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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단순히 마실거리의 차원을 넘어

박영복(지호) 2006. 4. 28. 16:20

차는 단순히 마실거리의 차원을 넘어

인류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음료인 차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에서는 사교문화로 동양에서는 정신문화로 꽃피웠다. 특히 동양에서 차는 예술적인 규율안에서 격식있게 마시는 의식을 만들었으며 거기에 정신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이를 다도(茶道), 다례(茶禮), 다예(茶藝), 다법(茶法)이라는 이름으로 차를 내는 이의 철학적 태도를 반영하기도 했다.

차는 크게 찻잎의 원형을 살려 가공한 잎차와 찻잎을 미세한 분말 상태로 만들어 가공한 가루차로 나눈다. 이런 차의 향과 멋을 담아내기 위해 꼭 필요한 그릇으로는 잎차를 우려 마실 때 쓰는 다관(차주전자)과 찻잔, 그리고 가루차를 타서 마시는데 사용하는 찻사발(다완)이 있다. 이같은 찻잔과 다관, 찻사발을 좁은 의미에서 다기(茶器) 또는 찻그릇이라 하고 기타 찻일에 쓰이는 다른 도구들을 다구(茶具)라고 한다. 이 글의 주제가 “다기의 미학”에 대해 알아 보는 것이지만 그에 앞서 동양의 정신문화에 녹아있는 ‘차의 정신’에 대해 먼저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동양에서의 차의 역사

동양에서 차는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전기호(古典嗜好) 음료라고 말할 수 있다. 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당나라 때 육우가 쓴 「다경(茶經)」에 보면 ‘차를 오래 마시면 사람으로 하여금 힘이 있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한다’는 신농(神農)의 「식경(食經)」을 인용한 내용의 기록이 있다.

신농은 중국의 삼황(三皇)가운데 한 사람으로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처음 가르쳤고 약초를 발견하기 위해 백가지 풀을 맛보다가 하루에도 70번이나 독초에 중독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신농황제는 독초의 중독을 찻잎을 씹어 해독하곤 했다는 의약의 신이기도 하다. 이런 기록들의 내용으로 보면 신농 황제 때인 BC 2700년경에도 차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렇게 수 천년의 역사를 이어 온 차는 동양의 생활 문화 속에서 단순한 마실거리가 아닌특별한 정신문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우선 차는 약리적 기능으로 마음을 편히 가라앉히고 정신을 맑게 하여 우리에게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한다. 이런 사색의 시간은 다인들에게 자연과 우주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명상과 자기 성찰을 통한 수양의 실마리를 주었고 시인과 묵객들에게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중국에서 나서 우리나라에 전래된 차는 다선일여(茶禪一如)를 주장하는 승가의 사원차, 접대연이나 제례 등 의례로 행하는 의식차, 일상에서 마시는 생활차, 아플 때 마시는 약용차로 각각 이어져 내려오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우리 민족의 삶의 한 요소가 되었다. 우리 옛 선인들은 차를 자기 수양의 방편으로 삼아 혼자 마시며 깊이 생각했고 둘이 마시며 담론하고 여럿이 마시며 예를 갖추었다. 이래서 차는 다른 마실 거리와 차별되는 동양이 만들어 낸 정신적 음료가 되었다.


차생활은 실천 미학

차 생활은 단순히 차를 우려내는 일만은 아니다. 차생활을 하다보면 차를 우려내거나 담아 내는 다기로써 도자기와 찻그릇을 올려놓는 찻상이나 다반같은 목기, 다실의 분위기를 위 해 장식하는 서화(書畵)나 음악, 꽃을 꽂는 화기(花器) 등 찻일(茶事)에 쓰이는 갖가지 도구에 관심을 갖게된다. 더 나아가서 정원의 나무 한 그루, 이끼 낀 작은 돌, 풀 한 포기가 만 들어내는 조형이나 놓여진 섬돌 하나에서도 감동어린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이 모든 것들은 미의 추구를 위한 요소들로써 그 목적이 단순히 감상에 있다기보다는 일상생활 속에서 아름다움을 경험하는데 있다. 그것은 단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차생활은 정적인 미가 깃든 동적인 미를 추구한다. 그것은 운동 속에서의 미다. 한 벨기에 사람은 어느 다인 집(다가연 차회 김용술님 댁)에 초대되어 차를 대접받고 귀국한 후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다.

정갈한 숲의 향을 우리는마셨다. 창호지와 간결하고 명확한 몸짓으로 우려내는 차. 한 손 밑의 다른 손... 손가락 마디 마디... 물이 흐르고, 부드럽고 분명하게 따라진다. 그런 폭포수... 시원한 도자기의 그 멋! 세 번에 나누어 마시는 행위가 계속된다. 그릇들이 묵묵히 이동한다. 그런 호흡... 환대하는 분위기 속에서의 그 특별한 맛! 이추억이얼마나근사한지!!

그 외국인은 ‘차내는 일’에서 동양정신이 담긴 정중동(靜中動)의 미, 즉 고요함과 인체의 동선이 함께 어우러진 선(線)의 미학을 본 것이다.

차 생활은 일상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 예술이고 차와 관련된 주변 문화를 동시에 체험하는 종합적 실천미학이다. 또 차 생활을 통해 공예문화 즉 도자기나 목기, 다실의 분위 기를 돕기 위한 민예품 등에 대한 이해와 안목을 높일 수 있다. 차는 시(詩),서(書),화(畵)의 세계까지 정신적 눈의 영역을 확장시켜준다.


어울림과 더불어 사는 삶

따라서 차 생활은 종합문화체계이면서 미의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 말할 수 있다. 일 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차생활을 통해 미의 나라로 들어가는 우리는 다시 착함의 세계로, 착함의 세계에서 참됨의 세계로, 참됨의 세계에서 경건함의 세계로의 여정을 거치게 된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의 극치는 착함과 참됨과 경건함과 한 가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정을 통해 眞(학문), 善(윤리), 美(예술), 聖(종교)이라는 조화로운 전인적 인격을 만들 어 가는 것이다.

차의 정신은 한 인격이 삶에 생기와 빛을 주는 아름다움을 체험하면서 자기 성찰을 통해 얻어내는 조화의 마음이다. 개인적으로는 치우침이 없는 인격의 조화이고 사회적으로는 너 와 나의 어울림이며 더불어 살려하는 상생(相生)의 정신이다. 자연을 통해서는 질서와 이치를 배우고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이해하고 몸에 익히는 일이다.

김동현은 茶會"작은 다인들의 모임" 회장이고 차문화 공예연구소인 雲中月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는 흙과 나무로 차 생활에 소용되는 기물등을 만들며 그 것들을 사용함으로써 생활이 생기 있고 아름다워지기를 원한다.

다기란 무엇인가

다기(茶器)는 넓은 의미로는 차를 내는데 쓰이는 여러 종류의 도구를 말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다기는 ‘찻물을 담거나 차를 우려내는 그릇’을 말한다. 기타 찻일에 쓰이는 다른 도구, 예를 들면 차를 올려놓는 찻상, 차를 보관하는 차통, 차를 떠내는 차수저는 다구(茶具)라고 한다.

차는 마시는 방법에 따라 크게 잎차와 가루차로 나눈다. 잎차는 찻잎을 물에 넣어 우려 마시는 방법이고 가루차는 찻잎을 가루 낸 분말에 물을 부어 저어 마시는 방법이다.

