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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야 봐야 할, 배울만한 해외창업 성공사례

박영복(지호) 2005. 5. 5. 16:56

[펌] 용기 있는 자만이 대박을 얻는다!

 

“한국 청년들이여, 해외로 눈 돌려라”
평범한 젊은이 곽봉규의 자카르타 성공기


출처 : 주간조선

 

42만명의 청년실업자가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이다. 대기업의 취업 문은 여전히 좁고, 공무원 시험은 ‘하늘의 별 따기’다. 낙담한 젊은이들은 “한국에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꿈을 펴보지도 못하고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지금은 글로벌시대. 지구촌 전체로 시선을 돌리면 기회의 땅은 얼마든지 있다. 특히 동남아를 비롯한 저개발국가로 눈을 돌려보라. 기회는 널려 있다.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서 피자로 현지 외식업계에 파란을 일으킨 평범한 한국 청년이 있다. 그는 학력도, 집안도, 경력도,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는 우리 주변의 청년이었다. 다른 젊은이들처럼 그 역시 연속된 실패로 한국에서 희망을 찾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아이디어와 노력으로 자카르타에서 눈부신 성공신화를 이룩했다. 그를 자카르타 현지에서 만났다. <편집자 주>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의 최고급 쇼핑타운 이엑스몰(EX-MALL)은 도약하는 인도네시아 경제의 상징적 공간이다. 작년 4월에 개장한, 이 크고 화려한 회랑은 중국인이 대주주인 비만타라그룹 소유로 하얏트호텔·플라자인도네시아와 연결돼 있다. 주말이면 자카르타의 부호와 미녀, 상류층 사람이 여기에 다 모인다. 최고의 임대료로도 악명 높은 이 건물 안에 ‘레드 토마토’라는 피자 레스토랑이 있다. 피자를 ‘이탈리아 빈대떡’ 정도로 여기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곳의 메뉴판을 펼치는 순간 놀란다. 피자 한 판에 7만~9만루피아! 자카르타 샐러리맨의 평균 월급이 200만 루피아니까 우리나라 소득 수준으로 환산하면 10만원짜리다. 이 피자를 먹기 위해 하루 100~300명이 찾는다.

 

단골고객의 면면을 보면 더 놀랍다. 메가와티 전 대통령의 가족인 자바섬의 폰드라 왕, 바크리에 그룹의 바크리에 회장, 야콥 소와웨아 노동부 장관, 이스칸다르 이민국 총장 등 고위층 인사와 피터팬, 마르셀, 탄토위 등 톱스타가 가족과 함께 주말외식을 즐긴다.

‘도대체 어떤 맛이기에 이 난리인가’ 하고 인도네시아 최대 방송사인 SC-TV에서 취재해 가기도 했다. 한 달 매출액이 6억5000만~7억루피아(약 7500만원). 이엑스몰을 통틀어 일본식당 스시테, 중국식당 크리스찬자이 다음으로 3위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 특별한 식당의 사장은 39세의 한국인 곽봉규씨다. 3년 전 자카르타에 온 그는 겨우 1년간의 준비 끝에 한 달 임대료가 2500만원이나 하는 금싸라기 점포를 덜커덕 얻었다. 그때 그의 수중에는 2억원이 있었고, 한국 동업자 3명의 투자액까지 다 합쳐 8억원밖에 없었다. “인도네시아 자본의 90%를 쥐고 있는 5%의 중국인과 인도네시아 귀족층을 타깃으로 겨냥했습니다. 부자들이 가지는 과시욕과 차별욕에 고가 마케팅으로 접근했죠.” 바로 위층에 유명한 패밀리레스토랑 체인인 피자헛이 있지만 가격과 손님 모두 레드 토마토의 절반에 불과하다.

