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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문화와 풍속

박영복(지호) 2006. 5. 3. 18:32

일본의 문화와 풍속
  일본의 자연조건

   (1) 일본의 국토와 국민



일본의 국토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 등 네 개의 섬과 그 밖의 크고 작은 약 3천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일본열도의 총면적은 약 37만 8천㎦로서 한반도 전체의 약 1.7배, 남한의 약 4배에 달한다. 일본국토의 약 4분의 3은 산지로서 커의 대부분은 화산활동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산맥이나 산지는 기복이 심하고 변화가 많기 때문에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이에 비해서 평야부분은 국토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나 농경지는 전체면적의 약 15%이며 택지가 3%, 그리고 공업용지는 겨우 0.4%에 불과하다.
일본의 하천은 국토의 중앙을 달리고 있는 산맥을 경계로 해서 태평양쪽으로 흐르는 것과, 동해 쪽으로 흐르는 것으로 대별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길이가 짧고 흐름이 급한 것이 특징이다.
한편, 해안선은 지형이 복잡하고 변화가 많아서 태평양쪽에는 남에서 북으로 난류가 흐르고 있으며, 북에서 남으로는 차가운 지시마 해류가 흐르고 있다. 또 동해 쪽으로는 쓰시마 해류와 차가운 리만 해류가 흐르고 있다. 이들 해류는 일본열도의 근해에서 서로 부딪혀 플랑크톤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풍부한 어장이 형성되고 있다. 일본의 기후는 남북의 지역차가 심하다. 그래서 홋카이도의 겨울철 평균기온은 0℃를 나타내는 반면 남서제도와 오가사와라 방면에서는 15℃ 이상의 아열대성 기후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계절적으로도 변화가 많고 사계절이 뚜렷한 것은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즉 여름이 되면 남쪽으로부터 계절풍이 불어 온대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무더워진다. 한편 겨울에는 북서쪽으로부터 계절풍이 불기 때문에 대륙의 서해안에 비해서 매우 차갑다.
강수량도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많은 편으로 일본 각지는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1,000밀리 이상이다. 많은 곳은 4,000밀리 이상에 달하기도 한다. 강수량이 많은 시기는 봄부터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는 시기(이때 내리는 비를 쓰유(梅雨)라고 한다.)와,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시기(이때 내리는 비를 아키사메(秋雨)라고 한다), 그리고 겨울의 적설기이다. 또 7월부터 10월에 걸쳐서 태풍이 일본에 상륙하거나 접근해서 많은 비를 내리는 경우도 있다. 비는 겨울철의 눈과 더불어 음료수나 농업 그리고 공업용수 등의 소중한 수자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집중호우나 호설로 사람들의 생활에 커다란 폐해를 끼치는 경우도 흔하다.
일본열도는 일반적으로 겨울에는 시베리에기단의 영향을 받아 동해 쪽은 눈이 많이 내리며, 태평양쪽에서는 건조한 나날이 계속된다. 또 여름에는 오가사와라 기단의 영향을 받아 무더운 날이 계속되며, 동해 쪽에서는 맑은 날이 계속되는 경우가 많다. 봄철과 가을철 날씨는 우리나라와 큰 차이가 없다.


  (2) 일본의 생활환경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일본은 여름에는 고온다습한 풍토적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물의 공급이 풍부하며 이것이 벼농사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생활은 곧 자연과의 조화를 가져오고 사람들 사이에 화합을 중히 여기는 친밀한 공동사회를 만들게 하며 자연히 동족의식도 싹트게 된다.
고온다습한 풍토적 조건은 희생활로서는 식물성섬유의 이용을 보급시키고 주거면에 있어서도 방한보다는 여름을 잘 견딜 수 있게 하는 건축물을 선호하게 된다. 일본 주거의 후스마나 쇼지는 그러한 특색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지만, 그것은 반면에 가족 생할에서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음에 따라 개실이 중시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의·주생활에 걸쳐 서구화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섬세한 자연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특히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 때문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또 일본은 국토가 북위 약 20°부터 약 45°까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기 때문에 남과 북은 기후에 커다란 차이가 있어서 이것도 그들의 자연을 관찰하는 감각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벚꽃은 오키나와에서는 1월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는 데 비해서 홋카이도에서는 5월이 되어야 겨우 피기 시작한다. 그리고 혼슈의 중앙부분을 등골처럼 뻗어 있는 산맥을 경계로 겨울철에는 동해쪽이 세계에서도 유명한 호설지대가 되는 데 비하여, 태평양쪽은 건조한 맑은 날이 계속되는 기후적 특성도 그들의 자연감각의 형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 태풍이나 지진과 같은 불규칙적인 자연적 악영향은 일본인의 생활문화에 정감적인 것과 함께 현식에 대한 대응력을 육성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한편에서 일본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일본에 전해진 외국의 문물은 일본의 전통문화에 접목되어, 곧 흡수 변용되어서 일본문화 그 자체로 재편성되어 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풍토적 특성으로 인해서 일본은 다방면에 걸쳐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 역사적 경험이 풍부해져서 메이지 이후 유럽문화와 접촉을 해도 거기에 대한 반발이나 저항이 비교적 적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것이 일본 근대화의 에너지가 되어서 서구화가 급속히 진행되기도 하였다.

 


