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실리콘밸리 방갈로르
누가 믿었을까. 지난 1980년대 중반 인도가 IT 강국으로 도약하겠다고 청사진을 내놓았을 때만 해도 대부분 의 외국인들은 코웃음을 쳤다. 1루피(24원)만 달라고 시도 때도 없이 매달리는 거지들. 주택가는 물론 도로 에 큰대자로 태평하게 누워 있는 소 떼 따위가 인도의 상징인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20년도 안돼 10억 인구의 이 나라가 ‘소프트웨어=인도’라는, 세계가 인정하는 공식을 만들어 냈다. 방갈르로가 수도인 인도 카르나타카 주의 S.M. 코리슈나 주총리는 “미국에 실리콘밸리가 있다면 인도에는 실리콘스테이트가 있다”는 말로 21세기 인도의 비전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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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새로운 얼굴
뉴델리에서 비행기로 2시간 30분 거리인 방갈로르는 해발 920m의 데칸고원에 위치해 연평균 25도의 온화 한 날씨를 보유하고 있다. 델리나 뭄바이, 하이데라바드, 푸네 등과 같은 IT 거점도시는 몬순 기간에 폭 우로 몸살을 앓지만 방갈로르는 비도 비교적 얌전하게(?) 내린다. 그것도 대부분 늦은 밤에만 내리니 낮 활동에 별 지장이 없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서면 우선 최신식 건물들과 잘 닦여진 도로가 눈에 들어온다. 수도 델리의 낡은 건 물과 차선 없는 도로에 익숙해진 이방인들에게는 오히려 낯선 풍경이다. 중앙분리대에는 IBM과 모토로라 , 인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등 다국적 회사들의 간판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어 첨단의 분위기를 연출한 다.
서울 거리가 한집 건너 술집과 음식점이라면 방갈로르는 한집 건너 IT 회사다. 업체들은 야자수와 잔디 밭으로 가꿔진 녹지를 정원처럼 끼고 늘어섰다. 방갈로르의 IT 산업은 도시 전체의 이미지도 바꾸고 있다. 인디나나가르의 TGI 프라이데이나 엠지로드의 에스프레소 카페에서는 인도인의 평균 한 달 식비에 달하는 돈으로 한 끼 식사를 하고 하루 식비보다 비싼 값으로 카푸치노를 마신다. 젊은이들은 휴대폰으로 끊 임없이 통화하거나 팝송에 연신 몸을 흔들어댄다.
사실 비즈니스가 아닌 여행지로서 인도를 원한다면 방갈로르는 그리 좋은 목적지가 아니다. 방갈로르는 21세기형 인도의 얼굴이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인도답지 않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 도의 기적은 방갈로르가 만들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갈로르는 인도 전체 소프트웨어 수출액 의 55%를 담당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10대 도시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아웃소싱의 블랙홀
수십여 명의 중소기업 수준 소프트웨어 서비스 회사를 포함해 1천200여 개의 IT 회사가 포진한 방갈로 르는 가히 IT 업체의 숲이라 불릴 만하다. 방갈로르 내에 10만여 명의 IT 전문 엔지니어가 근무중이고 BPO(특정업무 아웃소싱) 센터를 위주로 관련 업종의 종사자는 20만 명에 이른다.
한국의 테허란밸리가 연장 4km, 폭 500m 구간에 형성돼 있고 대덕밸리가 4.2km2의 면적을 보유하고 있 다면 미국 실리콘밸리는 연장 48km, 폭 18km, 864km2에 조성된 지식정보산업의 집적지다. 그러나 방갈 로르는 그러한 실리콘밸리보다 무려 두 배 반이 크고, 서울의 테헤란과 대덕밸리를 합쳐놓은 것보다는 수백 배나 더 크다.
방갈로르는 지난 1991년 인도정부가 소프트웨어 기술단지(STP)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성장의 전 환점을 맞았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전기공급이 중단되는 전력사정과 10% 미만의 전화보급률 등 열악한 기업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자체 발전설비와 무선데이터 전송설비 등 기반시설을 구축한 것이다.
방갈로르에는 현재 세계 유수의 100개 IT 기업들이 운영하는 연구소와 콜센터가 있고 Y2K(컴퓨터 2000년 연도인식 오류문제) 해결 프로그램을 내놓아 각광받은 인도의 나스닥 상장기업 인포시스, 한국의 삼성 SDS, LG소프트 등 900여 개의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밀집해 있다. 인도는 현재 세계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미국에 이어 2위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 소프트웨 어 엔지니어링협회가 이 분야의 최고 기술수준에만 부여하는 ‘SEI-CAM5’ 등급을 받은 기업이 세계적으 로 12개 사에 불과한데 그 중 절반이 인도 기업이다.