 

그러나 과시욕만 자극해서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고가전략의 출발선에는 맛에 대한 자신이 있었다. 레드 토마토의 주방을 이끄는 강진호(29), 박진용(29)씨는 한국에서 정통 이탈리안 수타(hand tossed) 피자를 8년간 만들어온 베테랑으로, 이미 자카르타에 진출해 있던 미국계 피자헛과 잇즈피자보다 맛에서 압도하고 있다. 자카르타의 식품재료와 사람들의 입맛을 1년 가까이 연구한 두 청년은 “한국인과 인도네시아인의 입맛이 비슷하다. 기름진 걸 싫어하고 매운 맛을 좋아한다. 화덕으로 구워 기름을 뺀 피자에 그들이 좋아할 만한 재료와 양념을 토핑했다”고 했다.

 

대통령·각료 가족이 단골

 

부자 인도네시아인을 더욱 매료시킨 것은 서비스였다. 엄벙덤벙한 서빙에 익숙한 그들에게 한국식 레스토랑의 2교대로 근무하는 40명 종업원이 보여주는 의전(儀典)과 일사불란함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국에서는 5년 전부터 상용화되었으나 인도네시아인들로선 처음 보는 핸드터미널(손바닥만한 컴퓨터 단말기 버튼을 누르면 주방 각 코너에 주문이 입력되는 방식)도 신기했다. 토요일 저녁, 훈련된 인도네시안 점원들이 한국 가수 싸이의 음악에 맞춰 선보이는 도우쇼(피자 반죽 원반을 돌리는 묘기)는 자타르타의 진풍경으로 자리잡았다. 이 쇼를 보기 위해 수라바야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 손님도 있다.

 

곽봉규 사장은 ‘로열 마케팅에는 로열 서비스가 전제조건’이라는 각오로 현지 종업원을 트레이닝했다. 그 과정이 힘들어 그만두는 사람이 많았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자존심이 강합니다. 조용히 따로 불러서 야단쳐야지 공개적으로 나무라면 그만둬버릴 정도죠.” 서빙교육을 맡고 있는 박진용씨는 “‘자존심을 버리는 게 서비스의 시작’이란 마인드를 심어주는 게 쉽지 않았다”고 한다. “무릎을 꿇고 고객의 눈높이에서 주문을 받으라 했더니 바로 뛰쳐나가버린 이가 부지기수입니다.” 종업원의 소속감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없앴다. 모두 월급제다. 월급은 한화로 12만~13만원. 웬만한 기업의 대졸 사원 수준이다. 주방 총괄책임자로 일하는 사애푸딘 아판디(26)는 IU(인도네시아 유니버시티)에 합격한 수재지만 학비가 모자라 중퇴하고 이곳에 취직했다. “이제는 우리의 서비스를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고 있어요.” 다른 점원도 이곳에 입사한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레드 토마토는 ‘이엑스몰의 사관학교’라 불려요. 여기서 일하다가 딴 가게로 스카우트되어 서비스교육을 맡고 있는 직원이 10명이 넘어요.” 프런트를 관리하는 주부사원 디나(26)의 말이다.

 

 

곽봉규씨는 부잣집 아들이 아니다. 부친 곽병국(72)씨는 서울 삼청동에서 청과물 도매업을 했다. 한국에서 그는 모범생이 아니었다.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낙이었다. 고등학교를 세 번 옮겼고 대학은 지방에서 다니다 중퇴했다. 군대에선 선임하사와 싸우는 걸 말리러 온 중대장에게 난로를 집어던지다가 대대장에게 목격돼 6개월을 더 복무했다.

 

한국식 서비스로 차별화

 

그의 청춘을 이끌어준 모티브는 친구였다. “늘 친구가 많았어요. 속마음을 완전히 열고 대하니까 누구나 쉽게 친해졌어요.” 중고교시절 만난 친구들이 지금까지 인연의 끈이 되었다. 현재 게임소프트웨어업체를 운영하는 김지현씨와 토토복권사업체 타이거풀스 대표 송재빈씨 등을 그때 만났다.  송재빈씨와 함께 아는 형으로부터 옥외광고판 하나를 빌려 ‘인터아트’란 이름의 광고회사를 차린 것이 곽봉규씨의 사업 입문이었다. 때마침 코카콜라에서 그 광고판을 원했다. 생각지도 못한 거액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젊은 친구끼리 동업은 쉽지 않았다. “우정에 금이 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만두고 나왔다”는 곽씨는 그 후 몇 년을 허송세월했다.