  일본의 고대문화

   (1)유교와 불교의 도입 
 



8세기경까지 일본의 문화는 분명히 외래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외래문화를 그저 수용한 데서 끝내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 변형시키고 또 발전시켰다. 그저 수용한 데서 끝내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 변형시키고 또 발전시켰다. 그리고 외래문화라 할지라도 자기들에게 불리하거나 불필요한 것은 거부하였다. 즉, 일본이 수용을 거부한 것 가운데는 이른바 역성혁명, 환관제도, 그리고 동성불혼, 과거제도 등이 있다.
역성혁명이라는 것은, 천자는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도록 천명을 받고 있는 인물인데 만약 천자의 덕이 없으면 여러 가지 재앙이 일어나서 그 나라는 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새로 덕이 높은 사람에게 천명이 옮겨져서 그때까지와는 다른 왕조, 다시 말하면 성이 바뀌어 다른 왕조가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역성혁명은 주나라의 문왕이 폭군이었던 은나라의 주왕을 멸망시켜서 새 왕조를 세웠을 때 그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적용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일본은 한자를 받아들임으로써 대륙의 유교문화를 생활 속에 도입해 갔으며, 그 한편에서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한자가 처음 일본에 전해진 것은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15대 오진 천황 시대에 백제의 왕인에 의해서이다. 그는 일본으로 가면서 천자문 1권과 논어 10권 모두 합쳐 11권의 책을 가지고 가서 왕자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문서를 관장하는 관리인 후비토베의 조상이 되었다고 고기록에 쓰여 있다. 이것이 대략 3세기 말엽이라는 것이다. 그 후 26대 게이타이 천황 때에 오경 박사가 일본에 건너가서 유교를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리고 33대 스이코 천황의 섭정인 쇼토쿠 태자시절에 이르러 유교는 그 학문체계가 확립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쇼토쿠 태자는 관리들의 위계를 관의 색깔이나 재질로써 구분하는 이른바 ‘관위십이계’를 만들었으며, 또한 십칠조헌법을 제정하였다. 이 십칠조헌법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국가의 기본적인 골격을 규정하고 있는 헌법은 아니고, 사람으로서 바르게 살아갈 가르침을 정리한 것이다. 특히 이 십칠조헌법에는 유교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문체는 중국 육조 시대 문장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십칠조현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우므로 가장 기본적인 일부만을 소개하면, 우전 제 1조에는 “화(和)를 귀하게 여길 것이며 윗사람에게 거역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는 글귀로 시작되고 있으며, 제 2조에는 “두텁게 삼보를 공경하라. 삼보란 곧 불(佛)/법(法)/승(僧)이니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3조에는 “임금의 말은 곧 하늘이요, 신(臣)은 곧 땅 이니라”고 적혀 있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 1조의 사상은 유교의 경전을 참고로 하였음이 분명하고, 제 2조는 불교의 사상이 짙게 배어 있다. 그리고 제3조는 법가적이며, 관자나 한비자의 사상에 가깝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은 오랜 동안에 걸쳐서 주로 유교에 의해서 지배되어 왔다. 그러나 육조 시대에 이르러 유교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노장사상이 유행하였으며, 곧 이어서 남북조 시대(439-586)가 되자 불교가 대두하기 시작한다. 즉 노장의 허무사상은 불교의 공사상을 받아들일 소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남부조의 지식인들에게는 유교나 노장 사상, 그리고 불교는 결국 똑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식자들은 ‘유고/불교/노장’이란 삼교의 경전에 통달하였으며 화려한 ‘사륙변려체’의 문장을 즐겨 사용하였다. 이 사륙번려체의 문장은 흔히 사구, 혹은 육구가 연결되어 있어서 매우 선율감이 뛰어난 문장형식이다.
쇼토쿠 태자 시대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도를 줄기로 삼고, 불교를 가지로 삼아, 유교란 열매를 맺게 해서 현실적인 번영을 이룩해야 한다’ 고 하는 나름대로의 이론을 실천하였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일본의 유교는 불교의 노장사상을 아울러 절충시킨 일종의 아주 높은 교양주의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불교의 발전



일본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6세기 중엽으로 백제의 26대 성왕에 의해서이다. 이때 일본 조정에서는 불교를 받아들이는 문제로 일대 소용돌이가 일게 된다. 그것은 불교가 전해지기 이전에 이미 그들의 토속적인 종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토속적인 종교는 신도(神道)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었는데, 물론 오늘날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 토속적인 종교와 새로운 외래종교와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불교를 외래적인 이신(異神)이라고 해서 배격하는 세력과,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깨달아 이것을 받아들이려는 세력 간에 큰 다툼이 일어났다. 토착 씨족인 모노노베 씨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이른바 배불파를 형성하였으며, 외래 씨족인 소가 씨를 중심으로 하는 숭불파가 이에 맞서게 되었다. 결국 격렬한 항쟁 끝에 숭불파인 소가 씨의 세력이 이겨서 불교는 정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주로 소가씨와 같은 외래씨족들의 우지데라[氏寺]라는 성격으로 여러 군데에 사찰이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불교는 일단 수용되자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무서운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원래 이질적인 종교로 인식되던 신도와 불교는 이른바 신불습합을 이루어 일본국민들의 정신적 지주로 자라났다.
그 결과 6세기에서 8세기에 이르는 동안 아스카, 하쿠호, 덴표 문화하고 불리는 찬란한 불교문화가 꽃피게 되었다. 호화롭고 웅장한 사찰도 많이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즉 야마토의 아스카 평야를 중심으로 법흥사, 사천왕사, 법륭사 등 건립기법은 물론이거니와 거기에 보존되어 있는 불상의 제작기법 등의 불교미술도 놀라울 만큼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 전국에 사찰이 46개나 건립되었으며 승려의 수는 816명, 승니도 569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수용 당시 일본의 불교문화는 말할 나위도 없이 대륙불교의 모방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차츰 이것을 자기들 나름대로 변형시켜 독특한 불교분화를 창출해 냈다. 이것을 일본문화의 국풍화라 말하고 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쇼토쿠 태자는 유고와 불교, 그리고 노장사상까지 널리 섭렵해서 체계화시킨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그의 불교에 대한 믿음은 아주 두터웠다. 그의 저작으로 전해지는 <삼경의소>는 특히 유명하다. 이 책은 과연 그가 직접 저술한 것인지 혹은 후세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지 하는 논란도 없지 않아 있다. 여기에서 ‘삼경’이라 함은 <승만경>, <법화경>, <유마경> 등 세 개의 경전의 주석서인데, 이들 불경은 모두 대승 경전으로서 인간적 차별이 없는 현실적 경향이 강한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중심주의로서, 사람 누구에게나 고도의 학문이나 엄한 수업이 반드시 유익한 것은 아니며, 사람은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선한 성질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 이들 경전의 근본정신이다.
그러나 일본불교는 그 후 차츰 국가적 규모로 통일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국가불고의 대두이다. 그리고 그것을 촉진시킨 것이 다름 아닌 금광명최승왕경의 호국적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른바 정교일치의 사상이다. 이 금광명최승왕경에 의하면 천자는 바로 신의 아들이 디고 있다. 즉 천자가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국토의 통치지배의 권한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사상을 그 밑바닥에 깔고 있는 것이다. 또한 거기에는 세습왕권을 불교에 의해서 옹호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정치적으로는 율령국가체제를 갖추어 나가는 데에도 편리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국가불교의 성격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으로 나타나게 된다. 첫째는 사찰이나 승니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강화된 것이고, 둘째, 그 통제범위 내에서 국가는 불교를 보호하고 육성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가는 불교에 대해서 그 철리나 사항 자체의 보급보다는 오히려 그 주력에 크게 기대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일본불교는 시대가 훨씬 내려와서 사이초의 천태종과 구카이의 진언종 등 이대 종파를 낳고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해 나갔다.