이때 쓰이는 다기는 잎차의 경우 차를 우리는 다관(찻주전자)과 따라 마시는 찻잔으로 구성되고, 가루차는 찻가루를 넣고 물을 부어 저어 마실 수 있는 찻사발(다완)이 있다. 우선 잎차 다기에 관해 이야기하고 가루차 사발에 대해서는 후에 잎차 찻잔과 함께 설명을 하도록 하겠다.

잎차 마시기의 역사

다관에 찻잎을 넣고 더운 물을 부어 우려 마시는 잎차를 음용하기 시작한 것은 명 왕조 홍무 24년(1391년)부터다. 그때까지 송대에 유행하던 연고차(硏膏茶)는 차를 찌고 즙을 짜낸 후 갈아서 틀에 찍어 내는 공정을 거친 다음 광택을 내는 등 제다공정이 까다롭고 힘들었다.

명 왕조는 그간 연고차를 만들어 나라에 바치는 공차(貢茶)제도로 인한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연고차 제조를 법령으로 금지시켰다. 이때부터 일종의 덩이차인 연고차(硏膏茶) 대신 잎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 후 차를 우리는 다관이 의흥 지방을 중심으로 활발히 제작되어 지방 이름을 붙인 유명한 ‘의흥 다관’이 탄생되었고 찻잎을 다관에 넣어 우려 마시는 다법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다갈색의 의흥의 자사 다관은 쓸수록 차의 정유 성분이 밖으로 나와 유막(油膜)을 형성하면서 자연스런 광택이 난다. 또 뜨거운 물을 부으면 홍조를 머금듯 색이 변하면서 살아 있는듯하고 금방이라도 생명을 분출할 것처럼 느껴지며 차맛 또한 좋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차를 우려마시는 다법의 시작은 16, 17 세기로 추정된다. 정영선님에 의하면 이는 그시절 정사룡(鄭士龍)과 허균(許均)의 차시(茶詩)에서 우린다는 뜻으로 유추할 수 있는 데칠약 이라는 한자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후 다산시대에 와서 우려 마시는 다법이 널리 보급되었다.

조선시대 사헌부(司憲府) 관리들이 일정시간에 모이는 것을 다시(茶時)라고 했으며 궁중에는 다색(茶色)을, 또 관아에는 다모(茶母)를 두었다.

최근 인기 사극 다모(茶母)는 차와 관련있는 드라마이다. 좌포도청 다모인 채옥은 여인들이 관련된 사건의 조사를 맡은 포도청 소속 관비로 각종 사건을 해결하는 오늘날의 여형사로 화려한 무술 영상과 빠른 전개 등은 시청자의 눈을 즐겁게 한다.

다모는 다(茶) 심부름을 하는 여자로 관청에서 차를 끓이는 등의 잡무를 담당하는 여성을 말하며 신분은 천인으로 대부분 관비였다고 한다. 글 읽고 똑똑한 여성으로 의녀(醫女)와 함께 여성수사를 담당하기도 했다. 다모의 관련 기록은 많지 않으나 조선 후기에 쓰여진 송지양(宋持養: 1782~?)의 ‘다모전’(茶母傳)은 그 시대 다모의 여자 형사로서의 역할을 보여준다.


잎차의 종류

잎차를 발효 정도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불발효차

덖거나 찌는 방법에 의해서 잎 속의 산화 효소를 파괴시켜 발효를 방지한 것으로 이런 불발효차로는 녹차가 있다. 녹차는 가공된 찻잎이 녹색을 띄고 찻물색은 연두색이거나 황금색이며 신선한 풋내음을 간직하고 있다.

■반발효차

발효가 10-65% 정도 이루어진 것으로 백차류(10%), 화차류(20%), 포종차류(20-50%), 우롱차(65%)로 나눌 수 있다. 반발효차는 발효 도중 생긴 독특한 향과 부드러운 맛이 특징이다.

■발효차

발효가 85% 이상 된 것으로 홍차가 있다. 홍차는 잎차 형태와 파쇄형 홍차로 나눌 수 있다. 파쇄형은 맛과 홍색의 찻물색이 강하여 티백용으로 사용되고 잎차형은 티포트에 넣어 우려 마시는데 찻물색은 연하나 향기가 파쇄용보다 뛰어난 고급차다.

■후발효차

후발효차는 군산은침 같은 황차와 보이차 같은 흑차로 나뉜다. 비효소성 발효로 만들어지는 것이 황차이고 아스퍼질러스(Aspergillus) 등의 곰팡이 균류를 생기게 하여 떫은 맛과 풋내를 없애고 흑색으로 변하도록 발효시켜 만든 것을 흑차라고 말한다.

잎차 우리는 그릇 - 다관(茶罐)

다관은 잎차를 넣고 더운 물을 부어 차가 적당하게 우러나오면 우린 차를 찻잔이나 다른 그릇에 따르기 위해 만들어진 주전자 모양의 그릇을 말한다. 다관을 만드는 재질로는 금, 은, 동, 유기 등 금속과 옥과 같은 자연석, 그리고 도자기가 있다.

다관의 명칭은 물대를 기준으로 손잡이가 몸통 옆에 붙어 있으면 다병(茶甁), 뒤에 있으면 다호(茶壺), 위에 있으면 다관(茶罐)으로 분류되지만 현재 가장 많이 쓰이는 명칭인 다관으로 통일해서 부르는 것도 좋다고 본다. 다만 손잡이 위치에 따라 윗손잡이 다관, 옆손잡이 다관, 뒷손잡이 다관으로 부르면 다관의 종류를 인식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관의 종류

주전자 모양의 다관은 몸통에 붙은 손잡이의 위치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윗손잡이 다관

다관(茶罐)은 활 모양의 손잡이가 위에 있는 것으로 차를 넣고 내는 데는 불편한 점이 있지만 옛날에 가장 많이 쓰였던 형태다. 손잡이는 도자기로 된 경우와 대나무나 등나무, 나무 뿌리로 만든 것을 사용하기도 한다.

■옆손잡이 다관

다병(茶甁)이라고도 부르며 자루 모양의 손잡이가 물대를 기준으로 몸통 옆에 붙은 차 주전자를 말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쓰인다.

■뒷손잡이 다관

다호(茶壺)라고도 하며 고리 모양이나 의장(意匠)적으로 변형된 손잡이가 물대 반대편 몸 통에 붙어 있다. 고리 모양의 손잡이는 중국차가 들어오면서 부쩍 많이 쓰이고 있는 형태다.

다관의 기능성과 예술성

생김새보다는 쓰임새에 유의하는 걸 생활 미술에서는 ‘기능성’이라고 말한다. 공예적 관점에서는 아름다운 그릇보다 쓸모있는 그릇이 더 가치를 지닌다고 보는 만큼 기능성은 매우 중요하다.

쓰임새 면에서 볼 때 다관은 다음과 같은 기능적 부위로 구성돼 있다. 필요한 용량을 담을 수 있는 몸통, 찻물이 깨끗하게 따라지는 물대, 쥐거나 잡기에 편한 손잡이, 찻물이 식는 것과 향기의 휘발을 막아주는 꼭맞는 뚜껑으로 되어있다.

또 다관은 이러한 기능성 외에도 위에서 말한 네 가지 부위가 적절히 조화를 이룬 아름다움, 즉 예술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다관은 쓰임새가 편한 ‘기능성’과, 심미적 감상 욕구를 충족시키는 ‘예술성’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다관이 갖추어야 하는 기능성 - 3수3평(三水三平)

쓰기에 편한 다관은 3수3평(三水三平)의 원칙에 따라 만들어져 있다. 3수란 출수(出水), 절수(切水), 금수(禁水)를 말한다. 출수는 물대에서 나가는 물줄기가 힘차면서도 예상 지점에 물이 떨어지는 것이고, 절수는 물 끊음질이 깨끗해서 물이 몸통으로 흘러내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금수는 뚜껑의 바람 구멍을막으면 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만큼 뚜껑이 정확하게 꼭 맞는 것을 뜻한다.