 

서른두 살 되던 해 부모에게 자본금을 얻어 인쇄광고회사를 차렸다. 회사래봤자 직원 셋에 매킨토시 컴퓨터 한 대가 고작이었다. 처음엔 명함을 찍었다. 친구들이 광고주를 소개해주었다. 자신감이 붙으면서 전단지 광고로까지 확장했다. 친구를 통해 얻고 친구를 통해 잃었다. 보증을 잘못 서서 7억원의 빚을 지고 부모의 집까지 저당잡히게 됐다. 술에 취해 쓰러져 자고 일어나보니 머리맡에 돈과 메모지가 있었다. “밥은 굶지 말고 다녀라.” 어머니 정옥자(62)씨의 글씨였다. 모친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식당에 나가 일했다.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섰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고 가장 열심히 일했던 시기”라고 곽봉규씨는 말했다. 전국을 돌면서 대학광고를 따내는 데 성공한 그는 22개 대학의 홍보물을 도맡아 제작하는 업체로 성장했다. IMF사태에도 아랑곳없이 순탄일로를 걸어 6년 만에 7억원의 빚을 다 갚고 1억6000만원을 더 벌었다.

 

1998년 ‘아는 형의 친구의 친구’인 에디웹 대표 국진성씨를 만나면서 곽씨의 사업은 더욱 확장됐다. 당시 증권회사에 있던 국씨는 주식에 투자해 곽봉규씨의 돈 수천만원을 날렸다. 난처해하는 그에게 “형, 괜찮으니까 일이나 도와달라”고 했다. 국진성씨는 곽씨의 남자다움에 매료돼 큰 광고주들에게 그를 일일이 소개했다. 1999년 곽봉규씨는 주식투자에 참여하게 된다. 1억원의 종자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코스닥시장이 한창 뛰어오를 때였다. 2000년 가을 곽씨는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주식보유액이 수십억원까지 불어났어요. 엄청난 부자가 되는 줄 알았죠. 최고급 차에 기사까지 고용하며 흥청망청 쓰고 다녔죠. 불과 몇 달 후에 내리막을 탈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2001년 주가가 급락했다. 주식이 하루하루 휴지로 변해갔다. 8월이 되자 5억원이 남았다. ‘일부 주식을 팔아 부동산을 사두라’는 충고를 듣지 않은 게 후회막급이었다. 이런 걸 일장춘몽이라 했던가. 2001년 11월 곽봉규씨는 광고회사를 정리하고 인도네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냥 좀 쉬고 싶었다.

“자카르타는 매력적인 도시예요. 적당히 흥청거리고 아주 빠르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가 기회의 땅임을 곽봉규씨는 직감할 수 있었다. 4만명의 한국 교민이 살고 있었지만 그들의 사업은 정형화돼 있었다.

‘인도네시아 빵이나 한국에 팔아볼까?’ 자카르타의 빵맛에 반해 여기저기 빵집을 둘러보던 곽씨는 맥도날드, KFC는 많은데 피자가게가 별로 없는 것에 눈길이 미쳤다. 서울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친구 박중환씨를 불렀다. 자카르타를 둘러본 박씨와 피자업체 전직 임원 두 사람이 공동투자할 뜻을 비쳤다. “자카르타 최고의 피자가게를 만들어봅시다!”

