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와 한국의 관 뚜껑 | ||||||||||||||||||||||||
‘국가와 죽음’에 관한 세 개의 텍스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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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내내 우리는 죽음과 동행 중이다. 그 죽음의 행렬 중심에 노무현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의 만장이 서 있고 그 주위에 용산 철거민과 쌍용차 노동자들, 그리고 화물연대 박종태 등 적절한 애도조차 받지 못해 더욱 비통한 죽음들이 놓여 있으며, 최진실·장자연 같은 유명 연예인들의 갑작스런 자살 소식도 끼어 있다. 지난해 자살자 수가 급증해 자그마치 1만3천 명에 육박하고 20·30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소식까지 겹쳐놓으면 2009년 대한민국 국민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화두는 ‘죽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라 전체가 장례식장 분위기다. 어쩌면 그 이상으로 심각한지도 모른다. 1.19명으로 이미 세계 최하위를 기록 중인 출산율도 영점대를 향해 곤두박질치는 중이라고 하지 않는가. ‘출산파업’을 넘어 ‘민족의 집단자살’이라고까지 할 만한 이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젊은 세대들이 미래의 생명들을 가로막으며 이렇게 외치는 것처럼 들린다. “여기는 무덤이야. 관 속으로 들어오지 마!” 문득 지난해 촛불시위 때, 준법과 질서를 외쳐대던 정권을 향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한 신부가 내뱉은 일갈이 떠오른다. “너희들은 묘지의 평화를 원하는가?” 그렇다, 지금 대한민국은 바로 그 무덤의 평화를 성취해가는 중인 것 같다. 이 흐린 날들을 견디려면, 이성복의 시 한 구절처럼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데 세상은, 혹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의 생명을 봉인하는 관 뚜껑이 된 것일까?
‘국가와 죽음’ 세 개의 텍스트 올여름 우리 앞에는 ‘국가와 죽음’이라는 문제를 성찰해볼 기회를 제공하는 세 개의 텍스트가 도착했다. 리잉 감독의 다큐멘터리 <야스쿠니>, 인사동 평화공간에서 열린 홍성담의 ‘야스쿠니의 미망(迷妄)’전 그리고 조용래의 신간 <천황제 코드>가 그것들이다. 거듭되는 죽음의 행렬들로 워낙 경황이 없던 탓인지, 남의 나라 얘기일 뿐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21세기적 한-일 관계’를 위해 과거사를 깡그리 망각하기로 작심한 정권이 들어선 탓인지 알 수 없지만, 세 개의 텍스트 중 어느 것도 특별한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야스쿠니’라는 저 낡아빠진 신정국가 시대의 유물은 일본만의 얘기가 아니며, 과거사도 아니고, 우리 앞에 놓인 죽음들과 무관한 문제도 아니다. 홍성담의 풍자화 <간코쿠-야스쿠니>(韓國-靖國·사진 1)는 바로 그 점을 직설화법으로 폭로하고 있다.
그림 왼쪽 아래에 야스쿠니신사가, 오른쪽 위엔 청와대를 상징하는 듯한 기와지붕이 보인다. 둘 사이를 잇는 것은 ‘경제성장’의 신화라는 마술 빗자루를 탄 박정희, M16 소총 위에서 부처 흉내를 내는 전두환, 삽 위에 올라탄 이명박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사슬이다. 이 사슬 아래로 잘린 머리와 해골들, 그리고 용산 참사의 불길과 특수부대 복장을 한 극우파의 손아귀에 붙들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이 보인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대표적 화가였던 홍성담은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며 과거로 역주행 중인 현 정권의 몸부림에 장난스레 가속페달을 밟아준다. 그러고는 ‘너희가 원하는 게 이거냐?’라고 반문하듯 천황과 ‘야스쿠니’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을 그려놓는다.
듣다 보면 어디서 많이 듣던 화법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가? “BBK는 내가 설립했지만, 나는 BBK와 무관하다.” “청와대 뒷산에서 많이 반성했지만, 촛불시위 주동자는 모조리 잡아넣겠다.” “대운하는 안 하겠지만, 4대강 정비는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저런 미친 화법을 구사하는 통치 세력이 쿠데타가 아니라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당선됐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부동산 시장은 안정돼야 하지만, 우리 아파트값은 올라야 한다.” “공교육과 인성교육이 강화돼 아이들이 즐겁게 학교를 다녀야 하지만, 우리 아이는 꼭 일류대에 진학해야 한다.” “양극화는 나쁘지만, 비정규직은 불가피하다.” “서민과 중산층이 잘살아야 하지만, 생존권을 위해 파업하는 노조는 빨갱이들이다.” “독재는 나쁘지만 경제를 살리자면 민주주의를 잠시 제쳐두자.” 요컨대, 군주의 악은 신민의 악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오래된 경구를 잊어선 안 되고 민주적 선거에 의해 선출된 집권층의 패악을 척결하는 과제는 우리 안의 악덕과 싸우는 문제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시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주정치에서도 공짜는 없다. 홍성담이 ‘야스쿠니’ 이데올로기를 추종해온 일본인의 역사적 대열 끄트머리에 태극기를 둘러맨 한국 젊은이를 그려놓은 것이나 청와대 뒤쪽 만장 행렬을 화폐 다발로 그려놓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가 아니었을까? 작가의 의도와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이런 생각에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하는 그림은 <천황과 히로시마 원폭>이다.