 


  (3) 일본 불교의 특징



앞에서도 잠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가 일본에 처음 들어오자, 이것을 배척하는 세력과 이것을 받아들이려는 세력 간의 격렬한 다툼이 생겼으나, 일단 받아들이게 되자 불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면서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였다. 뿐만 아니라 워래 이질적인 신도와 불교는 이른바 신불습합을 이루어 일본국민들의 확고한 정신적 지주로서의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의 황실과 귀족들은 어느 쪽 한 가지를 배격하고 다른 한 쪽을 숭상하기보다는 두 가지 모두를 수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두 개의 다른 종교가 대립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었던 소지는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으나 우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양자가 모두 타를 배격하는 일신교가 아니고 다신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대체로 사물을 다각적으로 받아들이고 무슨 일에나 융통성을 가지고 있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양 종교를 접근시키는 소지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둘째로 불교 가운데는 제천이라는 것이 있다. 즉 범천·재석천·사천왕·비사문천·대흑천 등이 그것인데, 이들 제천은 원래 인도 교유의 신들이었다. 그것이 석가가 불교를 전파하면서 이들 신들을 부교의 진리속에 받아들이고 각각의 역할을 부여하면서 제천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불교가 전해지고 난 뒤에 인도 교유의 신인 제천은 바로 일본 고유의 신들에게 상응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셋째로 불교를 주술적이며 현세기원적인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신과 불은 모두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고 신기신앙과 같은 토양 위에서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우지가미의 신앙과 마찬가지로 각자의 씨족 본거지에 우지데라가 건립되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정부는 불교를 국가불교로서 주요한 사원을 관사로 삼아 국가의 통제하에 두고 두텁게 보호함과 동시에 승니령으로 엄하게 통제하였다. 이처럼 율령국가에서의 공식적인 신과 불의 관계는 그야말로 대등하게 동격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신과 불이 접근하여 양자가 습합되고 또한 그 관계가 이론적으로 체계화되는 현상은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7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서 대륙의 문화가 가장 번창한 시기에 그 소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불교문화



6세기가 되자 그때까지 받아들여졌던 중국의 남북조 문화가 마침내 꽃피기 시작하였다. 아스카문화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로서 조정이 있던 아스카 지방을 중심으로 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내륙문화는 물론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오게 된 것인데 특히 백제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불교가 보급되고 발전한 결과 불교사원의 건축이 전국적으로 장려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소가 우마코가 건립한 아스카데라와 쇼토쿠 태자가 건립한 이카루가데라가 가장 대표적인 것인데, 다른 호족들도 다투어 사원을 건축하였기 때문에 고분을 대신하여 사원이나 불상이 호족들의 권위를 상징하게 되었다.
특히 호류지는 고기록에 의하면 670년에 한 번 불탔다는 기사가 있어서 현존하는 건물은 그 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사실로 인정하더라도 이 사찰의 건물은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조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사원의 내부에는 훌륭한 보물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특히 백제의 후예인 도리불사가 만든 금당의 석가삼존상은 매우 유명하다. 도리 불사는 이 밖에도 아스카데라의 본존상을 만든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불상은 금동상인데 호류지에는 목조인 구세관음상과 백제관음상 등이 있다. 또 이 절의 금당에는 아주 훌륭한 벽화가 있다. 이 그림의 원화는 아깝게도 1949년 1월 화재로 소실되어 그 후에 복원한 것이다.
벽화는 석가정토·아미타정토·약사정토로 나뉘어 모두 12면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 고구려승 담징은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610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오경에 능통하고 채색화를 잘 그렸으며, 종이·먹·멧돌 등을 잘 만들었다고 고기록에 기록되어 있다.
또 고류지와 주구지에는 석가여래가 명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모델로 해서 만들었다고 하는 반가사유상이라는 것이 있다. 특히 전자는 오늘날 일본국보 제1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인데 그 제조수법은 스이코 조인 7세기 경에 신라로부터 전파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이 반가사유상이 보존되어 있는 고류지는 원래 우즈마사데라라고 해서 히타 씨의 우지데라였으며, 히타 씨의 불상이 신라양식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이 불상이 현재 한국의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같은 계열이라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일본불교의 혁신