한때 많은 인도인들이 실리콘밸리로 갔지만 이제 그곳에서 성공한 인도인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카라 타나카 주정부의 지텐드라 싱 차관은 “귀향하는 인도인뿐 아니라 인도의 IT 인적자원을 활용하려는 해 외자본의 직접투자(FDI)로 일주일에 서너 건의 신규창업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한다. FDI에 의한 회사설립은 곧 현지인력의 고용창출로 이어진다. 방갈로르 일간지에 보이는 구인인 광고면 의 90%가 IT 관련 구인광고다. 지금 이 시간에도 방갈로르 공항에는 새로운 외국기업 직원들이 트랩을 분주하게 오르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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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방갈로르인가
방갈로르가 외국계 기업의 진출이 활발하고 정보통신 분야에 강점을 보이는 이유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 원정책과 저임금의 고급노동력, 영어구사 능력 등을 들 수 있다.
우선 인도 정부는 컴퓨터가 널리 알려 지기 전인 지난 1986년 소프트웨어 산업의 잠재력을 파악, 소프트웨어 개발청을 신설했다. 이후 방갈로 르와 하이데라바드 등 12곳에 STP를 조성해 소프트웨어 기업육성을 도모했다. 또 외자유치와 함께 정보 기술부를 세우고 ‘서버법’을 제정하는 등 제도적으로 소프트웨어 육성책을 펴왔다.
이에 따라 IBM과 시스코 등 세계적 IT 기업이 소프트웨어 개발센터를 설립하기 시작했으며, 인도 소프트 웨어 업체들은 외국기업과 함께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선진 IT 기술을 익혀갈 수 있었다. 인도에서는 또 소프트웨어 인력만 매년 1천800여 공과대학에서 7만여 명이 배출된다. 인도의 대표적 엘 리트 교육기관인 6개의 인도공과대학(IIT)은 MS나 IBM 등으로부터 미국을 제외하고 전 세계에서 장학금 을 가장 많이 받는 대학이다. 이처럼 뛰어난 능력을 자랑하지만 이들의 임금은 선진국의 20% 정도 밖에 안 된다.
영어가 공용어이기 때문에 외국에서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자가 많다는 점도 인도의 강점이다. 임 금은 싸지만 말이 잘 안 통하는 다른 아시아 국가와 인도는 이 부분에서 분명히 다르다. 인도인들은 미 국이나 유럽기업들이 영어로 컴퓨터 프로그램의 주문사양을 보내면 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주문 내용대 로 제품을 만들어 보낸다. 그러나 진정한 성공비결은 “정부조직 가운데 ISO 9000 인증을 받은 곳은 세계에서 우리밖에 없다”는 나이드루 방갈로르 STP 소장의 한 마디에 응축돼 있다. 방갈로르 STP 전체 직원은 90명에 불과하다. 하 지만 기반시설 관리에서 인허가 업무, 시장조사, 입주 및 창업상담에 이르기까지 기업이 필요로 하는 모든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난 91년 13개에 불과했던 기술단지 입주업체는 현재 92개의 다국적 기업을 포함해 346개로 불었다. M S나 인텔, 소니 등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이 선정한 1천대 기업 중 절반 정도가 방갈로르에서 아웃소싱을 하고 있으며, 이는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다만 방갈로르의 IT 산업이 통신이나 컴퓨터, 인터넷 등 하드웨어 기반 없이 소프트웨어만 기형적으로 성장했고, 소프트웨어 산업도 자체 제품의 개발보다는 외부 수요에 따른 하청형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 다는 점은 근본적인 한계로 지적된다.
문제점과 전망
방갈로르에도 아킬레스건은 존재한다. 우선은 고비용이 가장 큰 문제다. 기반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도시가 갑자기 급성장하다 보니 전기가 수시로 나가고 출퇴근에 몇 시간씩 걸리기도 한 다.
호텔이나 공항, 국제회의장 시설도 아직 국제적 수준에는 미달이다. 따라서 ‘시간=돈’인 방갈로르에서 낙후된 사회시설은 생산비용의 급속한 증가를 야기하고 있다. 프로그래머들의 봉급이 매년 20~25%씩 상 승하면서 비용이 커지는 것도 기업의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다.
이 같은 문제점으로 세계적 소프트웨어 회사인 위프로의 아짐 프렘지 최고경영자는 지난해 7월 인프라 개선을 위한 조치가 서둘러 마련되지 않으면 본사를 이전하겠다고 경고했다. 또 인도 최고의 여성 부호 이자 BT(생명공학) 업체 바이오콘의 사장인 키란 쇼-마줌더도 카르나타카가 아닌 다른 주에서 회사확장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해 주정부를 바짝 긴장시킨 바 있다. 이에 주정부는 부랴부랴 교통난 해소를 위해 시내 중심부와 외곽(전자시)을 연결하는 총 연장 9km의 유료 고가도로를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각종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방갈로르의 강점은 여전히 만만찮다. 법인세와 장비구입세가 각각 1 0년과 5년씩, 전기세와 연료세는 영구히 면제되는 점은 다른 지역에서 누릴 수 없는 매력적 인센티브다. 게다가 ‘집중의 경제학’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방갈로르에는 200개의 글로벌 기업이 한곳에 몰려 있는 덕분에 연구ㆍ개발ㆍ판매가 원스톱으로 이뤄지고 있다. 시장규모가 125억 달러인 인도 소프트웨 어 산업의 종사자 80만 명 가운데 33%가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고, 카르나타카 주 국내총생산(GDP)의 60 %를 차지하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다.
정규득 뉴델리 특파원 | wolf85@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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