3평이란 물대 끝과 몸통의 전(찻잎을 넣는 입구) 그리고 손잡이의 끝이 같은 높이가 되어 수평을 이루는 것이다. 옆손잡이나 뒷손잡이 다관은 3평의 원칙을 지켜 제작한 게 좋다. 윗손잡이 다관도 당연히 물대와 몸통의 전은 수평을 이루어야 한다.

3평의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기능상의 문제가 생긴다. 물대 끝이 몸통의 전 높이보다 높을 경우, 다관을 많이 기울여야 물이 나오고 이때 전을 통해 찻물이 몸통 밖으로 흘러내릴 수 있다. 또 물대 끝이 몸통의 전보다 낮으면 전 높이 만큼 물을 채울 때, 물대로 물이 넘쳐 흘러나온다. 또 손잡이의 끝이 물대와 몸통의 전과 수평을 이루지 않고 너무 높거나 낮으면 우리개의 무게 중심이 안정되지 않아 쥐거나(자루 손잡이) 잡고(고리 손잡이) 쓰기에 불편하다.


■다관의 예술성

다관은 항상 다인(茶人) 곁에 있는 말없는 벗이므로 쓰임새뿐 아니라 예술성 또한 뛰어나야 한다. 러시아 작가 고리키는 “천성적으로 인간은 예술가이며,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언제나 아름다움을 자신의 생활 속에 지니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 “미는 생활이다”고 말한 미학자도 있다. 그렇다. 다인의 차생활은 곧 아름다움이다.

생활 속에서 일상으로 쓰는 다관은 질박함과 건강미를 갖고 있는 도질자기(陶質磁器)로 된 다관이 쉽게 싫증나지 않아 좋다.도질자기는 반 자기화한 것으로 약간의 흡수성이 있고 숨을 쉬므로 세월의 분위기가 주는 고태미(古態美)를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사용하면서 길을 내는 즐거움도 더할 수있다.

주의할 일은 도질 자기는 맛과 향을 잘 흡수하므로 다관을 발효차용과 비발효차용으로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차의 맛이나 향에 영향을 받지 않고 본래의 차 맛을 즐길 수 있다. 또 수분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으므로 차를 우리는 일이 끝나면 깨끗이 비우고 잘 건조시키는 것도 지켜야 할 일 중에 하나다.

백자나 청자다관은 완전자기화된 도자기로 쉽게 변화하는 아름다움은 없지만 그 형태나 색상이 정교하면서도 기품이 있고 단아한 품격을 갖추고 있어 특별한 분위기의 차 마심이나 의식다례에 쓰면 좋다.

다인이라면 차를 마시는 그 시간만큼 더 행복을 느낄 때는 없을 것이다. 그 행복의 순간에 말없이 곁에서 시중드는 찻그릇이야말로 다인의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있다. 다인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다관의 매력에 대해 더 알아 보도록 한다.


■다관의 아름다움 찾기

가. 태토(속살 흙)와 유약의 물성(物性)이 갖는 자연미

다관의 조형은 태토의 물리적 성질에 순응하여 만들어질 때 아름답다. 예를 들면 백자의 태토처럼 치밀질 흙으로는 섬세한 맛과 단아하고 우아한 멋을 지닌 백자 다관을 만들고 거친 흙으로는 무심한 손맛과 소탈한 맛이 느껴지는 도질자기 다관을 만들어야 제격이다. 치밀질 점토로 거칠고 질박한 형태를 흉내내거나 거친 점토로 섬세하고 유연한 맛을 내려한다면 모두 재료의 물성을 거슬리는 일이 될 것이다.

이때 투명성 유약으로 옷을 입히면 태토의 색깔이나 입상(粒狀)까지도 비쳐 나오므로 태토의 본질인 물성의 자연미, 즉 ‘흙맛’까지도 느낄 수 있다. 다관의 피부는 태토의 색과 질감, 유약의 색과 투명성, 유약의 두께와 빙열, 유약의 응결과 확산상태에 따라 느낌과 분위기가 다르게 된다. 따뜻해 보이고 부드러우면서도 불길이 지나간 흔적에 따라 유색(釉色)과 분위기의 변화가 있으면 더 많은 감상거리가 있는 다관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청자나 백자는 유약의 확산이 고르고 유색도 일정해야 한다.

나. 형태의 느낌 - 조형의 아름다움

물대, 몸통, 뚜껑, 손잡이로 구성되어 있는 다관은 이 네 가지의 구성 요소가 조화를 이룬 형태미를 갖추어야 한다. 다관의 형태를 구성하는 요소로 조형성과 품격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물대와 손잡이다. 따라서 다관의 물대와 손잡이는 차를 따를 때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할 뿐 아니라 그 형태에 따라 다관의 품격이 결정되는 만큼 기능성과 예술성을 모두 요구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몸통은 안정된 모습이 제일 중요하다. 그러나 뒷손잡이 다관의 경우 너무 키가 낮고 납작한 것은 무게 중심이 손잡이로부터 멀기 때문에 무겁게 느껴지는 단점이 있다. 그 외의 형태의 변화 즉 다각형이나 동식물 또는 다른 사물의 형상을 취해 만든 것들은 작가의 취향이고 창작의 차원이므로 쓰는 이들을 즐겁게 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형태가 너무 복잡하고 화려한 것들은 쉬이 실증이 난다는 점도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다. 분위기의 맛- 조화의 아름다움

다관의 형태와 유색(釉色), 표면의 질감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분위기의 아름다움을 조화미라고 한다. 도자기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의 맛은 사람에게 있어서 내면의 미나 인격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형태의 구성 요소 하나 하나는 아름답다고 해도 전체 속에서 하나가 되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든다면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해체된 미일뿐이다.

라. 변화한다는 것의 아름다움

찻그릇은 주인과 함께 늙어가므로 더 애정이 가는 기물이다. 쓴 만큼 세월이 입혀지고 깨어져도 버리지 않고 금이나 은으로 때워주며 그 상처 난 이야기를 간직하는 것, 이것이 다인이 찻그릇에 바치는 예우이고 찻그릇은 그렇게 주인과 함께 늙어 간다. 그리고 다인은 변해가는 찻그릇과 본인의 모습에서 새삼 살아 간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이다.

다관을 감상하고 즐기기 위해서는 도자기를 읽는 심미안을 가져야한다. 도자기는 아는 만큼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애정이 생겨난다. 애정을 갖게 된 후에는 넓게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사람의 눈이란 한 가지를 자주 보면 친숙해지고 친숙해지면 그것만이 정이 간다. 그러므로 도자기를 보는 눈도 편식을 하면 안된다. 가능하면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보아야한다. 더 알고자 한다면 옛날 그릇들을 많이 보기를 권한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다관을 감상하는 눈이 트인다.

찻잔과 찻사발(다완)

찻잔-잎차용 잔
다관에서 우린 잎차를 담는 찻잔은 잔(盞)과 배(杯, 盃)가 있다. 보통 잔에 비해 바닥의 굽이 높은 것을 배라고 부른다. 배에는 무사가 말을 타고 한 손으로 들고 마시는 굽이 높은 마상배(馬上盃) 등이 있다. 문향배(聞香盃)는 중국인이 차향을 즐기기 위해 고안한 잔이다.