 

 

 

서울 아파트 팔아 ‘올인’

 

2억원씩 투자해 8억원으로 새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외국인 사업체로 허가를 내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뒷돈과 배경이 필요한 나라였다. 한국인 중개업자는 ‘돈만 까먹는 무용지물’이었고 인도네시안 브로커는 돈을 들고 튀었다. 그때 한국 기업의 주재원으로 근무한 아버지를 따라 열아홉 살부터 인도네시아로 건너와 살던 이기향(33)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수십 종의 인허가 서류를 떼는 데만 몇 달이 걸렸을지 모른다. 현지에서 사귄 삼우 주식회사 정재홍(47)사장도 지쳐있던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기향씨의 보수 문제로 서울의 투자자들과 마찰이 일었다. 그 과정에서 이씨가 사직하자 곽씨는 친구 박중환씨의 몫을 제외한 50%의 지분을 사들이기로 결심했다. “현지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과 전화로 일하려니 에너지 소모가 많았습니다. 체질적으로 남 밑에서 일 못하는 스타일이기도 하고요.” 주식으로 벌어서 사둔 삼성동의 아파트를 팔았다. 그로선 그야말로 올인이었다.

 

‘인도네시아의 심장에서 승부를 걸자’는 각오로 가장 비싼 점포를 계약했지만 임대권을 가진 중국인 볼링장 사장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당초 계약보다 점포 면적이 줄어든 데다 볼링장과 연결통로를 엉뚱한 곳에 만들었다. 게다가 볼링장 손님이 피자를 주문하면 판매가의 25%를 내야 한다고 생떼를 썼다. 계약서를 들이밀어도 본체만체했다. 심지어 이엑스몰이 4월에 개장했는데 내부 인테리어를 시작한 2월치부터 점포세를 내라고 우겼다. 분하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가게를 열기 위해선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곽 사장에게 중국인은 두 얼굴이다. 앞으로 싸워야 할 경쟁자인 동시에 주된 고객이다. 사실 인도네시아의 화상(華商)은 그가 넘기에 너무 큰 벽이다. 정치는 귀족이, 경제는 중국인이 사이좋게 나눠먹은 지 40년 넘는 이 나라에서 중국인은 그냥 화교가 아니라 ‘영구적인 지배계층’, 차이니즈 인도네시안이다.

다른 피자업체의 견제도 있었다. 하루는 중국인과 미국인 10명이 몰려와서 메뉴대로 몽땅 주문하더니 맛만 보고 사라졌다. 피자헛 직원이었다. 며칠 후 이민청에서 공무원이 나와 온갖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한국인 직원의 여권을 내놓으라 해서 가져가버리고 재외근로자등록증을 늦게 제출했다고 5일이나 불러내 조사했다. ‘벌금 아닌 벌금’으로 수백만원이 나갔다.

 

그러나 곽 사장은 “화상에게 배울 점도 많다”고 한다. “화상끼리는 경쟁을 줄이기 위해 동종 개업을 피하고 타업종 진출을 도와줍니다. 한상(韓商)은 반대로 몇몇 업종에만 몰리죠. 100여곳의 한국인 식당이 자카르타에 있지만 모두 한국음식만 팝니다. 불고기와 비빔밥에서 벗어난 식당은 우리가 유일합니다.” 화상의 단결력은 익히 알려져 있다. 반공·반중국 세력을 업고 쿠데타에 성공한 수하르토 대통령하에서 1980년 반중국인 폭동이 일어났을 때 홍콩과 싱가포르의 화상이 똘똘 뭉쳐 인도네시아에 대한 경제규제를 무기로 중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했다.

 

지난 4월 3일 레드 토마토는 개업 1주년 사은행사를 가졌다. 삼성에서 협찬받은 휴대폰과 컴퓨터를 사은품으로 내고 연예인을 초청해 파티를 열었다. 1년 동안 30종의 피자와 12종의 파스타를 개발했다. 올해 안에 7개의 직영점을 낼 계획이다. “지금은 지출이 너무 많아 수입이 적지만 분점만 내면 바로 큰 폭의 흑자를 낼 겁니다. 이엑스몰의 엄청난 임대료와 한국인 직원 4명에게 들어가는 인건비가 여러 가게로 분산되기 때문이죠.” 올해 안에 오픈할 쇼핑타운 5군데와 이미 입점계약을 체결했다. 곽 사장의 목표는 “10년 안에 레드 토마토 분점을 200개까지 내는 것”이다. 그리고 크고 멋진 요트를 발리섬에 띄워놓고 한국의 친구들을 초청할 것이다. “실수투성이였던 내가 오늘까지 오게 된 건 모두 그들 덕분입니다. 친구들은 나의 추억이자 기둥이며 미래의 꿈이죠.”