불교는 인도에서 비롯하여 중국으로 전해졌고, 몇 세기를 경과하는 동안 대부분 중국식으로 변절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불교를 백제를 경유해서 수용한 일본은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승려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수학을 하지 않으면 경전 해독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며, 중국에서 성립된 불교교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많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특수한 학문적 전문가였던 승려들은 불교를 통해서 인간을 구제한다는 생각보다는 고도의 지식이나 학문을 닦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불교를 지식이나 학문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한 불교의 보급이나 발전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한편에서 사원들 가운데는 사령경영에 전념하는 승려를 두기도 하였으며 특히 큰 사원에서는 승병들의 집단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거대한 경제력과 무력을 가지는 대사원이 정치 세계에서도 큰 힘을 갖게 되자 사원 내부에서는 권력다툼이 생기게 되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교학의 연구와 수행에 힘써야 할 자리였던 사원으로 하여금 세속화의 길을 걷게 하였다. 이처럼 세속화한 불교를 혁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속화한 사원으로부터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사원 밖에서는 산악신앙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민족종교의 수행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체계적인 사원의 밖에서 활동하는 이들 승려들은 히지리(聖)라 불렸으며 이들의 의해서 불교는 다시 민족종교의 세계와 접촉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귀족 중에서도 정체적인 사회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은 초현세적인 것을 설법하는 불교의 교설에 깊은 과심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귀족사회에 나타난 히지리는 불교에 관한 지식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달하였다. 그 결과 과거 전문적인 승려들에게만 이해되었던 교설은 급속히 귀족 사이에도 침투하기 시작하였으며, 귀족들 가운데는 불교적인 여러 관념에 의해서 자신의 사상을 자각하고 사색을 깊게 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불교는 일본사회에 내재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차츰 안정적 위치를 되찾게 되는 것이다.
불교의 교학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항은 부처가 되는 것이며 이것이 불도수행의 근본목적이었다. 여기에 있어서 부처는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을 실현한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 한걸음 한걸음 부처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것과는 반대로 현식적인 인간사만을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무력하고 죄 많은 인간의 모습만이 떠오르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탐구하고 거기서부터 인간구원의 길을 찾으려는 새로운 불교집단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이른바 신불교이다. 이신불교의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은 정토종의 호넨(1133-1212)과 정토진종의 신란(1173-1262)이다.
호넨은 어려서부터 정토의 교학과 계율을 배웠으며 남도의 전통적인 교학도 배웠다. 42세가 되던 해에 당의 선도의 가르침을 따라 새로운 교학을 세우게 되었다. 그는 <무량수경>에 있는 아미타여래의 명호를 외우는 데 전념하는 사람은 모두 왕생할 수 있다고 해서 <칭명염불>만이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구원하려는 아미타여래의 서원에 따르는 길이라 역설하였다. 이러한 호넨의 입장은 많은 제자들에 의해서 계수되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신란이다. 그는 29세 되던 때에 호넨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오직 스승의 가르침에 따랐다. 그는 호넨과 함께 유배를 당하는 고초도 겪으면서 오직 포교에 전념하였다. 그는 한 번 신심을 일으켜 오직 아미타불을 믿고 그 힘에 의지하기만 하면 극락 왕생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EH한 선인보다는 악인을 왕생시키는 것이 부처의 뜻이라고 해서 이른바 <악인정기설>을 주장하였다.
불교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은 또한 선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선은 당대에 완성한 중국의 민족적 생채가 짙은 불교로서, 번잡한 교학불교를 부정하고 종교적인 체험을 중히 여기는 종교였다. 이 선종의 대표적인 인물을 임제종을 전파한 에자이(1141-1215)였다. 그는 도 번에 걸쳐 중국에 가서 선을 배웠으며, 이 선을 일본에 전파함으로써 천태종을 재건하려 하였다. 천태종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사이초에 의해서 열린 것이며 그 교리에 의하면 원/선/계/밀의 사종융합을 표방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에자이는 선과 계를 통해서 천태종에 새로운 힘을 주입하려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에자이의 사상은 특별히 혁명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선의 수입은 일본의 불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선을 깊이 이해하고 불교의 혁신에 큰 역할을 담당한 사람으로서 도겐(1200-1253)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진실한 불법을 구해서 여러 사찰을 순방하였으며 많은 고승들을 찾아다녔다.
그 후 그는 진정한 선을 구하기 위해서 송나라로 건너갔다. 거기에서 조동선을 배운 도겐을 당대의 순수한 선을 이상으로 하는 한편 송대의 교권적인 선을 배격하였다. 그리고 오직 좌선의 실천을 강조 함으로써 교학을 중심으로 하는 낡은 불교의 입장은 부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이 호넨으로부터 신란으로 이어지는 흐름 가운데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졌으며 에자이에서 도겐에 이르는 동향 가운데 순수한 선을 확립한 일본불교의 혁신운동은 그 뒤 니치렌(1222-1282)과 잇펜(1239-1289)에 의해서 일본화가 가일층 촉진되었다.
특히 니치렌은 <법화경>의 세계 속에 절대적인 질서를 발견하여 그 이상을 현세에 실현하기 위해서 파견된 것이 다름아닌 본인. 즉 니치렌 자신이라 믿고 있었다. 그는 법화경은 석가의 모든 교설 가운데 정수이며, 나무묘 호렌게교라고 외우기만 하면 이것은 법화경 전체를 통독하는 것과 같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또한 무사나 서민들의 생활을 전면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교리를 설법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정토왕생이나 선의 신비주의적인 깨달음을 설법하려 하지 않고 법화경적 세계에 통합되는 것을 전제로 해서 신기신앙과 유교적 도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니치렌의 사상에 의해서 현세의 일상적인 문제가 비로소 불교와 관련지어지고 불교의 일본화는 크게 진전되었다.

 


  일본의 생활문화

   (1)일본인의 종교관  



위의 ‘신불습합’에서 본 바와 같이 일본문화는 한마디로 표현해서 ‘절충문화’ 내지 ‘복합문화’라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서 일본인들은 연초에 하쓰모테라고 하여 신사나 신궁에 가서 참배를 한다. 거기에서 일 년 동안의 건강과 행운 그리고 사업의 번창 등을 기원한다. 또 오본 명절에는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곤 한다.
일본인들은 결혼식도 대부분 결혼식장이나 호텔에서 신도식 결혼을 하는데 살다가 죽게 되면 이번에는 절에서 스님이 돠서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이와 같이 일본인들은 대부분 신과 불을 아울러 믿고 있는 셈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가정에서는 가미다나와 함께 부쓰단을 아울러 모시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기독교는 종교적으로 소외당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1549년 프란치스코 사비에르가 기독교를 일본에 전파하고 얼마되지 않아 당시의 실력자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기독교를 탄압하였으며, 또 근대의 메이지시대 초기에 당시의 정부는 기독교를 반대하여 신도를 중심으로 한 국교를 만들어 국민들에게 이를 강요하였다. 이른바 대교선포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기독교가 처음 일본에 전해졌을 때 그들의 사회사업이나 의료 활동 등에 힘입어 신도 수는 약 15만 명에 이르렀다고 추산되고 있으며, 심지어 일본의 신도사상 속에도 기독교 사상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신도이론의 대가인 모토오리 노리나가와 그의 제자인 히라타 아쓰타네는 기독교의 영향을 짙게 받고 있었다고 한다. 즉 아쓰타네의 <본교외편>은 바로 아마노미나카누시노 가미를 기독교의 Deus(포르투칼어로 천주를 의미함)로 비유학호 “모든 것을 낳고 지배하며, 사람의 생전의 행위에 응보를 주고, 죽은 뒤에 착한 영혼을 하늘에 인도하고, 악한 영혼을 지옥에 떨어뜨린다.”고 설명하고 있다. 흔히 신도와 불교는 서로 상충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실은 서로 상호부조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인들은 신도/유고/불교라는 동양적 종교와 함께 기독교마저 그 관념과 생활 속에 받아드링고 이것을 조화롭게 소화해 나가고 있다.

 