▲ 각종 찻잔 형태. 마상배(사진 좌 두번째), 문향배(사진 좌 네번째) . 사진/김동현


중국인은 좁고 긴 문향배에 차를 따르고 그 차를 다시 마실 잔에 옮긴 다음 문향배를 코 가까이 대고 향을 맡는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가슴 높이에서 향을 즐기는 우리의 정서나 품격에는 알맞지 않은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찻잔의 형태

찻잔은 형태를 중심으로 분류하면 범종을 거꾸로 세운 듯한 종형과 위아래 크기가 비슷한 통형, 굽에서 위로가면서 벌어지는 사발형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고 이 기본형으로 부터 많은 변형이 나온다. 잔은 입술이 안으로 많이 옥으면 마실 때 목을 젖혀야하므로 좋지 않고 잔의 입술이 너무 두꺼우면 차 맛을 예민하게 느낄 수 없다.

▲ 찻잔은 개인의 취향과 차의 종류에 따른 선택이 필요하다. 사진/티&피플 제공


찻잔의 색과 크기

찻잔 빛깔에 대한 취향이나 기호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이는 당시에 마시던 차의 종류에 따라 찻물색이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수색이 붉게 나오는 덩이차를 마시던 중국 당대에는 월주요에서 구워진 청자를 최고로 여겼다. 이는 형주 가마에서 만들어진 백자에서는 덩이 찻물이 붉게 보이는데 비해 월주의 청자는 찻물의 빛깔이 백록색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육우가 쓴 ‘다경(茶經)’은 기록하고 있다. 같은 덩이차를 마시던 송대에도 청자가 주로 사용되다 11세기에 이르러서는 흑유(천목) 찻잔이 애용되기 시작해 13세기에 절정에 이르고 14, 15세기에는 내리막 길에 들어선다. 그뒤 잎차를 마시기 시작한 명나라 때에는 잎차의 황금색이나 연두색 찻물색이 잘 보이는 백자를 좋아했다.

▲ 한국의 도공들이 만들어낸 각종 찻잔, 과거 조선은 세계 도자기 강국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수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쇠퇴의 길을 걷고 일본은 오늘날 세계 도자기 강국이 되었다. / 변희석 기자


조선시대 초의(草衣)스님이 쓴 다신전(茶神傳)에는 잔은 설백색이 가장 좋고 남백색(藍白色) 은 색을 해치지 않으니 다음으로 좋다고 했다. 찻잔의 색은 찻물의 색을 정확히 내려면 백자나 분청자기의 흰색이 제격이겠지만 차를 마시는 일이 찻물색만 보는 것은 아니므로 그 날의 기분과 손님에 따라 다양한 색의 찻잔을 골라 쓰는 즐거움 또한 크다. 찻잔의 크기도 오랫동안 다담을 나눌 때는 좀 작은 잔을 사용하고 일상적인 찻자리에서는 중간 크기의 찻잔을 사용한다. 혼자서 찻일 조차 번거롭고 그저 생각에 젖고 싶을 때는 큰 잔에 차를 가득 담아 천천히 나누어 마시는 것도 괜찮다.

찻사발 [茶碗] - 가루차용 사발

▲ 가루차용 찻잔은 다완(茶碗) 또는 찻사발이라 부른다. 주로 한국이나 일본에서 사용한다./ 변희석 기자


가루차는 찻잎을 곱게 갈아 만든 분말을 그릇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 차솔로 휘 저어 거품을 만들어 마신다. 이때 쓰는 사발을 다완(茶碗) 또는 찻사발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찻사발은 신라 때는 토기사발, 고려 시대에는 청자사발, 조선시대에는 백자, 분청 자기, 지방자기로 만든 사발이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 찻사발은 형태에 무리한 모습이 없고 어디에 놓여지든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한 모습으로 차의 중용사상이나 겸양지덕의 정신과 잘 어울린다.

조선찻사발 위에 세워진 일본다도

일본은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리워지는 임진왜란을 통해 수 많은 조선의 사기장들을 일본 으로 끌고 갔고 찻사발과 많은 도자기를 약탈해 갔다. 이때 끌려간 조선의 사기장과 가져갔 던 도자기는 일본의 도자산업을 일으켜 국가 경제를 부흥시켰고 식생활과 차문화를 바꾸었 으며 일본 다도의 초석이 되었다.

5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일본의 모든 문화를 그 속에 아우르고 있다는 일본 다도는 조선 의 찻그릇 위에 세워진 ‘심미주의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차 문화의 싹이 튼 15세기, 일본의 무로마치(室町)시대의 미 의식은 적막함, 쓸쓸함, 그리고 스산함이였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활약했던 모모야마(桃山)시대는 일본다도가 완성된 시기이다. 승려이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 스승이고 일본 와비차 다도를 완성시킨 센리큐(千利休)는 자연으로 돌아가 꾸밈없이 사는 소박한 삶과 완벽하고 화려한 미(美)로 부터 불완전하고 검소한 것으로 돌아오는 미의식의 세계를 확립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와비차 정신을 담아내는데 가장 적절한 찻그릇으로서 조선의 사발을 선택했다. 센리큐가 제창한 이런 차 문화의 영향으로 조선의 찻사발 하나는 당시의 오사카성(城) 하나와도 바꾸지 않을 만큼 가치를 지니게 되었고 일본 다인들의 명예와 부의 상징이 되었다.

일본의 고려 다완 연구가 하야시의 조선 찻사발에 대한 평가는 매우 솔직하고 함축적이다. “이 고려다완은 물론 조선 시대의 막사발이긴 하지만 우리 일본인들에게는 신앙 그 자체 였으며, 우리에게는 단순한 보물이 아닌 우리들의 마음을 한없이 평화롭고 기쁘고 또 숭고하게 했으며 우리의 마음을 영원한 안식처로 이끌어 주었던 마치 신과도 같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일본 다인들에 의해 국보로 지정되었고 일본 천황도 무릎 꿇고 보아야한다는 ‘신같은 존재’ 로 신앙의 대상이 된 조선 찻사발은 형태의 단순성, 꾸밈이 없는 무위성(無爲性), 무욕의 마음에서 나오는 소박성이 투영된 자연주의적 미학의 산물이다.

찻사발의 모습과 감상

찻사발의 명칭

도자기 부위에 대한 명칭은 동서양이 모두 인체에 비유하는 공통성이 있다. ‘입술이 두툼하고, 어깨가 당당하다. 허리 밑이 너무 훌쭉하지만 굽 다리는 튼실하다’ 등 우리 몸의 일부처럼 말을 한다.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마지막과 흙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도자기의 시작이 결국 한 이치이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찻사발의 부위에 대한 명칭이나 종류별 찻사발의 우리식 명칭이 아직 확정된 것이 없다.

일본 다인들이 그동안 우리 찻사발을 종류별로 명칭을 붙이고 하나 하나에도 그들 나름의 이름을 지어 놓았다. 우리 그릇이면서도 일본 사람들이 정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공감이 가지않는 이름을 제각기 아무렇게나 지어 부를 수도 없다. 뜻있는 사람들이 우리 찻사발에 이름 붙이는 일을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서 의견을 모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현재 정립되지 않은 찻그릇 명칭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다인들이 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사용하는 찻사발에 대한 명칭이나 용어는 필자 개인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 많음을 밝혀 둔다.

찻사발의 차격(茶格)과 크기

사발은 직선의 굽과 반구형의 곡선으로 된 몸통과 원형의 전(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단순한 직선, 곡선, 원형이라는 이 세 요소가 조합되어 한없이 다양한 형태의 사 발을 만들어 낸다.


