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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베트남은?솔 란다우(미국의 진보 언론인)의 베트남 기행

박영복(지호) 2006. 8. 31. 10:51
지금 베트남은?솔 란다우(미국의 진보 언론인)의 베트남 기행



호치민(구 사이공) 시는 북적거리고 들썩거리고 시끄럽다. 호치민 시의 교통 혼잡에 비하면 하노이는 약과다. 렉스, 카라벨, 셰라톤, 하이야트, 콘티넨탈 같은 고급 호텔에서는 관광객과 현지인이 쉽게 어울린다. 미국, 유럽, 아시아 제품을 선전하는 네온사인이 낡은 건물과 새 건물 사이로 요란하다. 소련이 건재하던 시절 베트남의 도시는 도시다운 활기를 통 느낄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상전벽해다.



호텔들이 밀집한 구역의 드넓은 도로, 웅장한 오페라 극장, 시청으로 쓰이는 궁전은 하노이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유산이다. 호치민 시의 인구는 수도 하노이의 2배다. 인구 800만명에 오토바이는 200만대. 제3세계이긴 하지만 영락없는 현대 도시다.



KFC에서 일하는 여종업원이 베트남에서 나오는 영자 주간지의 사진 기자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미국 제품이 베트남에서 인기가 많아요." 미제를 살 수 있는 베트남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베트남의 대미 수출은 46퍼센트나 늘었다.



베트남의 무역량 특히 대미 교역량이 늘어나고 외국인 투자와 관광 산업의 비중이 커지면 베트남의 정치적 지향점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미국 백화점에서 팔리는 옷 중에서 "메이드 인 베트남" 제품 진짜 많다.



호치민 시의 성장은 베트남의 미래를 예고한다. 1975년부터 1986년까지는 아무리 손님이 없어도 호텔을 국가에서 다 관리했다고 한다. 그런데 올해에는 3월 말에 빈 방이 거의 없었다. 아시아 관관 산업 회의가 열렸기 때문이다. 웬만한 고급 호텔은 사교장이 되었다. 쪽 빼입은 베트남 사람과 서양인 사업가가 냉방이 빵빵한 SUV에 올라탄다.



호치민 시 남단에 자리한 공단에서는 새로 들어선 수십개 공장에서 첨단 전자 제품을 비롯해서 다양한 제품을 생산한다. 오후5시 15분쯤 되면 공장 부근의 신호등 앞에 오토바이들이 죽 늘어선다. 끝이 다 안 보일 정도로 긴 줄이다. 파란불이 들어오면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오토바이들이 일제히 출발한다. 퇴근하는 공원들은 대부분 10대와 20대다.



"대부분은 방을 같이 씁니다." 생물학을 가르치는 친구가 설명한다. "한 달에 40달러 정도 버는데 집에다 송금을 해요. 아파트 입주는 꿈도 못 꾸지요. 그래도 공장에 다니면 공무원처럼 신용카드로 500달러를 호가하는 오토바이를 할부로 구입할 수 있습니다."



부근에 새로 들어선 30만달러를 호가하는 고층 아파트에는 중산층이 산다. 한국, 대만, 일본에서 온 공장 관리자, 매장 지배인, 고급 기술자들도 거기서 산다. 한 아파트 단지 옆에는 영어와 한글로 "한국 식품 일본 식품 전문"이라는 간판을 단 식품점이 있다. 부동산소개소와 비자, 마스터카드 같은 신용카드 스티커가 나붙은 업소도 즐비하다.



저녁 나절의 교통 체증은 멕시코시티를 방불케 한다. 아니, 규칙이 없다는 점에서 더 심하다. 힘이 곧 정의다. 거리를 질주하는 오토바이는 더 큰 차량이 위협을 해야만 멈추지 보행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목숨일랑 하늘에 맡기고 나는 질주하는 차량들 틈바구니로 걸어가는 요령을 터득한다. 건널목 하나 건너는 일도 모험이다.



