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시고 세상 사람과 구별해서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고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각자 예수 믿은 동기도 다르고 믿게 된 과정도 다양하지만, 동일한 것이 있다면 배후에 우리를 불러내신 하나님의 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도요타 자동차는 세계 3위의 자동차 생산회사입니다. 43%의 시장 점유율을 자랑하던 도요타는 95년경에 점유율 37%까지 떨어지고 대부분의 재무수치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원인을 진단해본 결과, 당시에 암처럼 번져가고 있었던 “일본식 대기업병” 때문이었습니다.
사원들 모두가 충성스럽기는 했지만 단지 “회사를 위하여”라는 막연한 기치 아래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단순한 충성심만을 가지고 획일적으로 움직여가던 이 회사의 조직이 “New Office Way 21 운동”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변화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나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를 바꾸고 주위를 바꾼다.” 였습니다.
도요타가 경험한 것과 신앙생활도 유사한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주변의 환경과 상황이 변화를 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마치 정통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어갈 때 미래의 비전을 현실화시킬 수 있습니다. 변화를 꿈꾼다! 여기서, 지금부터, 작은 것부터, 나부터 우리가 변화를 위한 꿈을 가져야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쉬지 않고 흘러가고 있습니다. 흘러감은 모든 것이 변화함을 뜻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없어짐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항상 새로운 상황에 던져지고 있습니다. 어제의 행위나 원리에 오늘의 삶을 매어둘 수 없습니다. 변화의 주체가 될 때 비로소 급변하는 시대를 자신 있게 헤쳐나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열매라고 여겨지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교회의 각종 사역에 참여하는 자세입니다. 쉽게 말해서, 성도들이 교회의 각종 사역에 적극적으로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건강한 교회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교회 내 사역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적극적이지도 즐겁지도 않은 교회들은 대부분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있거나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역동적이지 않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인격이 성장하고 성숙해질수록 교회의 각종 사역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의 모습 속에는 이런 책임감이 곡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책임감 보다는 의무감으로 사역에 동참하고, 섬김의 자세보다는 어떤 권위나 지위를 가진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오해와 곡해의 또 다른 극단적인 태도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은 집사나 장로와 같이 직분을 받거나 교역자나 직원들처럼 사례를 받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지만 교회의 사역에 전혀 동참하지 않는 성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제지공장을 견학한 적이 있습니다. 안내원은 종이제조 과정이 시작되는 곳으로 나를 인도해 주었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더러운 진흙투성이 통나무들이 커다란 기계 속으로 들어가고 그 속에서 날카롭고 육중한 톱니바퀴에 쪼개지고 잘게 잘려지는 것들을 보았습니다.
나는 또 이 기계 속으로부터 냄새 지독한 액체가 흘러나오는 것과 종이제조과정에 있는 커다란 통에서 또 다른 액체가 흐르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액체는 계속 흘러나오는데 이 유출 액속에 여러 가지 화공약품을 가미하자 곧 이 유출 액은 더욱 더 흰색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불결한 것들이 깨끗해졌고 액체는 응결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과정에서 막기 돌기가 회전하고 있었는데, 매끄럽고 흰 빛깔의 종이가 만들어져 나왔습니다. 과학이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물질은 옛것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인 조화로 인하여 낡고 더러웠던 통나무가 변하여 세계 전역에 산재한 뉴스를 보도하고, 사무를 기록하고 사랑의 편지를 전달하고 시와 산문을 써서 수천 마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데 사용되는 흰 용지가 된 것입니다. 중생(거듭남)도 이와 똑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변화되어야지!’라고 굳게 결심해 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변화되지 못합니까? 그것은 게으름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매일 그 모습으로, 아니 점점 더 후퇴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일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 내가 지금부터 변화되겠습니다.’ 하는 새로운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일은 변화하는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변화의 챔피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축복은 목자와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고 시간이 지날수록 영혼이 살지고, 지경이 넓혀지고, 비전이 구체화되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10년,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초대형 교회의 하나의 부품 같은 역할만 하고, 여전히 여왕벌을 섬기는 일벌의 위치에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물론 음지에서 제 역할을 하는 작은 부속이나 일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에 삶의 의미와 보람을 먹고 성장해야 합니다. ‘작은 것도 가치 있게 보는 것’과 ‘작은 존재로만 머물러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사장시키지 말고 영향력이 커지고 비전의 주체가 되는 꿈을 꾸십시오.
이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거룩한 신분상승의 꿈과 인물이 되는 삶을 추구하십시오, 교회와 교인의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힘과 지위와 물질을 거룩한 일에 잘 쓰면 신분상승과 경제적 축복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물질과 지위가 있어도 겸손하게 섬김의 자리에 서고 선교와 구제에 힘쓰면 그것이 얼마나 복된 모습입니까? 그 모습에 사람들이 머리를 숙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가치 없게 보여도 하나님 안에서 가치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회를 보면 때로는 연약해 보이는 사람들이 더 큰 역할을 합니다. 여자들이 겉으로는 약해보이지만 가정과 교회의 수많은 일들이 여성 중심으로 이뤄집니다. 연로하신 분들도 겉으로 보기에는 힘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회에 얼마나 큰 힘이 됩니까? 교회에서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 군단’은 몇 가지 탁월한 장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이 문제입니다. 새해에는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과 시간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속하여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지 마시고 교회의 여러 가지 사역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면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분의 제자가 되는 복된 새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삶의 주체가 나에게서 예수님으로 주체가 바뀐 사람은 하나님께 큰 위로를 받은 사람이며 이 고달픈 세상에 사는 많은 이들에게 위로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삶의 주체를 나에게서 예수님으로 바꾼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선 ‘아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기득권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이 되셨습니다.<빌립보서 2장 5~7절>
♬ 하나님을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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