▲ 찻사발이 보통 사발과 다른 점은 차격(茶格)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차격은 찻사발이 가지고 있는 우아함, 의젓함, 당당함을 의미한다. / 사진 雲.中.月 제공



사발은 두 손으로 둥근 물체를 공손히 받쳐든 반구형의 형태로 그 크기가 한 손만으로도 다루기 편하고 내용물 또한 어느 정도 충분한 양을 담을 수 있다.

또 두 손으로 안았을 때 어느 정도 양감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부담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어서 먹고 마시는 기능에 알맞은 그릇이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사발이 모두 찻사발이 되지는 못한다. 찻사발이 보통 사발과 다른 점은 차격(茶格)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차격이 있는 사발이란 차 정신에 맞는 분위기가 있는 사발로 아취, 기품, 충만한 힘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있는 사발을 말한다.

찻사발은 다인 손에서 오래 머무르는 그릇이므로 차격이 있으면서도 크기와 무게가 적당해 야 하고 손으로 안는 맛도 편안해야 한다. 찻사발의 높이는 보통 두 손으로 감싸 안았을 때 손바닥 넓이만한 높이거나 이를 기준으로 조금 높고 낮아도 관계없다. 또 사발은 입의 크 기에 따라 큰 것은 입 지름이 17cm, 중간 것은 15cm, 작은 것은 12cm 정도 되고 큰 것을 발(鉢), 중간 것을 완(碗), 작은 것을 소완(小碗)이라고 부른다. 우리말로는 큰찻사발, 중찻사 발, 소찻사발이라고 한다.

찻사발 부위별 나눠 보기

찻사발 부위 명칭

▲ 찻사발 단면도 부위별 명칭


찻사발의 굽을 제외한 겉 전체 표면을 겉울이라하고 찻사발의 안쪽 표면 전체를 안울이라고 한다. 겉울은 다시 입술 바로 밑 부분을 어깨, 겉울의 중간 부분을 배, 배와 굽 바로 위까지의 중간을 허리라고 한다. 허리밑에서부터 굽 바로 위까지를 허리붙이라고 한다.

안울 쪽은 겉울의 배자리에 해당하는 곳을 차수건 자리라고 한다. 이는 차수건으로 찻사발을 닦을 때 엄지손가락 끝이 닿는 부위다. 또 겉울의 허리자리에 해당하는 안울 자리를 차솔자리라고 하는데 솔질을 할 때 솔이 움직이는 공간부위를 말한다. 안울 밑바닥 중심에 둥글게 살짝 패인 곳을 차고임 자리라고 한다.

찻사발의 감상

찻사발은 매우 작은 공간이다. 그러나 이 공간은 하늘의 숨결과 땅의 정기로 피어 올린 찻 잎의 덕성과 인간의 마음을 담아 내는 그릇이다. 이때 인간의 마음이란 차를 달일 때 자신 과 상대를 위해 차의 신령스런 기운을 가능한 잃지않고 살려내려는 지극한 정성을 말한다. 우리가 찻사발을 감상할 때는 사발 형태의 조형성, 유약의 상태, 소성(燒成)조건, 제작수법에 유의해야한다.

사발의 조형성을 볼때는 굽의 모양, 크기를 주시하고 그 굽위로 뻗어 나간 울선(몸통선) 오름새의 힘과 굽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 찻사발은 도공의 마음과 흙과 불이 완성하는 작업이다. 묵전요 장작가마 작업/ 변희석 기자


유약의 상태를 볼 때는 속살흙과 유약이 어우러져 나타내는 질감, 유약의 확산과 응결상태, 유약의 투명성 여부와 빛깔등에 관심을 갖는다.

소성조건이란 흙으로 만들어진 사발이 어떤 상태의 불속에서 새 생명을 얻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을 말한다. 가마 속의 불이 맑은 불이었는지, 연기가 있는 탁한 불이었는지, 그 중간 불이었는지 또 얼마나 높은 온도였는지에 따라 그같은 요인들이 사발표면의 질감과 빛깔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눈여겨 본다. 제작수법에서는 몸통의 물레선과 굽을 깍아낸 칼질등에 표현된 자연스러움, 운동감, 힘 등을 느껴보고 사발을 안았을 때 이러한 것들이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맛을 감상해 본다.

그러나 이상에서 말한 외형적 감상법에만 마음을 뺏겨 정작 사발이 주는 큰 의미를 놓쳐서 는 안된다. 사발의 형태를 이루는 울의 선은 굽에서 시작해서 사발의 입술에 이르러 그 오 름새의 흐름이 끝난다. 그러나 또 다른 눈으로 보면 오름새의 선은 입술에서 시작하여 그 울선의 곡률을 따라 공간으로 무한히 확장되어 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이 작은 찻사발의 공간은 확장하면 무한 공간을 담아 내고 축소하면 다시 본연의 몇치 안되는 작은 공간으로 돌아온다. 차사발은 작은 그릇에 불과하지만 청정한 하늘과 차나무의 생명력으로 끌어올린 땅의 정기와 차를 통해 자신과 남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사람의 인격을 하나로 모아 담아 낸다. 차의 정신에 비추어 세계를 보려고 하는 다인들에게 있어 찻사발은 지상의 모든 그릇중에 가장 큰그릇이 된다. 다인이란 차그릇이 담고 있는 내면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 차생활은 아름다움의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티&피플 제공



이와 같은 생각은 사람에 따라서 지나친 추상적 관념론이라고 가볍게 여길 수도 있다. 그 러나 사물은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그 의미대로 내게 다가온다. 처음에는 내가 의미를 주 었지만 나중에는 그 의미에 의해 내가 만들어진다. 모든 구체적인 낱낱의 사물은 자신을 다 듬는 화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 김춘수님의 ‘꽃’이라는 아름다운 시는 의미심장하고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명상으로 이끄는 대상으로 나에게 다가 오면서 하나의 화두가 된다. 다인들에게 있어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담는 찻사발은 영원 한 화두의 대상이면서 인생의 역정(歷程)을 함께하는 도반이기도 하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미

찻사발은 동양 정신을 담는 그릇

차는 그 덕성을 가장 잘 살려 주는 도자기를 만남으로써 다인들의 정신 영역을 확장시켜 주고, 영성(靈性)을 적셔주는 동양의 고전(古典) 음료이다. 도자기 또한 차와 만남을 통해 찻사발이라는 형이상학을 담는 철학적 그릇으로 변모한다.

도자기는 흙으로 만든다. 흙은 지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질보다 더 많은 철학성을 내포하고 있다. 흙은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원소를 그 안에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성서에도 하나님이 흙을 취해 사람을 만들었다고 했다. 흙은 자연을 낳고 기른다.

▲ 찻사발은 도공의 연륜과 흙과 불의 조화이다./ 변희석 기자

그래서 흙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어미가 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죽은 후에도 다시 품속에 모두를 받아들인다. 끝내는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마지막과, 흙에서 만들어짐이 시작되는 도자기의 운명이 ‘도자기와 인간과의 관계’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시사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찻사발이라는 도자기는 철학을 담아내는 그릇이 된다.

▲ 도자기는 흙으로 만든다. 흙은 지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질보다 더 많은 철학성을 내포하고 있다./ 왕방요 신용균 作 변희석 기자

찻사발은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대지의 한 줌 흙으로 만든 아주 작은 공간이다.그러나 이 작은 공간은 채우기 위해 비어 있어야하고, 비우기 위해서는 채워져야 하는 진리 의 법기(法器)이기도 하다. 노자의 말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흙을 반죽해 그릇[器]을 만든다. 그 무(無)에 기인하여 그릇의 쓰임이 있다. 문과 창을 뚫 어 방을 만든다. 그 무(無)가 있음에 방의 쓰임이 있다.’