공포 퍼뜨리며 존속하는 권력 화가는 이 그림 속에 ‘만세일계’의 천황가를 상징한다는 세 가지 물건(‘삼종의 신기’)인 동경(銅鏡)·칼·곡옥(曲玉)을 동네 문방구에서 몇 푼만 주면 살 수 있는 장난감 거울, 연필 깎는 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대체해 통쾌하게 조롱하고 있다. 대체 그 따위 물건들이 무엇이기에 수천 명의 히로시마 시민이 잿더미로 변해야 했단 말인가. 그런데 문제는 관람객이 이 조그만 물건들이 다 무얼까 하고 가까이서 그림 속 거울을 들여다보는 순간에 발생한다. 천황이 들고 있는 장난감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사진 2) 여기서 우리는 국가, 권력, 종교, 죽음을 잇는 아주 현기증 나는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 거울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사회는 이 잡다한 집합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다시 말해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고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거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자기― 그것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안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동일성(identity)의 확인, 의식적인 자기 확립이야말로 자기 생을 마치 ‘대상’인 양 다루며 관리하고 또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외재적·타자적 자기의 지점이 된다. 엥겔스는 ‘국가와 종교의 본질은 인류의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이라고 말했는데 권력은 바로 그 불안에 기생하며 공포를 퍼트리면서 존속하는 무엇이다. 삶 또는 생명과 관련해 말하자면, 이 타자적 지점은 말할 것도 없이 ‘죽음’이다. 죽음은 즉자적 삶이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이며 이 죽음을 통해 비로소 삶의 경계가 주어지고, 그 한계에서 생의 매 시기와 지점들에 대한 유기적 배치, 질서화, 의미화가 가능해진다.
사태를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그 환상의 구조가 우리가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과 연대하게 만드는 힘의 구조라는 점이다. ‘나보다 더 나 같은, 내 바깥의 나’이며 ‘내가 누구인지 일러주는 나를 초월한 나’란 우리의 사랑의 대상들- 부모, 자식에서 애인을 거쳐 국가, 민족, 화폐 등에 이르는 모든 물신들- 이 지닌 공통적 속성이지 않은가. 따라서 일본 국민들이 유치한 천황 이데올로기에 속고 있다는 생각은 반만 옳은 것이다.
어떤 국민도, 어떤 인간도 그러한 오인의 함정(이데올로기적 동일시)을 건너뛰지는 못한다. 그러니 그러한 환상들을 가로질러서, 환상과 환멸에 상처받으며 절룩이면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역사란 바로 그 ‘환상 가로지르기’(traversing fantasy)의 기억이고 기록이어야 한다. 권력이 유포하는 환상에 맞서 ‘기억의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야말로 역사가의 과제이며, (환상의 창조자인) 예술가의 정치적 의무가 되는 것이다. 리잉과 홍성담이 수행하는 작업이 이러한 요청에 부응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어떻게 환상을 벗어나는가? 타자적 자기 부정이 아니라 인정을 통해, 죽음을 손쉬운 애도의 눈물로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함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반드시 거울의 환상이 깨지고 무의 캄캄한 어둠에 직면하는 혼란과 방황의 시간을 경유한다. 올해 우리가 걷고 있는 바로 이 시간들 말이다.
참된 애도는 ‘거울’을 바꾸는 작업 만약 우리가 죽음을 관리함으로써 현세적 지배를 꾀하는 ‘야스쿠니’라는 낡은 신화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또한 ‘모두가 부자 된다’는 미친 환상 아래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도심테러범’에서 ‘전라디언’ ‘좌빨’ 등의 딱지를 붙여) ‘우리가 아닌 자들’, ‘비(非)인간’으로 멸시하고 파멸로 몰아세우는 권력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고문하기를 멈추려 한다면, 한마디로 ‘권력’이라는 증상에서 벗어나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거울을 바꾸는 작업, ‘우리 바깥의, 우리를 초월한 우리’의 형상을 ‘성공하고 승리한 아름다운 자들의 무리’에서 핍박받는 자들의 얼굴과 목소리로 대체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올해 우리 곁을 떠난 이들에 대한 우리의 애도가 지닌 참된 의미를 되씹어볼 수 있으며, 죽음의 관 뚜껑을 밀어내는 생명의 힘은 바로 고통받는 타인의 영혼 속에서 발견되는 자기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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