새로운 베트남은 낡았든 새롭든 크든 작든 자본주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국가는 주요 기간 산업을 보유하고 있지만 새로운 민영화 정책으로 지금까지는 국영 기업으로 남았던 회사를 외국 자본이 인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처음에는 합작 회사로 출발했다가 지금은 프랑스 회사로 탈바꿈하는 빅토리아 호텔만 하더라도 그렇다.



사회 복지 차원에서도 아무리 최저 임금을 받는 노동자이고 가난한 농민이라 하더라도 적게나마 돈을 내야 한다. 그래서 보건과 교육에서 타격을 받는 빈민과 농민이 많다. 돈을 안 내면 사람 대접을 못 받는다고 친구가 말한다.



2주일 동안 여러 도시를 돌아다녔어도 새로운 노선의 부작용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있었을지 몰라도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못 만났다. 학자와 당 간부들은 성장과 번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래도 화석연료로 돌아가는 경제 구조에서 비롯될 수 있는 환경 재앙에 대해서는 너도 나도 우려한다. 베트남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이다. 발전을 하려면 아직 도움이 필요한 나라지만 쿠바에 대해서는 호감을 숨기지 않는다. 미국은 우러러본다. 미국은 베트남이 발전하는 데 필요한 나라라는 것이다.



전쟁 박물관은 서양과 아시아에서 온 관광객으로 북적거린다. 사람들은 말없이 이 사진에서 저 사진으로 옮겨다닌다. 한쪽 벽에는 수염을 못 깎은 초췌한 얼굴로 두려움에 질려 담배를 꼬나문 미군의 사진이 있다. 그 옆에는 도망가는 베트남 소녀의 사진이 걸려 있다. 네이팜탄을 맞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소녀의 얼굴을 보니까 몇십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이 흑백 사진 밑으로 이러구러 35년의 세월이 흘러 아기 엄마가 된 소녀의 사진이 있다. 팔뚝과 어깨에는 아직도 화상이 남아 있다.



미군이 자행한 학살, 살해당한 언론인, 파괴당한 마을의 이야기를 읽는다. 미소를 머금은 미국 대통령과 장성의 사진 옆에는 지압 장군과 월맹 사령부의 사진이 있다. 관람객 중에는 퇴역 군인으로 보이는 노인들도 있다. 하도 심각한 표정이어서 선뜻 말을 걸 수가 없다. 주근깨가 많은 백인 여자에게 소감을 묻는다. "한심할 따름이지요. 왜들 교훈을 못 얻고 이라크로 또 쳐들어 간답니까."



한 방에는 아이들의 그림이 걸려 있다. 대부분 밝고 희망적인 그림이지만 폭탄이 쏟아지는 암울한 그림도 있다.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나선 사람은 이곳에다 2주 정도는 가둬두어야 할 것 같다.



렉스 호텔 근처에서 다리 하나가 없는 사내가 구걸을 한다. 베트남 친구를 통해 들으니 전쟁중에 지뢰를 밟았다고 한다. 흥청거리는 호텔 구역에서 몸이 불편한 사내는 항미 전쟁의 어두운 기억을 일깨운다. 맛나고 기름진 음식을 먹는 관광객과 베트남인은 이 사람을 조금이라도 생각할까? 300만명이 죽은 과거를 그래도 조금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젊은 대학생들과 정치 토론을 벌이려고 애써보지만 이내 포기한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한 경제학도가 말한다. "앞을 보면서 살아야지요." 경제 성장, 공해 방지, 외자 유치에는 찬성하지만 이라크 전쟁에는 반대란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교훈을 못 얻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4월에 있을 빌 게이츠 방문과 11월에 있을 부시의 방문을 고대한다.



나는 사회주의로 화제를 돌린다. "1975년부터 1986년까지 우리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먹을 것도 모자랐고 정부도 잘 안 돌아갔어요. 소련이 망하고 나서 베트남은 좋아졌습니다. 보세요." 한 과학도가 말한다. 실업은 여전히 골치 아픈 문제지만 외국인 투자로 일자리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



한 환경학 교수는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외국 기업은 베트남에 쏟아붓는 것보다 베트남에서 빼가려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도 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이다. 어쩌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출처: http://www.counterpunch.org/landau0414200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