◆ 레드 토마토를 이끄는 4명의 한국 청년. 왼쪽부터 강진호 김백주 곽봉규 박진용. 서른 아홉살의 곽봉규 사장은 아직 싱글이다.

◆ 이엑스몰 1층의 레드 토마토 실내.

◆ 자카르타 중심가의 쇼핑문화공간인 이엑스몰.

◆ 10명의 주방팀이 쉴 새 없이 피자와 파스타를 만들어내고 있다.

 

곽봉규 사장이 말하는 ‘해외 창업 성공전략 5’

 

1. 최고급 한류(韓流) 이미지로 상류층을 공략하라.

우리나라보다 못사는 나라일 경우 한국 상품과 문화는 과거 우리가 미국식에 열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류층에 어필할 수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는 한류의 영향권으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선망이 있다. 삼성 휴대폰, 이효리의 뮤비, 싸이의 음악에 그들은 매료된다. ‘한국의 문화 콘텐츠’를 함께 팔아라.

 

[생각] 자금사정과 소싱능력이 충분하다면... 상류층 공략이 최고지요!

 

2. 한국에는 흔하지만 외국엔 없는 것을 찾아라.

레드 토마토에선 한국의 빙과인 ‘찰떡 아이스’를 접시에 담고 약간의 데코레이션만 가미해 디저트로 내놓았는데 히트를 쳤다. 한국선 흔하지만 인도네시아인에게는 떡 속에 아이스크림이 든 희한한 음식이었다. 핸드터미널과 같은 전산시스템도 IT강국 코리아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졌다.

 

[생각] 현지인입장에서 보았을때 우리에게는 흔한 것이 그들에겐 SOMTHING SPECIAL 할 수도 있지요.  해외창업 아이템을 선정할 때는 반드시 역지사지의 포지션에서 따져봐야 답이 나옵니다.

 

3. 쉽게 만들 수 있는 것보다 고객이 원하는 걸 만들어라.

음식의 경우 현지인의 입맛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다. 빵을 좋아하는 인도네시아의 틈새시장으로 피자를 찾아냈고, 매운 삼발소스를 즐기는 그들에게 맞는 토핑재료를 개발했다. 한국인이라고 한국음식만 고집해서는 안된다.

 

[생각] 바로 이거지요.^^ 자기가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팔릴만한 것을 만드는 겁니다.

 

4. 현지 직원에게 인센티브를 주라. 사장이 아닌 동지가 되어라.

해외창업은 현지 직원과의 융화가 성공의 열쇠다. 인도네시아인은 순수하고 자존심이 강하다. 그들을 존중하고 ‘이곳에서 일하는 게 자랑스럽다’는 소속감을 준다. 종업원이 만족해야 질 좋은 서비스가 나온다.

 

[생각] 종업원은 직원이기 이전에 고객입니다. 특히 해외사업에서는 유일한 우군(友軍)이기도 하지요.^^

 

5. 현지인에게 적당히 져주라.

어쨌든 남의 나라다. 외국인이 잘 되고 자국민이 경쟁에서 밀리는 것을 좌시할 나라는 없다. 억울하고 편파적인 대접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라. 한 발 물러서서 내 편으로 만드는 지혜가 필요하다.

 

[생각] 추천! 또 추천! 강추!! "현지인에게 적당히 져주라!"

                바득 바득 이기려고만 했던 북야 이넘은 이부분을 반성해야합니다.

                지는 게 아니라.. 져주는 것! 이게 핵심포인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