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설명: 제산회에서 전통체육활동을 즐기는 치앙족 남성들. 치앙족의 체육활동에는 나무심기를 숭배하는 원시적 요소가
담겨져 있다. (출처: ‘四川畵報‘ 8월호)
산골마을을 떠들썩하게 한 제산회
2000년 7월 7일 쓰촨 아빠(阿壩)치앙/티베트족자치주 마오시엔(茂縣)에는 잔잔한 고산의 공기를 깨고 수많은 인파로 북적댔다. 울긋불긋
형형색색의 전통민속복장을 걸쳐 입은 남녀노소 치앙족들로부터 먼 길을 달려온 쓰촨성 정부관리, 언론매체 보도진까지, 평소 조용했던 산골마을
마오시엔은 여느 때와 달리 분주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길레 이리 많은 사람들이 몰렸을까? 이 날은 다름아닌 제1회
'중국치앙족전산회‘(中國古羌轉山會)가 성대히 열렸기 때문이다. ’전산회’는 달리 ’제산회‘(祭山會)라고도 불리는데, 해마다 음력 6월6일 열리는
치앙족 최대의 민속행사로 이미 2000년이 넘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한 해 농가의 번성과 오곡작물의 풍요, 지역의 태평함을 기원하는 제산회는
보통 120가정으로 구성되는 치앙족의 마을공동체 자이즈(寨子)에서 산발적으로 치러졌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골과 험난한 협곡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치앙족에게 제산회는 이렇듯 단순한 마을단위의 축제로만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마오시엔 현정부가 지역경제의 활성화와 관광객 유치를 위해, 한 달 동안의 준비기간과 각 자이즈에서 뽑은 인원을 대규모로
동원하여 행사를 성대하게 치루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생존하고 있는 치앙족은 20만명이 조금 넘는다. 이들의 주요 거주지역은 쓰촨성 아빠자치주와
구이저우(貴州)성으로, 아빠자치주에만 13만명이 살고 있다. 지금은 중국 전체 13억 인구 속에서 티끌과 같은 존재로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지만, 그들은 한때 중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용맹스런 부족이었다. 치앙족이 중국역사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겼던 것은 바로
위진남북조시대. 3세기말 위-촉-오 삼국을 통일했던 진왕조는 왕족간 권력다툼과 지방호족의 등장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자신들에 대한
강압정책과 가난한 한족 유민들의 대규모 유입으로 생존을 위협받은 다섯 소수민족, 선비-흉노-저-갈 그리고 치앙족은 부패한 진에 대항하여
기병했다.
민족 존립의 위기상황에서도 지켜져
몽골/돌궐어 계통과 티베트어 계통이었던 다섯 소수민족 중 인구가 가장 적었던 치앙족은 쓰촨의 고립된 지리적 조건을 이용, 304년 지금의
청뚜에 대성(大成)을 건국했다. 동진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43년 동안 쓰촨성 일대를 지배했던 대성의 역사는, 치앙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했던 소중한 경험으로 아직도 그들 가슴속에 큰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중국에서는 이 위진남북조시대를
'오호난화‘(五胡亂華)라고도 칭하는데, 글자 그대로 다섯 오랑캐 민족이 중국에서 난리를 피웠다는 뜻이다. 여기에 “야만적인 폭군이 속출한
무질서한 난세“라고 평가절하하면서 노골적인 중화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한족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우리나라 또한 '5호16국시대'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16국이란 역사가 최홍(崔鴻)이 지은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서 유래한 것인데, 실제로 건국된 나라는
훨씬 더 많았다)
대성의 멸망이후 청대 말기까지 화중지방과 연해지방에서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한족의 이주로 인해 산간벽지로 쫓겨난 치앙족은,
오늘날에는 민족정체성을 위협받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수천년간 한족이나 티베인들과 접촉하면서 이름이나 외양, 사고방식 등은 그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졌고, 대다수 젊은이들은 한족의 생활습관과 문화양식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번 제산회 행사를 주관한 마오시엔도
다를 바 없어, 전체 10만인구 중 90%가 치앙족으로 분류되나 순수혈통을 보존하고 있는 이는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민족 존립의 기로에
놓인 치앙족이지만, 그들의 공동체적 의식을 함양하는 행사인 제산회는 지난 196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를 제외하고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철저한 준비를 통해 벌이는 제산회
해마다 제산회가 다가올 즈음이면 모든 마을에 준비모임이 결성된다. 마을 전체 주민이 참가하는 이 모임에는 모든 집마다 남자 한 명이
나서는데, 만약 집안에 변을 당했거나 임산부가 있을 경우에는 참여하지 못한다. 제산회를 주재하는 무당은 준비모임을 진행하면서 그 해 제산회의
주제와 형식을 정하고, 행사 당일 참여자들이 맡을 역할을 안배한다. 12세 이상으로 제산회에 처음 참가하는 남성은 먼저 향과 칼날, 술, 만두
등의 제물을 들고 나와 신에게 바친다. 음력 6월6일 제산제 당일이 되면, 마을주민 모두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제산회가 열리는 마당에 모여든다.