그릇은 점토로 둘러싸인 공간이 있어 그 기능이 있고, 방은 벽으로 막아놓은 공간에 의해 그 효용이 있다는 뜻이다. 찻사발의 본질 또한 공간이라는 무(無)에 있다. 이때 찻사발의 형 태는 안쪽에서 작용하는 ‘무(無)의 충실’이 외면으로 나타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 고 이렇게 만들어진 작은 ‘공간’은 다인의 삶과 꿈을 담아내는 그릇이 된다.

■찻사발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미(美)

동양 정신은 근본적으로 자연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의 명품 찻사발 또한 자연주의 정신을 담아내던 그릇이였다. 조선의 찻사발은 형상의 원형과 그 변형의 미학적 의미를 추구하다 보면 결국은 사람의 손으로 빚어낸 ‘또 하나의 다른 자연’이란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런 자연주의 미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미(美)다.

▲ 우리 찻사발을 말할 때 붙어 다니는 수식어가 있다. 무심, 무기교의 기교, 불완전의 미, 질 박과 소박미 등의 수사는 무위자연의 미에 대한 구체적 언어다./ 변희석 기자

무위(無爲)란 글자 그대로 ‘아무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새삼스럽게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작위(作爲)가 없고 자연 그대로라는 뜻이다. 또 선종(禪宗)에서는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이상적인 경지를 무위라고 한다. 무위자연은 타고난 그대로 꾸밈이 없는 상태로서 천연의 모습이 자연에 합일되는 것이며, 차 정신의 심미적 요구에 부합되는 개념이다.

우리 찻사발을 말할 때 붙어 다니는 수식어가 있다. 무심, 무기교의 기교, 불완전의 미, 질 박과 소박미 등의 수사는 무위자연의 미를 표현하는 구체적 언어다. 이와 같은 수식어들은 사기장들이 찻사발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손 가는대로 아무렇게나 만들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기교를 넘어선 무기교, 완전을 이해한 불완전, 모든 설명적 요소를 걷어낸 후에 얻어 지는 생략의 아름다움으로서의 소박미는 익을 대로 익은 숙련된 손만이 만들어 낼 수 있고, 유심과 무심의 경계를 넘어선 자만이 얻어내는 ‘무위자연의 미학’인 것이다.

사람의 손이 덧붙여졌을 뿐, 무위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재현해낸 최고의 사발을 무 작지작(無作之作)이라고 한다. 만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만들어진 것같은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런 사발 중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이도다완’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이 사발을 아인 (亞人) 박종환님이 걸림이 없다는 뜻에서 ‘무애(無碍)사발’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 조선의 명품 찻사발 또한 자연주의 적 정신을 담아내던 그릇이였다./ 변희석 기자

미국 클리블랜드 박물관(미국내 두번째 규모이고 동양 예술로는 첫째가는 박물관) 관장을 지낸 셔먼 리(Sherman Lee, 관장 재임기간 1952 - 1983년)박사는 우리 찻사발을 중국과 일본의 찻사발과 비교하면서 그 무위자연주의적 특징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한국 다완은 자연스럽고 순박한 민중들의 요구에 맞도록 신속하고 간단하게 만들어졌다고 본다. 한국인들에게는 고려 청자에서도 보여 주었듯이, 중국 다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모든 요소에 있어서 완전성(everything perfection)이 있어야 한다는 바탕에 우려하지 않는 전통이 있는 것 같다. 한국 다완에는 "접근의 자유(Freedom of approach)"랄까, ‘생긴대로 그대로 둔다(let things happen)"라는 저변이 깔려있다. 완전성을 우려치 않고 변형을 수긍(acceptance of accidence)하는 한국 다완의 기질(quality)에는 분명히 사실적인 그 무엇이 존재한다. 일본 다완은 이러한 한국 다완의 자연스런 ‘변형의 수긍’에 영향을 받았지만 지나치게 왜곡 과장한 감이 없지 않다.”

찻사발에 담긴 연두빛 찻물은 그 속에 차의 정취가 솔바람 소리, 물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있다. 그릇이 갖는 본래의 기능 속에 이런 차라는 자연의 풍정이 보태어질 때, 그 그릇은 비 로소 완전한 예술품으로서 생명을 얻고, 이것에 담긴 차는 인간이 마시는 녹색의 보석이 된다. 그리고 다인은 이 한잔에 담긴 차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엔트로피의 미

■엔트로피(entropy)란

찻사발의 자연주의 미학은 다른 말로 엔트로피의 미학이다. 엔트로피는 ‘여러 형태의 에너 지가 관계되는 제 현상’을 설명하는 열역학 제2법칙에 해당하는 물리학 용어다.

열역학 제2 법칙인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찻사 발의 미학에 원용(援用)할 만하다. 차를 마시는 일은 우주의 살림살이를 이해 하려는 노력 의 일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엔트로피는 ‘어떤 시스템의 무질서의 정도를 나타내는 척 도’로 정의되지만, ‘무질서’ 또는 ‘덜 유용한 것’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에너지는 항상 질서(쓸모있는 상태)에서 무질서(덜 쓸모있는 상 태)로 변화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법칙이다. 따라서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말은 ‘무질서의 도(度)가 높아진다’ 또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유용성이 떨어진다’ 라는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듯 하다.

▲ 찻사발의 자연주의 미학은 다른 말로 엔트로피의 미학이다. 언젠가는 이 찻사발도 자연의 흙으로 돌아간다. / 변희석 기자

■질서의 고향은 무질서

우리가 석탄이나 가스를 태우면 그 속에 들어 있는 고농도의 에너지는 열로 바뀌어 대기 중으로 흩어지는데, 이 열이 다시 모여 본래의 석탄이나 가스, 즉 질서나 유용한 상태로 되돌아 가지는 않는다.

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열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에너지가 관계 되는 모든 현상을 지배한다. 이때 인간의 눈으로 보는 무질서는 자연의 입장에서는 자유를 의미한다. 모든 질서 있는 것들의 고향은 무질서다. 그리고 무질서로 회귀하려는 사물의 몸 짓을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

생명현상의 최고 질서체계를 갖추고 있는 인간조차도 늙고 마침내는 죽음을 맞이한다. 인 간의 노화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는 과정이고 죽음은 무질서의 완성에 불과하다.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제약, 구속, 형식, 틀, 전통 등은 인간이 만들어낸 그 시 대의 사회 체계이며 질서다.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깬다는 점에서는 무질서)이 또다시 새로운 문명과 문화를 일으킨다.

■자연스럽다는 것

자연스럽다는 것이 왜 좋은가에 답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연스러운 것에 대한 ‘친숙의 감정’과 ‘좋다 또는 편안하다는 의식’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잠재 되어 있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대한 무의식적인 순응 반응이다. 이 반응은 모든 존재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우주의 보편적 원리인 엔트로피의 법칙을 인식하는 무의식이다. 또한 무질서라는 존재의 고향에 대한 회귀 본능의 내재적 감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인간 또한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 또 하나의 작은 우주이기 때문이다.


▲ 박물관에 전시된 찻사발을 감상하는 차인들… 옛 찻사발을 자주 접하면 자신만의 안목을 갖는데 도움이 된다. / 변희석 기자

■자연스러운 것은 왜 좋은가?