  (2)일본문화의 특성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일본인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이도 놀라울 만한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 역사는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에 서양사람들이 나타나게 된 것은 1543년에 포르투갈의 난파선이 규슈 남방의 다네가시마에 표착한 것이 처음이며, 이윽고 1549년 프란치스코·사비에르가 가고시마에 상륙하게 된다. 포르투갈의 난파선은 중국의 영파로 향하던 포르투갈 무역선이었다. 그것이 다네가시마 근처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당시 일본인들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총을 싣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그들에게 식량도 주고 여러 가지 친절을 베풀어서 그 무기의 사용법과 제조법까지 배우게 되었다. 그 결과 그로부터 불과 30~40년이 지나는 동안 총을 만드는 기술이 매우 향상되었으며 질과 양면에서 제법 우수한 수준에 도달하였다.
때마침 일본은 전국시대로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무서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 총이 최신무기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전국 시대의 종말과 함께 임진왜란 때에는 수많은 우리 동포를 살상하는 흉기가 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최소한 10만 정의 총이 만들어졌다고 하며, 그 가운데 6만정이 임진왜란 때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참고삼아 당시 유럽에서 최대의 육군룍을 자랑하던 프랑스에도 약 1만 정 정도의 총밖에 없었다고 하니 당시 일본인이 총을 만드는 데 얼마나 정력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본인들의 왕성한 소화력은 어떻게 배양되었을까? 어떤 학자는 이것을 일본의 풍토족 특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즉 일본은 우리나라와 똑같이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생활을 주로 하고 있다. 이 농경생활은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고 사람들 사이의 화합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공동사회를 형성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벼농사는 거기에 필요한 관개 시설로부터 모내기와 수확 등 모드 작업을 공동으로 수해하게 되며 따라서 가족을 단위로 하는 촌락공동생활을 하게 된다. 이 공동생활에서 공동의 신을 모시는 동족의식이 싹트게 되고 이것은 집단의식으로 승화하게 된다.
이러한 의식은 오늘날의 일본 기업이나 단체 등의 행동양식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것이 또한 전후의 경이적인 경제발전도 이룩하게 하였다. 일본의 큰 사회에는 아래로는 독신의 신입사원에서부터 위로는 부장이나 중역에 이르기까지 그 지위에 상응하는 사택이 중앙이나 지방에 마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경승지에는 사원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보양시설도 흔히 있다. 그리고 사원에게는 회사채를 가지게 하고 좋은 금리로써 사내예금도 시킨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사원들은 이른바 종신고용제하에서 회사와 운명을 같이한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무한경쟁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른바 미국식 경영방식이 많이 도입되고 있다. 신입사원의 채용방식도 많이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는 매년 직종에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신입사원 전원을 선발하는 채용제도를 취해 왔으나 최근에 와서는 사업 분야에 맞는 다양한 인력을 수시로 선발하고 대우나 고용형태를 개별적으로 계약하는 추세이다. 그리고 채용기준은 선발 직후 바로 업무에 투입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가장 우선시 한다. 글로벌 시대에 맞추어 국적이나 민족은 문제 삼지 않는 것도 특기할 만한 변화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같은 집안’, ‘운명공동체’라는 일본의 전통적 사고 방식이 ‘일본 주식회사’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일본을 거대한 경제 대국으로 만드는 데 큰 힘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정신은 앞으로도 계속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이어져 갈 것이다.


  (3) 일본인과 마쓰리  



오늘날 일본에서 마쓰리란 말은 상업적인 용어 내지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이벤트라는 영어로 쓰이는 경우가 흔해졌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대학의 ‘축제’나 ‘문화제’ 같은 것이다. 이것은 또한 ‘떠들고 놀다’라는 뜻도 된다. 그래서 ‘축제소동’이란 말도 생겨나고 있다. 물론 일본의 마쓰리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옛날 사람들은 태양의 움직임이나 사계절의 변화, 비·바람·눈 등의 자연현상을 비롯해서, 천재이변이나 병·죽음 등은 초인간적인 힘을 가지는 신이나 영환의 힘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을 두려워하고 공경하였다.
그런데 신이라고 해서 모두 좋은 신, 즉 복신만은 아니고, 오히려 화를 내리는 무서운 신, 역병신과 같은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좋은 신은 니기 미타마를 가지고 있고, 나쁜 신은 아라 미타마를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신에게는 제사를 지내서 오곡풍양·사업번창·가내안전 등을 기원했으며, 한편 나쁜 신에게도 제사를 지내서 그 무서운 신통력을 봉쇄하기도 하고 다른 곳으로 추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사가 다름아닌 마쓰리인 것이다.
일본은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각 지역마다 신사나 신궁이 있어서 거의 일 년 내내 어딘가에서 마쓰리가 거행되고 있다. 그래서 미코시라는 가마를 여러 청년들이 메고 ‘왓쇼이, 왓쇼이’라고 고함을 지르며 거리를 누비기도 하고, 각 지역마다 독특하고 화려한 장식을 한 다시(장식한 수레)를 끌고 다니는 광경, 혹은 각 지역마다 독특한 취향을 살린 민속춤으로 흥을 돋우고 있는 장면을 자주 볼 수가 있다.
다음에 이 가운데서도 특히 유명한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우선 봄과 가을에 열리는 기후의 다카야마 마쓰리가 있다. 이 마쓰리의 압권은 무엇보다도 호화찬란한 다시이다. 열두 대의 다시에는 옛날 유명한 장인이 심혈을 기울였다는 조각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들 다시가 수십 개의 초롱에 휘황한 불이 켜지며 예인이 된다.
다음으로 교통는 유명한 3대 마쓰리가 있는데 아오이 마쓰리·기온 마쓰리·지다이 마쓰리가 바로 그것이다.
아오이 마쓰리는 일본에서 가장 우아한 마쓰리이다. 1,400년의 역사가 있고 당일에는 옛날의 왕조풍속을 오늘날에 되살려 우차와 칙사, 수행자가 화려한 의상을 입고 행렬한다. 기온 마쓰리는 그 규모 있어서나 호화로움, 그리고 유서 깊은 전통으로 봐서 전국의 제례 가운데 백미로 꼽히고 있다. 기온 마쓰리는 한 달이나 계속되며 그 동안 교토시내는 온통 축제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지다이 마쓰리는 앞의 두 개의 마쓰리보다 역사는 짧다. 나라로부터 교토로 도읍이 옮겨진 뒤 1,100년이 지난 1985년에 헤이안 신궁이 창건되었는데, 이때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그래서 천도일인 10월 22일에 맞추어서 엔레키부터 메이지 시대에 이르는 약 1,000년 동안의 문물풍속을 재현시키고 찬란한 행렬이 시내를 누비게 된다.
또 아오모리의 네부타 마쓰리·아키타의 가토 마쓰리·센다이의 다나바타 마쓰리 등 이른바 도호쿠 지방의 3대 마쓰리가 있다.
네부타라는 것은 역사상의 인물이나 호걸 또는 동화 속의 주인공이나 현대의 영웅들을 본떠서 만든 인형으로 높이 4~5미터에 폭은 10-20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다. 그야말로 역동감이 넘치며 색채도 풍부한데 이것을 어깨에 메고 다니기도 하고 다시에 장식하고 시내를 누비기도 한다.
간토 마쓰리는 글자 그대로 길이 10미터나 되는 장대에 아홉 개나 되는 장대를 열십자형으로 묶고, 거기에 적게는 26개, 많게는 48개의 초롱을 매달아 평소 실력을 연마해 온 젊은이가 요란한 북 소리에 맞추어 온갖 곡예를 부린다. 즉 초롱이 주렁주렁 다린 무거운 장대를 이마나 어깨 위에 얹기도 하고 허리를 구부려서 그 위에 얹기도 하면서 교묘하게 중심을 잡으며 곡예를 부리는 것이다. 이러한 장대가 100개 이상이나 나타나서 장관을 이루게 된다.