머리에 원숭이가죽 모자를 쓰고 양피로 만든 북을 든 무당이 장정들과 함께 제산회장으로 입장하면서 행사는 시작된다.
해마다 제산회가 다가올 쯤이면 모든 마을에 준비모임이 결성된다. 마을 전체 주민이 참가하는 이 모임에는 매 가호마다 남자 한 명이
나서는데, 만약 집안에 변을 당했거나 임산부가 있을 경우에는 참여를 하지 못한다. 제산회를 주재하는 무당은 준비모임을 진행하면서 그 해 제산회의
주제와 형식을 정하고, 행사 당일 참여자들이 맞을 역할을 안배한다. 만약 12세 이상으로 제산회에 처음 참가하는 남성은 먼저 향과 칼날, 술,
만두 등의 제물을 들고 나와 신에게 바치게 한다. 음력 6월 6일 제산제 당일이 되면, 마을 주민 모두는 새옷으로 모두 갈아입고 제산회가 열리는
당에 모여든다. 아침 머리에 원숭이가죽 모자를 쓰고 양피로 만든 북을 든 무당이 장정들과 함께 제산회장으로 입장하면서 행사는 시작된다.
공동체의식을 함양하는 잔치마당
무당은 먼저 각 가정에서 바친 제물을 제단에 놓으면서 신을 불러들인다. 그 후 천지개벽과 산신을 찬송하는 시가를 읊으면서 신을 맞이한다.
다시 한편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깊이 사죄하는 시가를 부르는 무당은 다른 한편으론 파란 예단으로 양의 온 몸을 만진다. 노래가 끝날쯤 되어서
무당은 끊인 물은 제물로 준비한 양과 닭의 몸에 3번씩 뿌린다. 이 때 온 마을 주민들은 큰 소리로 “신이여, 우리의 제물을 받아주소서”라고
외치는데, 그와 동시에 마을 장정은 처음 제산회에 참가한 사람이 준비한 칼로 양과 닭을 죽이게 된다. 죽인 양과 닭의 고기는 현장에서 바로 삶아
무당이 직접 매 가정에게 나누어주는데, 이 때 술 한잔을 권하며 함께 가정의 건강과 집안의 행복, 풍요한 수확을 낳길 기원하는 노래를 부른다.
모든 분배가 끝난 뒤, 무당은 향규를 선포하고 온 마을에 평온이 깃들길 축원하면서 정식행사를 마친다.
제산회 행사 가운데에는 갓 성년을 맞은 이들의 성인의식도 함께 벌어진다. 이 날부터 성인으로 인정받은 젊은이들은 이성과의 교제가
허락되는데, 일부는 제산회장에서 눈이 맞기도 한다. 일부는 이런 행운을 위해 신물을 준비했다가 행사 때 마음에 드는 상대방에게 전하는 대담성을
보인다. 제산회는 또한 이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정식행사가 끝난 뒤에는 마을 사람들 모두 제산회장에 나와 술과 노래를 즐기며 춤을 추게
된다. 일부는 갖가지 전통놀이와 체육활동을 벌이기도 하는데, 모두 공동체적 의식을 고양하기 위한 것이다. 오후 늦게까지 계속되는 이런 풍경은
어둠이 다가올 무렵 제산회장 중앙 쌓아둔 탑을 불사름으로써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타오르는 탑과 함께 그 해 제산회도 막을 내린다.
* 이 기사는 ‘華西都市報’ ’四川畵報’의 기사와 ‘中國少數民族民俗'(복건인민출판사)의 내용을 참조해서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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