우리의 삶을 둘러보면 엔트로피 법칙이 보여주는 예로 가득 차 있다. 방을 어질러 놓기는 쉬워도 스스로 정돈되지는 않는다. 시계를 분해하기는 쉬워도 스스로 다시 조립되지는 않 는다. 이같은 예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동하는 시간의 방향성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러한 엔트로피의 개념들을 통해 우리가 찻사발을 감상할때 막연히 ‘자연스럽고 작위성이 없는 것이 좋다’ 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왜 자연스러운 것이 좋은가? 왜 작위성이 없는 것이 좋은가? 에 대한 대답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본능적으로 사람들은 자연스런 것이 좋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왜 자연스런 것이 좋은가’ 라고 질문하지는 않는다. 이 장에서는 자연스런 것이 왜 좋은가에 대한 고찰과 찻사발의 미학에 따라붙는 자연주의에 대한 의미 를 알아 보려고 한다.

■존재의 본질은 자유

우주의 본질이 운동과 변화라고 한다면 이는 에너지가 형태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 하는 모든 것들의 속성은 자유를 지향하고 있다. 높은 산도 언제인가는 자신을 허물어 뜨려 평원의 자유에 안기기를 꿈꾼다. 공들여 쌓아 놓은 장엄한 탑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인간의 의지로 구축된 질서를 깨뜨리고 지면으로 내려와 편안한 자세로 무질서의 자유를 누 리게 되기를 원한다.

오래된 사원의 폐허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주춧돌이나 탑석, 신전에 외롭게 서있는 돌기 둥 등을 볼때 인간의 입장에서는 황량한 폐허가 주는 무상감에 젖겠지만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질서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모습이다.

인간이 그것들을 모아 다시 쌓아 올려 질서를 부여하지 않는 한 그들은 무질서로 향하는 자유를 계속 향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이전의 질서 있는 모습으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다시 말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에너지가 모습을 바꿀 때 질서 상태에서 무질서 상태로만 이동할 뿐 스스로 질서상태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 장작가마 1200도의 고온에서 찻사발은 탄생하여 차인들로 인해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 변희석 기자

■흙맛과 원형(原形)을 지향하는 변화의 미

일방적으로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해 가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떠올리며 찻사발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원형(圓形)이면서 정원형이 아닌 입(구연부), 가끔은 속살이 들어나 보이는 완 전하지 못한 유약씌움[施釉], 차심이 들어가 있는 빙열이나 비샘 자국, 완전히 녹지 않은 반자화된 태토, 굽 안의 불규칙적인 소용돌이 모양과 덜익고 들떠 있는 듯한 유약, 겉울과 안울 표면에 불길이 지나간 흔적에 따른 색상의 변화 등은 완전에 대한 불완전, 질서에 대한 무질서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찻사발의 몸에서 발견 할 수 있는 ‘일부러 흔적을 남기지 않은 흔적’ 즉 무위(無爲)의 흔적들이기도 하다.

찻사발의 이런 모습들은 찻사발의 원래의 고향인 자연상태의 흙을 떠올리게 하고 이런 느 낌을 우리는 흙맛이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흙맛은 질서의 형태인 찻사발로부터 무질서 상태였던 흙을 느끼게 하는 감성이고 무질서의 원형(原形)에서 느껴지는 ‘불완전에 대한 미 의식’이다. 찻사발의 흙맛과 사발 몸의 변화에 대한 다인들의 미학적 호감은 항상 본디 모습[原形]을 지향하는 사물의 본질에 대한 무의식적 이해이며 본질회귀의 향수라고 말할 수 있다.

정동주님은 ‘불의 지문’이라는 소설에서 이도다완의 미학을 설명하는 가운데 인간의 참모습 을 형체에 집착하지 않는 변화의 의미 속에서 찾고 있다.

"변화는 그 자체가 태초이자 종말이지만 계속되기 때문에 태초도 종말도 따로 느껴지지 않지요. ....형체를 지닌 모든것은 변합니다. 우주 자체가 변화를 설법하는 진리거든요. 인간 에게서 변화는 곧 슬픔으로 표현되기도 하지요. 헤어지는 것을 말하니까요. 인간의 참모습은 변화를 절실하게 깨닫고 형체에 집착하지 않으려는 데 있는지도 모르지요. 형체는 만남이라 는 단계와 이별이라는 단계로 구성되는데 시간과 장소에 따라 끝없이 변화된 형체로 만남 과 이별이 반복된다고 봅니다. 그게 슬픔이지요. 슬픔은 인간의 참마음이며 이도차완은 그런 인간의 마음이 투영된 그릇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찻사발로부터 배우는 자유의 미학

‘흙맛과 자연스런 변화미’를 갖춘 찻사발은 곧잘 우리를 명상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 그것 은 단지 미의식의 각성 뿐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숙고하게 한다.


▲ 정호다완(井戶茶碗) 찻사발의 당당한 모습 . 묵전요 김태한 作 / 변희석 기자

세월이 인성을 바꾸듯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발 또한 변화해 간다. 다인은 변화하는 사발 모습에서 엔트로피 의 증가를 보고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얻을 수 있다. 이때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한국미의 이해」라는 책에서 김영기님은 ‘현상계의 무상함과 그 배후에 깃든 어떤 영원 한 숨결을 깨달아 삶의 자유를 새롭게 자각하고 발견하는 일’이라고 했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은 생성이라는 질서에서 소멸이라는 무질서로 이동해 가는 변화와 운동의 경험 이라고 말할 수있다. 세월은 인간의 자기완성 과정에서 필요한 질서에 대한 삭힘의 과정이고 따라서 무질서로 가는 것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결이 삭는다는 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뜻이고 결이 삭은 사람은 언제인가는 무질서로 회귀하는 인간의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 온갖 고통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생을 영위하게 된다. 이렇게 세월 속에서 삶을 가로막고 있는 괴로움, 슬픔, 홀로감과 외로움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도록 인생의 결을 삭혀야 한다는 것과 결이 삭아 본래의 원형(原形)으로 돌아가려 것이 사물의 본성(자유)이라는 것을 찻사발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생사마저 뛰어 넘고 희, 로, 애, 락의 감정에도 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의 삶을 희구한다. 엔트 로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찻사발의 미학은 바로 자유의 미학이다. 그리고 찻사발의 엔트로피의 미학은 다인들에게 근원으로서의 자유의 의미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찻그릇에 따라 달라지는 차맛

차맛의 구성

녹차의 맛은 떫은 맛, 단 맛, 쓴 맛, 감칠 맛 등이 적절히 조화돼있다. 떫은 맛은 카테킨류 (類)의 성분이 내고, 단맛은 유리당류(遊離糖類), 쓴맛은 카페인, 감칠맛은 주로 데아닌과 구루타민산 등의 아미노산 맛이다. 녹차는 쓴 맛과 떫은 맛을 중심으로 여기에 감칠 맛과 단 맛으로 구성되어 있다.

좋은 맛을 내기 위해서는 본래 녹차가 가지고 있는 맛의 구성 범위 내에서 조화되어 있어야하고, 또 알맞은 농도를 필요로 한다. 보통 고급차에는 감칠 맛을 내는 아미노산(데아닌, 구루타민산)이나 카페인이 많고, 하급차에는 유리당류가 많은 경향이 있다. 고급차이든 하급차이든 그속에 함유된 떫은 맛을 내는 카테킨의 양은 별 차이가 없다.