 

 


  일본의 세시풍속  - 오쇼가쓰(お正月)



어느 나라나 정초는 있기 마련이고 각 나라 나름대로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설(お正月)은 일 년 가운데 가장 뜻있고 중요한 명절이다. 일본사람들은 설을 ‘쌀을 관장하는 신’이 오시는 때로 생각하였다. 즉 설님(お正月さま)이 와서 일 년 동안의 풍작을 보증해 주기를 빌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설을 맞이하는 풍습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오늘날은 대그믐날이 되면 가족들이 모두 모여 앉아 도시코시소바(年越そば)를 먹는다. 그리고 재미있는 TV 프로를 보면서 일 년 동안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새해의 행운을 기원하는 것은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다. 일본에서는 제야의 종을 108번 친다. 이것은 108개의 번뇌를 하나하나 깨뜨린다는 의미이다. 번뇌는 중생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득도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이 신을 모시는 날이라는 것은 중국이나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즉 중국에서도 설날 초하룻날 새벽에 마당에 탁자를 내어 제단으로 삼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어 삼궤구고의 예로써 신을 맞이하였다. 일본에서는 오늘날 이러한 엄숙한 생사는 하지 않지만 섣달 13일경부터 스스하라이(煤はらい)라고 해서 집 안을 대청소하는 습관이 에도(江戸) 시대부터 행하여지고 있다. 설날의 신은 더러운 곳에는 오지 않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1)오쇼가쯔-오세치요리와 오조니



세밑이 가까워지면 집집마다 설요리를 준비한다. 이것을 ‘오세치’라고 하는 것은 계절음식으로서 신전에 차리고 가족 모두 함께 먹기 때문이다. 오세치라는 어원은 오셋쿠에서 유래한 것이다. 본래는 오셋쿠 때의 축의 요리였으나 현재는 찬합에 넣은 설날요리를 의미하게 되었다.l 오세치 요리에는 말린 멸치, 토란·고구마·검정콩·청어알·다시마말이·야채조림 등이 들어간다. 오조니의 재료는 지역이나 가정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야채나 생선을 넣어서 만든 장국이나 된장국에 절편떡을 넣어서 먹는다. 이를테면 일본식 떡국으로 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음식이다.

 


  (2) 가도마쓰(門松)



일본의 설 풍경으로 가장 두드러즈게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이 가도 마쓰이다. 이것을 설치하지 않으면 설 기분이 나지 않는다고 할 정도이다. 이 가도마쓰란 글자 그대로 집의 대문이나 현관에 소나무 가지를 세우는 것이다. 소나무를 마쓰(松(まつ))라고 하는데, 이것은 동음어인 마쓰(待つ:기다리다)라는 의미를 내포하여 ‘신(神)을 기다린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역에 따라서 소나무 대신에 상록수인 비쭈기나무나 붓순나무의 가지를 세우는 것도 있다. 이러한 습관은 이들 나무를 타고 신이 내려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생겼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주택조건의 변화도 있고 해서 가도마쓰를 세우는 가정도 매우 적어졌다.


  (3) 하쓰모데(初詣)



설날이 밝으면서 1년 동안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기 위해 신사나 신궁을 참배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어떤 사람들은 학업성취를 위해서 학문의 신으로 일컬어지고 이는 스가와라 미치자네(845-903)를 모신 각처의 덴만구를 참배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교통안전과 각종의 재화로부터 벗어나기를 기원해서 후도손을 찾기도 한다. 이러한 하쓰모데(初詣)는 정월 7일까지 계속되는데 전국의 신사불각은 이때가 가장 붐비는 시기이며 또한 사이센 수입을 톡톡히 보는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의 하쓰모데는 종교적인 행사라기 보다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함께 소풍 간다는 느낌이 강하다.


  일본의 세시풍속  - 세쓰분(節分)



세쯔분이란 24절기의 하나로서 춘·하·추·동의 계절이 시작되는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세쓰분은 일 년에 네 번 있었던 것인데, 입춘은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날이므로 이 날만 남아서 세쓰분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세쓰분 행사로서는 마메마키[豆まき] 야키카가시[やきかがし]·도시우라나이[年占]·야쿠오토시[厄落とし] 등이 있다. 마메마키란 볶은 콩을 되에 담아서 “福は内(ない)、鬼は外(복은 안으로 들어오고, 악귀는 밖으로 나가라”고 고함을 지르며 집 안 여기저기에 뿌리는 것이다. 이것은 곡물이 가지고 있는 신비스러운 힘으로 악귀를 물리치려는 행사이다. 콩을 뿌리고 난 뒤에는 가족 모두가 자기 나이만큼의 콩을 먹기도 한다.
야키카가시란 정어리의 머리를 구워 호랑가시 나뭇잎을 붙여서 방의 입구마다 꽂아 두는 것으로 그 냄새와 뾰족한 잎 끝으로 악귀를 퇴치하려는 행사이다.
도시우라나이는 그 해의 풍작여부를 점치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세쓰분 때 콩을 12개, 윤년인 경우에는 13개를 구워서 그 상태를 보고 그 해의 날씨를 점치는 것이며, 야쿠오토시는 세쓰분 날 저녁에 액년(厄年)인 남녀가 나이만큼의 동전을 종이에 싸서 길에 떨어뜨리고 거지에게 줍게 하는 행사인데, 이러한 풍습은 이제 없어졌다.


  일본의 세시풍속 히간(彼岸)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을 중심으로 하는 기간을 히간에(彼岸會)라고 해서 여러 가지 불교행사가 거행된다. 이것은 불교적인 해석으로 “방황의 ‘시간(此岸)’ 으로부터 깨달음의 ‘히간(彼岸)’에 이른다” 라는 뜻이다. 그래서 3월 21일경을 중심으로 하는 7일간을 ‘봄의 히간’이라 말하고, 9월 23일경을 중심으로 하는 7일간을 ‘가을의 히간’이라 말해서 사람들은 선주들의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또 사원이나 자택에 스님을 모시고 법요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사람들은 흔히 “더위도 추위도 히간까지”라는 말을 한다. 즉 이때는 이른바 환절기로써 ‘아무리 더워도 추분까지 참으면 되고, 아무리 추워도 춘분까지만 참으면 된다“고 하는 희망어린 속담인 것이다.

