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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는 일본 오까야마(岡山)에 있었다

박영복(지호) 2006. 5. 3. 18:39



 

 

 

일본 역사에서 우리 감정을 건드리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임나일본부’이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내용 왜곡에서도 이 문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였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일본은 고대에 왜倭가 가야 지방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주장해 왔다.

이른바 ‘임나일본부’와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로서 가야는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제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있었던 시대를 ‘사국시대’가 아닌 ‘삼국시대’라 불렀다.

가야는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한국사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인 것이다.
일제의 어용학자들은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한반도 남부의 각 지역에서 대대적인 고고학적 발굴을 진행하였는데 그 작업은 실로 놀랄 만큼 방대했다.

당시의 불굴보고서를 보면서 일제의 발굴 업적에 감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러한 발굴들은 고대에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과 남선경영설의 고고학적 근거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발굴 결과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 사이의 문화적 공통성이 발견되면 그것은 바로 고대에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일제의 발굴보고서를 읽을 때에는 그들의 유적과 유뮬에 대한 해석에 매우 주의를 해야만 한다.

고대에 왜열도는 한반도에 견주어 아주 낙후되어 있었으므로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일제의 학자들은 그들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일본서기》에는 왜가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 등과 전쟁을 하거나 사신이 오고 갔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임나는 가야를 말한다.
가야가 ‘임나’라고도 불리어졌음이 여려 기록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고대에 왜는 한반도에 진출하여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과 전쟁이나 사신 교류 등의 접촉을 가졌음이 분명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특히 임나에는 외의 관리가 파견된 기록이 보이므로 애가 가야를 지배했음이 분명하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의 임나일본부설과 남선경영설에 감정적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그 잘못된 점을 학술적으로 논증하여 반박해야 한다.


일본인들의 주장을 완전히 뒤엎는 주장은 일찍이 1960년대에 북한의 김석형이 제기한 바 있다.
그는 《고대조일관계사》를 발표하여 《일본서기》에 왜와 전쟁을 했거나 사신 왕래를 했다고 기록된 대부분의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는 한반도에 아닌 왜열도에 있었던 나라들이라고 주장하였다.

한반도에 있었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사람들이 왜열도로 이주하여 그곳에 나라를 세우고 자신들의 조국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일본서기》의 내용 대부분은 왜와 이들의 관계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나라들은 왜열도에 세워진 우리 민족의 분국으로서 고대에 우리가 오히려 왜열도를 지배했음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임나일본부는 왜열도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뒤 남한 학계에서는, 《일본서기》는 원래 백제의 역사인데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로 변조한 것으로서 임나일본부는 백제가 가야에 설치했던 기구였다는 주장이 있었는가하면, 임나일본부가 대마도에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렇게 되자 일부 일본 학자들은 슬그머니 그들의 종래 주장을 변형하여 임나일본부는 왜가 가야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가 아니라 가야와 통상을 하거나 외교 통로로 이용하기 위해 가야에 설치해 놓은 기구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우리 학자들 가운데도 이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이것은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의 가야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만 그 성격을 달리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는 한반도에 있었던 가야가 아니라는 점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한반도에 있었던 가야가 멸망한 뒤까지도 왜는 계속해서 임나와 교류를 가진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삼국사기》에 따르면 한반도의 가야는 서기 562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는데 《일본서기》에는 그 뒤 서기 646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임나와 사신 왕래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왓다.
그리고 《일본서기》에는 임나의 북쪽에 바다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가야는 지금의 경상남도로서 북쪽에 바다가 없다.

이러한 사실들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는 한반도에 있었던 가야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해주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북한의 조희승이 김석형의 견해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그는 《가야사연구》에서, 그 동안 일본에서 발굴된 여러 유적에는 돌무지무덤, 고인돌 등 한반도에서 건너간 무덤 양식이 보이고 청동기, 철기, 무문토기 등 한반도에서 수입해 간 것으로 확인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특히 가야의 영향을 받은 유적과 유물이 많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왜열도 남부 각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계통의 지명이 많으며 《신찬성씨록》에 실린 일본의 명문가들 가운데는 한반도에서 이주한 가문의 후손들이 많은 점도 지적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일찍부터 우리 민족이 왜열도로 이주하였음을 알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여러 기록을 보면 임나일본부가 있었던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일본 오까야마(岡山)였음을 고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