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보바리’는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대표작이자 처녀작입니다. 평범한 시골의사인 보바리의 아내 에마는 몽상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두 명의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다 빚에 몰려 비소를 먹고 자살에 이릅니다.
오늘의 안목에서 보자면 진부한 불륜소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플로베르는 이 통속적이고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형식에 대한 절대적인 추구를 통해 걸작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53개월에 걸쳐 완성된 이 작품은 발표되자마자 공중도덕에 악영향을 미치고 종교를 모독하고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고발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작품 속에 나타나는 에마 보바리의 행실을 문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뒤, 철학자 쥘 고티에는 저 유명한 ‘보바리즘(Bovarism)’이라는 말을 만들어냈습니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기능’, 다시 말해 자신을 다른 존재로 착각하는 상상과잉 증세를 문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에마 보바리는 보바리즘에 의해 희귀하고 특수한 존재, 정신적으로 병적인 징후를 보이는 문제적 캐릭터가 되었습니다.
마담 보바리가 태어난 지 150여 년, 21세기의 관점에서 바라본 문제적 캐릭터는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녀가 지금 서울 거리에 나타난다면 촌스럽다는 이유로 손가락질을 받고, 그녀의 허영심이 문제된다면 가소롭다고 코웃음을 칠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사이버상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돈으로 사는 시대, 유명 연예인을 따라잡는 패션으로 개성을 복제하고, 어린 여학생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원조교제를 불사하고, 외관상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는 주부가 성매매 현장으로 뛰어드는 시대에 19세기적 문제아인 마담 보바리는 명함을 내밀 처지가 못 됩니다.
한때 무전유죄 유전무죄(無錢有罪 有錢無罪)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무미유죄 유미무죄(無美有罪 有美無罪)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몸에다 보톡스 콜라겐 실리콘을 삽입하고 외모지상주의로 인해 ‘성형중독’이라는 병적 증세까지 생겼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살을 빼려다 목숨을 잃는 사람까지 생겼습니다. 기혼여성의 35%가 자식이 없어도 된다고 말하고 결혼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율은 50%를 넘지 못합니다. 마담 보바리를 무색하게 만드는 이 모든 사회적 징후는 ‘보바리즘’이라는 언어의 효용성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이 모든 사회적 징후가 의미하는 공통점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자신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증세, 다시 말해 자신을 외면하려는 이중인격적 욕망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아무리 자신을 외면한다고 해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마담 보바리가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도 결국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본질을 바꿔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평생에 걸친 정신적 노력뿐입니다. 요컨대 외형만으로 내용까지 바꿀 수 없습니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가 걸작인 이유는 내용이 곧 형식이 되고, 형식이 곧 내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식으로 말하자면 ‘황금의 표지에 황금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 가장 좋은 책입니다. 감동을 주는 책, 감동을 주는 사람, 다를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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