 월남독립동맹으로 대표되는 지하세력이 공존하다가 2차대전의 종결을 맞아 새로운 사태로 전개되었다.


胡志明(호치민)과 베트남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자 호치민은 일제봉기를 명령하고 8월 19일 하노이를 손에 넣는다. 9월 2일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한 그는 정부주석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영국. 중국과 거래 끝에 다시 베트남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해방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한 새로운 투쟁이 호치민의 어깨에 지워졌다. 그러나 이번에 선택한 무기는 총이 아니라 협상이었다.

1946년 3월 그는 타협적 온건주의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베트남을 완전 독립이 아닌 프랑스연합. 인도차이나연합의 일부로 남아 있도록 프랑스와 타협했다. 그러나 그는 인민들 앞에 나가 "싸움보다도 교섭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5년만 지나면 교섭에 의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데, 지금 어떻게 5만이나 10만 명의 사람 목숨을 희생시킬 수 있단 말인가?"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호치민은 결코 무분별한 전쟁지상주의자는 아니었다. 무력투쟁과 외교교섭을 적절히 섞어 장기적인 이익을 취하는 것이 그의 일관된 전략이었고 타는듯한 눈매와 꿰뚫는 듯한 목소리, 신념에 찬 몸짓과 명확한 전망, 그리고 불가사의한 친근함은 대중을 자신의 편으로 삼는 가장 뛰어난 무기였다.

그러나 파리와 하노이의 불안한 동거는 이내 깨졌다. 1946년 11월 프랑스군은 하이퐁의 베트남인 주거지역을 포격해 6천명을 살해했고, 호치민은 대불항전을 지령한다. 30년이 지나서야 끝을 맺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던 베트남전쟁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프랑스와의 전쟁의 고비는 1954년의 디벤비엔푸 전투였다. 호치민의 가장 충실한 동지이자 또 하나의 영웅인 보 위엔 지압이 이끄는 부대는 디엔비엔푸 프랑스군 요새 주변의 지하로 400km에이르는 참호와 갱도를 뚫어 요새를 함락시켰다.

그결과 북위 17도선을 잠정경계선으로 해 베트남을 남. 북으로 분할하는 제네바협정이 체결되었다. 프랑스군은 물러갔지만 '세계질서의 수호자' 미국이 그 자리를 메웠다. 1945년부터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한 미국은 1955년 고 딘 디엠이 월남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본격적으로 그를 지원했다.

1960년 12월 월남의 공산주의자들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결성했고, 호치민은 베트콩을 지원했다.
베트콩에 물자와 인력을 지원하던, 북베트남~라오스~캄푸치아~남베트남으로 이어지는 밀림 속의 그물같은 보급로는 '호치민 루트'로 불렸다. 미국의 개입도 확대됐다. 특히 1964년 통킹만을 초계하던 미 제7함대의 매독스호의 피습을 신호탄으로 1964~65년의 동계 공세, 1965년 11월의 이에드랑 계곡전투., 1967년 11월의 중부고원전투, 1968년 구정공세 등 극으로 치닫는 전투가 끊임없이 계속됐다. 한국. 뉴질랜드. 오스트리아 등이 참전해 국제전의 양상도 띠었다.

끝을 알 수 없던 전쟁은 1970년 닉슨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사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방향으로 겨우 물줄기를 틀었고 1973년 월남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의 티우 정권은 독재와 탄압정치를 계속했고, 1975년 1월 북베트남의 전면공세와 미군의 철수 속에 급속히 몰락했다. 그러나 전쟁의 맨 선두에 서서 싸움은 이끌었던 호치민은 승리의 영광을 안지 못했다. 그는 1969년 9월 3일 심장병으로 숨졌다. 평생을 독신으로 보낸 까닭에 그의 임종을 지켜보는 가족 하나 없이.

뒷날 베트남인들은 이 '살아있지 않은' 영웅에게 사이공시의 이름을 호치민시로 바꿔 존경과 애정을 표시했다.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하고 줄곧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했지만 호치민은 공산주의의 면모와 함께 민족주의자의 냄새를 짙게 풍겼다. 농민이 대부분인 현실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해 독특한 혁명의 길을 창조했다. 그에게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는 칭송은 결코 과분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