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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매혹을 깎아낸 정면의 아름다움, '클린'의 장만옥

박영복(지호) 2005. 7. 14. 18:27

치명적 매혹을 깎아낸 정면의 아름다움, '클린'의 장만옥 
 
 


 

장만옥이 정면을 응시한다. 영화 '클린'에서 장만옥은 옆을 보는 법이 없다. 그 검고 투명한 눈빛과 마주하려니 어쩐지 낯설다. 돌이켜보면 장만옥은 언제나 옆모습으로 각인돼오지 않았는가. 아미를 숙인 모습, 광대뼈의 그늘, 가는 붓으로 그린 듯 내리깐 눈매. 정중동의 매혹으로 오랫동안 우리를 흔들던 그녀가 지금 고개를 들고 있다. 질끈 묶은 머리 아래 드러난 그녀의 맨 얼굴 윤곽처럼, 장만옥은 이제 그림자로 아른거리는 대신 적나라한 한낮의 빛 속에서 세상을 직시한다.

 

 

 

‘아름다운 보석’(曼玉)을 의미하는 장만옥의 이름처럼, 그녀의 출발은 그 환한 미모의 원석에 기댄 것이었다. 그러나 흔히들 언급하는 1983년 미스 홍콩의 경력, '폴리스 스토리' 등을 통한 스타등극은 지금의 장만옥을 말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기록이다.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조폭 애인을 따라 계단을 올라서는 '열혈남아', 사랑하는 남자을 굳이 뒤로하고 LA로 불현듯 떠나는 '첨밀밀'에서처럼, 장만옥은 넘쳐나는 홍콩영화의 봇물을 벗어나 새로운 연기영역에서 자신의 보석을 깎아내는 길을 택했다. 통통하던 볼을 세월로 깎아낸 뒤 그 광대뼈의 치명적 매혹을 드러내게 됐듯이 말이다.

 

영국, 프랑스, 홍콩의 억양을 모두 담고 있는 그녀의 영어발음은 그 태생지와 자라온 환경뿐 아니라 이렇게 변화 많은 연기여정의 항로를 대변하기도 한다. 이 연기인생의 지침을 돌려놓은 사람이 왕가위 감독이라는 사실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겠지만, 그 '화양연화'에서의 풍성하던 장식을 벗고 기름기 하나 없는 모습으로 관객 앞에 서 있는 지금의 장만옥을 보고 있노라면, 결코 한두 감독의 손길만으로로 그녀가 변한 것은 아니지 싶다.

 

 

“나는 슬픔을 피해갈 수가 없다. 끊임없이 영화 속에서 가족이 죽고, 사랑이 떠나가지 않는가.” 무수한 영화적 슬픔을 그저 연기가 아닌 몸으로 겪으면서 장만옥은 자신을 단련해왔다. 애인 뒤에서 두려운 표정을 짓던 순진한 20대 청춘은 이별 뒤에 묵묵히 웃는 법을 배웠고, 기다림과 인고의 피동태를 지나 적극적으로 세상을 꿰뚫는 '클린'의 지점까지 다다른다.


 
“여기 한 여자가 있어. 한 남자를 죽게 만든. 은빛 산을 눈에 담은.” 따라서 이런 직설어법 노래를 부르는 장만옥을 보는 관객의 등은 시릴 수밖에 없다.

 

'클린'에서 그녀는 마약을 과잉 복용한 남편이 죽자, 아들과 만나기 위해 삶을 다시 정리하는 마약중독자의 삶을 연기한다. 그러나 장만옥의 모성 연기는 흔히 빠지기 쉬운 신파적 감수성을 벗어나 있다.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되 부러지지 않는 활처럼 장만옥은 고단하지만 앞을 보고 달리는 희망을 들려준다. 그래서일 거다. 아릿한 옆모습으로만 기억돼왔던 장만옥의 정면 얼굴이 낯설지만 아름다운 것은. 감독들의 경탄 속에서 치장돼왔던 매혹의 장만옥은 없지만, 그 허물을 한겹 깎아낸 장만옥의 맨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한 진실로 말을 건다. 스쿠터를 타고 달리고, 아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음 짓는 그 정면의 얼굴에서 우리는 잊혀진 ‘직격타’의 감동을 발견하게 된다.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의 결과만으로는 다 포장해낼 수 없는 날선 진실과 정공법의 힘은 그렇게 관객에게 울림을 남긴다.

 

'클린' 이후로 잠정적 휴식을 선언한 장만옥. 부디 그 공백이 너무 길지 않기를.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내려다보며 환히 웃던 앞모습이 아련해지기 전에 그녀의 휴식도 끝나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