  일본의 세시풍속  - 오본(お盆)



오쇼가쓰(お正月)와 오본(お盆)은 일본의 연중행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원래 이 오본이란 말은 우란분경(盂蘭盆經)이라는 불교의 경정세어 유래한다. 즉 현재의 부모 및 과거 7세대의 조상을 위해서 매년 7유 15일에 백미(百味)의 맛있는 음식을 차려서 백승(百僧)에게 공양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의 오본행사는 일본 특유의 것으로 불과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한다. 오본행사는 다나바타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가 있다. 이 다나바타에 대해서는 다음 항에서 설명하겠으나, 무엇보다도 본오도리(盆踊り)는 빼놓을 수가 없다. 마을이나 도시의 공지(空地)에 야구라(櫓:나무를 짜서 높게 만든 망루)를 세우고 거기에서 치는 북 소리와 피리소리에 맞추어 산뜻한 유카타를 입은 남녀가 원을 이루어 즐겁게 춤을 춘다. 그러나 이 오본을 전후해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일제히 고향에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추석 때처럼 일본에도 일대 교통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일본의 세시풍속   -  다나바타(七夕)



7월 7일날 저녁 은하수를 사이에 끼고 견우성과 직녀성이 1년에 한 번 만난다는 다나바타, 이것은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라 우리나라의 칠월칠석과 똑같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거기에 일본 고래의 조령제(祖靈祭)의 풍습이 섞여 일본식으로 변화하여, 민중들이 스스로 마음을 달래는 정도의 소박한 행사였다. 그러나 다나바타 마쓰리는 오늘날 그 화려함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특한 행사가 되고 있다. 즉 8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 동안에 3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축제에 참가하여 이 행사를 즐긴다고 한다.
그리고 단자쿠[短册]라고 해서 조붓한 종이에 자기가 원하는 바를 써서 오색찬란한 색종이 등과 함께 대나무 가지에 매달아 상점이나 거리에 장식을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일본 각지의 상점이나 백화점에서 손님을 끌기 위해 화려한 장식을 만들어 축제소동을 벌이는 행사가 되어 버렸다는 비판의 소리도 들린다.

 

 


  일본의 전통예능과 오락  - 노(能)



8세기경 중국의 산악이 일본에 전해졌다. 이것은 사루가쿠(猿楽)라고도 했으며, 사람이나 동물의 흉내를 내거나 기술을 부려서 사람을 웃기는 것이었다. 이것은 도시에서 또는 신사나 절의제례나 여흥 등으로 상연되어서 제법 인기가 높았으며 13세기쯤 되면서 다시 여기에 연극적 요소가 가미되었다. 그 후 14세기의 남북조 시대에 사루가쿠노라 불리게 되고, 이어서 간아미·제아미 부자의 노력에 의해서 오늘날 전해지는 노가 이루어 진 것이다.
이 노는 교겐과 더불어 일본에서 완성된 연극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노예는 한때 권세 있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던 자가 죽어 성불도 하지 못한 망령이 되어 옛날의 영화를 이야기하고 지나가던 자가 불공을 드려서 성불시킨다는 줄거리가 흔하다. 그것은 과거의 귀족세계에 대한 동경이며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과거에 대한 추억이다. 노는 이러한 비극적인 연극인 까닭에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며 그만큼 깊이도 있다.
노는 요쿄쿠에 맞추어서 상연된다. 배우는 각종 가면을 쓰고 호화스런 의상을 걸치고 나온다. 등장인물은 시테라고 하는 주연과 와키라고 하는 상대역, 그리고 조연격인 쓰레 등 3-4명이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면을 쓰고 있으니까 얼굴의 움직임이나 몸동작에 의해서 의미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 비극인 만큼 광녀(狂女)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 사랑에 우는 여인, 자식이 죽은 부모 등 그 역할도 다양하다.
노의 무대는 경우 6㎡로 좁고 간소하다. 배경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을 뿐이다. 노는 옛날부터 지루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템포가 느리며 동작이 둔하다. 요쿄쿠도 무슨 의미인지 일반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노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식화된 연기의 미(美)를 잘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일본의 전통예능과 오락  -  가부키(歌舞伎)



가부키는 일본의 전통예능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는 노(能)보다 짧은 셈이지만 개조(開祖)로 일컬어지고 있는 이즈노모 오쿠니가 교토에서 가부키 춤을 시작한 것이 1603년 4월이며 따라서 4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 가부키라는 명칭은 원래 傾く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따라서 ‘이상한 모양’을 하고 관능적인 연기로 관중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그것은 이른바 퇴폐로 통한다는 비난도 있었으나 당시의 난세를 살아 온 서민들의 인간찬가가 거기에 있었다.
이 가부키가 크게 인기를 얻자 당시 교토의 유녀(遊女)들이 시조가와라라는 강변에 무대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풍기를 문란케 한다고 하여 1625년 막부는 온나(女) 가부키를 금지시켰다. 유녀들이 추방을 당하자 이번에는 미소년들이 이른바 와카슈 가부키를 공연하였는데, 이것도 풍기를 문란시킨다고 해서 금지당하였다. 결과적으로 성년남자만 무대에 서게 되었으나 변태적인 풍조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결국 막부는 1656년 이 가부키를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그러나 일반민중들은 가부키의 재개를 갈망하였고, 흥행사인 ‘무라야마 마타베’가 10여 년 동안 끈질기게 항의한 끝에 마침내 1658년 재개가 허용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가부키는 그때까지의 용색(容色) 본위의 노래·춤·촌극이란 단순한 흥미위주의 구경거리에서 연극으로 탈피를 꾀하게 된 것이다.
가부키는 표정과 동작으로 연기를 보여 주며 그 의상 또한 휘황찬란하다. 이 연극이 다루는 이념은 주로 충효·의리·인정 등 이른바 도의적인 것이 중심이 되고 있으며 일반서민들에게는 권선징악의 도덕교육적인 면도 가미되는 경우가 있다.
회전무대에 하나미치(花道)라는 통로가 관객석 안에 설치되어 있는데, 이 하나마치를 통해 배우들이 출·퇴장하는 모습을 가까이 볼 수 있어서 한층 관객들의 흥을 돋우고 있다.