차맛 변화의 요인

차의 맛은 똑같은 성분의 같은 차라고 해도 담는 그릇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도 한다. 도자기가 아닌 금이나 은 등의 금속이나 플라스틱 또는 음용 종이 등으로 만든 잔으로 차를 마셔보면 도자기 잔을 사용했을 때와 차맛이 다른 것을 곧 알 수 있다. 이런 맛의 차이는 첫째는 도자기로 만든 다기에서 발생하는 원적외선 때문이고 두번째는 다기의 광물질 성분이 물에 녹아 나온 차의 성분과 만나 일으키는 화학 반응이 그 원인이다.

▲ 돌확을 이용한 찻자리. 여름 시원함이 한잔의 찻잔에 담겨 있는 듯하다./ 변희석 기자


원적외선이란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광선을 가시광선(可視光線)이라고 한다. 이 가시광선 중에 파장 이 가장 짧은 광선은 보라색 광선이고 가장 긴 광선은 적색 광선이다.

그러나 우리 눈으로 는 볼 수 없는 더 긴 파장의 적색 광선이 있다.

이 같은 장파장가운데 눈으로 볼 수 없는 불가시(不可視) 광선을 적외선이라 한다. 적외선은 파장 길이의 긴 순서에 따라 근적외선, 적외선, 원적외선으로 나뉜다.

그 가운데 25 마이크로 미터 이상의 긴 파장의 광선을 원적외선(遠赤外線)이라고 한다. 원적외선은 열을 많이 내는 전자기파의 일종으로 열선(熱線)이라고 하며 몇 가지 특별한 성질이 있다.

▲ 비온 뒤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맛을 변화시키는 원적외선과 분자운동

도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광물 성분은 일반적으로 다른 물질에 비해 더 많은 원적외선을 낸다. 또 같은 물질이라도 원적외선의 방사량은 온도와 깊은 관계가 있다. 상온(常溫)에서 내는 원적외선의 방사량은 매우 적다. 그러나 물질의 온도가 높아지면 그 양이 증가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따라서 광물성 점토로 만든 도자기 그릇에 차를 넣고 더운물을 부으면 뜨거워진 다기는 더 많은 원적외선을 방사한다.

바위같은 무생물이나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거나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물질의 분자는 고유의 진동 운동을 하고 있다. 도자기 다기에서 방사된 원적외선 또한 파장이라는 진동이다. 이 원적외선의 파장이 찻물(물에 차의 여러가지 성분이 녹아 있는 상태)분자의 진동에 흡수된다. 원적외선의 파장이 찻물을 구성하고 있는 각 성분 분자의 진동과 합쳐서 공명하고 이 공명(共鳴)이 더 큰 공진(共振)운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것이 찻물을 활성화시킨다. 이 분자들의 공명(共鳴)과 공진(共振)운동이 차맛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 도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광물 성분은 일반적으로 다른 물질에 비해 더 많은 원적외선을 낸다. / 변희석 기자


맛을 바꾸는 원적외선의 수화성(水和性)

빛은 파장이 짧으면 잘 반사되고 파장이 길수록 물질에 잘 흡수되는 성질이 있다. 물질에 잘 흡수된다는 것은 어떤 물질에 깊이 침투된다는 뜻이다. 적외선의 주파수는 물질을 구성 하고 있는 분자의 고유 진동수와 거의 같기 때문에 물질에 부딪치면 잘 흡수되어 공명하는 성질이 있다. 이 공명현상으로 진동이 점점 증폭하게 되어 공진(共振)을 일으킨다. 이때 증 폭된 진동에너지 중 일부는 열로 변하고 일부는 분자운동을 활성화시키는 활성에너지로 작 용하게 된다. 특히 원적외선은 찻물 같은 유기화합물 분자에 대한 공명 및 공진 작용이 커 서 수화성(水和性)을 높이게 된다. 수화성이 높다는 것은 물의 분자와 차를 구성하는 각종 성분의 분자가 짧은 시간 내에 고루 잘 섞이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이유로 차맛과 물맛이 겉돌지 않아 차맛이 부드럽고 조화로워진다.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원적외선

자갈 위에 구운 고구마는 타지 않으면서 구수한 맛이 난다. 자갈이 뜨거워지면 자갈로부터 침투력이 강한 원적외선이 많이 나와서 고구마의 겉과 속이 동시에 같이 익기 때문에 타지 않고 맛을 좋게 한다. 일반 불로 고구마의 속까지 익히려면 겉이 먼저 많이 타게 되므로 자갈이 내는 원적외선의 열과 침투력을 이용한 것이다. 이때 열은 고구마 속 40-50 미리 정도까지 전달된다. 요즘에 쓰는 전자렌지도 마찬가지 원리를 이용한것이다.

이런 원적외선의 성질은 우리 몸으로 직접 느껴 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이 30도의 물 속에 들어가 있으면 따뜻하다는 느낌을 거의 못 느낀다. 그러나 같은 온도의 햇볕을 쐬 고 있으면 따스함을 느낀다. 그 이유는 물은 몸 표면만 덥게 하지만 햇볕 속의 원적외선은 피부 깊숙이 침투하여 열을 내기 때문이다.

다기와 찻물과의 화학반응도 맛을 바꾼다

원적외선 외에 차맛을 변화시키는 다른 원인으로는 다기의 태토에 함유된 광물질 성분과 물에 녹아 나온 찻잎의 성분들이 일으키는 화학 반응이 있다. 은수저가 계란의 노른자와 접촉하면 순간적으로 검게 변하듯이 다기에 찻물이 담겨도 매우 빠른 화학적 반응이 일어난다. 도자기와 찻물과의 화학반응은 찻물이 유약의 빙열을 통해 태토에 잘 스미는 기공이 발달한 도질자기(陶質磁器) 경우에 더 현저하게 나타나고 차맛의 변화 또한 크다.

그러나 청자와 백자는 태토가 치밀하게 자화(완전히 녹은 상태)되어 있어 찻물이 스미지 않는다. 다만 유약의 유리질과 찻물이 화학 반응을 일으킬 뿐이다. 따라서 원적외선의 효과를 제외하고 화학반응 효과로만 말한다면 청자나 백자의 경우 차맛이 우리가 느낄 만큼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차맛은 찻잎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각 성분 분자의 떨림[振動]과 도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광물 성분의 각 분자의 떨림 그리고 원적외선 파장의 떨림이 같이 떨면서[共鳴] 울림[共振]이라는 대합창이 만들어 내는 맛의 교향악이다.

차에 따라 다기 골라쓰기

다관의 경우, 안에 유약을 바른 것보다는 바르지 않은 것이 태토와 찻물이 직접 반응하므로 맛을 더 순하게 만든다. 또한 태토에 함유된 광물의 구성 성분에 따라서도 그 영향이 달라진다. 그러나 차맛이 순하고 부드러워 진다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고급 녹차처럼 맛이 섬세하고 담백한 차는 그 맛이 너무 순해지면 싱거워지고 자칫 미묘한 본연의 풍미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의 특성에 따라 알맞는 다관을 선택해 사용하는 것도 차 생활의 지혜 일 수 있다. 화학적 변화 측면에서 볼 때 청자나 백자다기는 기공이 없어 비교적 차맛에 영향을 덜 주므로 고급 녹차를 마실 때 사용하면 좋다. 또한 보온성이 떨어져 찻물이 빨리 식으므로 여름에 쓰도록 한다.

다공성의 도질 자기로 만든 다기는 맛이 강한 발효차나 맛이 덜한 하급 녹차류를 우려도 풍미가 좋아진다. 그리고 보온성이 좋으므로 겨울에 사용하기에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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