 


  일본의 전통예능과 오락  -  닌교 조루리(人形淨琉璃)



일본의 인형극은 나라[奈良]시대에 전해진 산가쿠[散楽]속에 나타나는 가이라이시[傀儡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되어 중국·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전래되었다. 당초에는 목에서 가슴으로 드리운 상자 모양의 조그마한 무대 속에서 손으로 인형을 조종하는 것이었다.
한편 무로마치[室町]시대 중기에 민중음악의 하나인 조루리[淨琉璃]가 생겼으며, 또 샤미센[三昧線]이 전해지면서 그것이 한데 어우러져서 급속히 보급 발전되었다. 가락에는 긴피라 부시, 하리마 부시, 가가 부시, 도사 부시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17세기 후반 다케모토 기다유가 나와 작가인 치카마쓰 몬자에몬과 협력하면서 기다유 부시를 완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닌교 조루리를 일병 분라쿠[文楽(ぶんらく)]라고도 한다. 이 분라쿠란 이름은 18세기 말의 우에무라 분라쿠켄이란 이름에 유래하고 있다. 즉 이 분라쿠켄의 흐름이 이때부터 닌교 조루리의 본류가 되었으며 1872년경부터 이 이름이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 분라쿠의 특징은 검은 의상을 입고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세 사람이 무대에 나와서 하나의 인형을 조종하는 것이다. 세 사람 가운데 주조종사는 오모 즈카이[主遣] 이다. 이 사람은 머리부분과 오른속을 조종한다. 다음에 인형의 왼쪽을 조종하는 사람을 히다리 즈카이[左遣]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아시 즈카이[足遣]가 있는데 이 사람은 양쪽 다리를 조종한다. 이들 세 사람은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없으므로 호흡을 맞추어 가면서 인형을 역동감 있게 조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 인형조종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30년이 걸린다고 한다. 즉 다리 조종에 10년, 손 조종에 10년, 그리고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다시 10년의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분라쿠에는 이들 세 사람 외에 샤미센을 켜는 사람. 기다유 부시를 엮어 나가는 이른바 다유[太夫]가 있다. 이들은 객석에서 봐서 무대의 오른쪽에 위치한다. 이 기다유 부시는 보통 사건의 발단을 말하는 구치[口]와 전개과정을 나타내는 나카[中], 종결부분인 기리[切]의 세 단계가 있는데, 각 단계마다의 특색을 잘 살려서 스토리를 엮어 나간다. 그리고 다유의 스토리를 도와서 생기를 넣어주는 것이 샤미센의 역할이다.
이 다유와 샤미센, 그리고 인형조종사는 분라쿠의 3대 요소로서 이것을 삼업(三業)이라 말하고 있다. 이 3요소가 일체가 됨으로써 인형에 생명이 불어넣어지고 환상적인 인형극 특유의 세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일본의 전통예능과 오락   - 교겐



교겐은 14세기 무로마치시대에 발달하여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는 전통예능으로서 실제로 많이 공연되고 있다. 이것은 노와도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노가 일반적으로 상층무사계급을 등장시키고 오늘날도 특권계급을 주로 다루고 있는 데 비해서, 교겐은 생산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농민들의 것이며 웃음의 예술이다.
교겐의 발생시기는 노와 거의 같으면 계보도 비슷하지만, 노가 가부키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 비해서, 교겐은 대화형식을 취사고 있으며 실생활을 희화화해서 웃음을 뿌리고 있다. 상연도 그렇게 긴 것은 아니고 형식도 단순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학교 교과서에도 인용되고 있어서 가끔 학예회 등에서도 공연되고 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교겐의 숫자는 357번이다. 이것은 에도 시대에 기록된 것이지만,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무로마치 시대부터의 서민의 생활과 웃음을 오늘날까지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교겐은 노의 막간에 무대효과를 높이기 위해 상연된다. 일반적으로 5번 노와 4번 교겐이 대화형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주연을 시테(シテ), 조연을 아도(アド)라고 하며 이 말은 그 당시의 말로 현대어가 아니다.

일본의 전통예능과 오락   -  스모(相撲)



스모는 오늘날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인 동시에 오락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오락이라 하는 데이는 혹 반론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오락을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위로해 주는 것’이라 이해한다면 넓은 의미에서 오락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스모는 오늘날 일본의 국기가 되어 있다. <니혼쇼키(日本(にほん)書記)>에 의하면 이미 서기 642년에 당시의 천황이 백제사신을 향응하기 위해서 스모를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시대의 변천에 따른 곡적을 겪으면서 오늘날처럼 1년에 6회(1회에 15일씩) 전국을 순회하면서 실시하는 이른바 오즈모[大相撲]로 발전해 왔다. 역사(力士)들은 반즈케[番付]라고 하는 순위표에 따라서 대전을 하고, 15일 동안의 성적에 따라 급수가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한다. 급수 가운데 최고위는 요코즈나[横綱]이다.
스모는 우리나라의 ‘씨름’과는 경기방식이 매우 다르다. 여기에서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으나 우선 스모는 여러 가지 엄격한 격식이 있어서 이 격식을 알지 못하면 구경하고 있어도 재미가 없다. 그래서 일본의 스모는 격식미가 돋보이고, 우리나라의 씨름은 인간미가 돋보인다고 평해지고 있다.
오늘날 이 스모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그리고 역사(力士) 가운데는 미국인·몽고인·한국인들도 있으며 미국이나 영국에 가서 흥행을 벌이기도 한다.

 

  일본의 전통예능과 오락  - 쇼기(將棋)



쇼기는 고대 중국의 오락인 상기(象棋)가 8세기경 견당사(遣唐使)를 통해서 일본에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쇼기는 정방형의 장기판에 선을 그어 가로 세로 9블록 81구획을 만들어서, 대국자가 각각 20개의 말을 움직여서 상대방의 왕(王將)을 공격한다. 쇼기가 오늘날과 같은 양식으로 확적된 것은 전국 시대(15~16세기) 이후 근세 초기에 걸친 시기로서 원래의 36개의 말에 비차(飛車)와 각행(角行)을 더해서 2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쇼기는 우리나라의 ‘장기’와 규칙이 매우 다르다. 우선 말의 모양 · 수 · 호칭이 다르다. 즉 우리나라의 장기는 원형 내지 6각형인 데 비해서 쇼기는 5각형이며 앞부분이 뾰족하게 되어 있어서 얇으며 뒷부분은 넓고 두껍다. 말의 수는 장기는 한쪽이 18개로서 양쪽 합쳐서 36개인 데 비해서, 쇼기는 앞에 말한 대로 각각 20개 양쪽 합쳐서 40개이다. 다음에 호칭을 보면 장기는 한(漢), 초(楚)로 나누어지고 있는 데 비해서, 쇼기는 양쪽 모두 王將 혹은 玉將이며 그 밖의 말의 호칭도 약간 다르다.
그런데 장기와 쇼기의 가장 다른 점은 그 용병술과 말의 기능이다. 두 가지만 예로 들면, 첫째 쇼기는 상대방의 말을 잡으면 그것을 다시 이용할 수 있다. 즉 적의 포로를 다시 전력으로 투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에 쇼기는 말의 계급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진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졸은 앞과 옆 한 개씩밖에 가지 못하는데 이것이 죽지 않고 상대방 영역까지 들어가게 되면 계급이 격상되어 좌우로 비스듬하게 갈 수 도 있고 뒤로 물러설 수 도 있다. 이때 말을 뒤집게 되는데 뒷면은 빨간 글씨로 되어 있어서 구분이 된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예능이건 오락이건 일본에 들어오는 문물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 변형시키고 합리성을 더하여 발전시켜 가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