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한중일 종합정보

오바마 ‘카이로 연설’의 감동

박영복(지호) 2009. 6. 19. 06:30

오바마 ‘카이로 연설’의 감동

 

13억 무슬림에 화해 메시지… 3년전 부시 연설과 내용은 닮았지만 ‘실행’에 대한 기대 커져

 

 

“중동 전역의 여러분께 직접 말씀드리려 한다. 미국은 평화를 원한다. 여러분 사이에 숨어든 극단주의자들은 서구 사회가 이슬람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선동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저 여러분을 혼란에 빠뜨리고 자기들의 테러를 정당화하기 위한 발언일 뿐이다. 우리는 이슬람을 존중한다.”

미국의 대통령이 연단에 섰다. 그는 연설 내용의 대부분을 중동 각국의 현안과 그에 대한 미국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데 집중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된 그의 발언은 이내 이란으로 옮겨갔다.

▲ ‘같은 메시지, 다른 대통령, 새로운 시작은 가능할까?’ 6월4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남단 라파에서 이슬람주의 정치단체 하마스 소속 무장요원들이 얼굴을 가린 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연설 중계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 연합/ AP PHOTO/ EYAD BABA

 

“이란 국민들께 말씀드린다. 미국은 여러분을 존중한다. 미국은 이란을 존중한다. 미국은 이란의 풍부한 역사와 역동적인 문화, 이란이 인류 문명에 이바지한 바를 존경한다. 미국은 이란이 진정으로 평화적인 핵에너지 프로그램을 추구하는 데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20여 차례 박수와 환호 보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그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오랜 세월 부패와 폭력, 그리고 매일이다시피 벌어지는 점령으로 인한 모욕으로 고통받아왔다”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란 두 개의 민주적 국가가 평화와 안정 속에 공생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슬람주의 정치단체 하마스 쪽에도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그는 “하마스 지도부가 팔레스타인 주민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테러를 포기하기를, 이스라엘의 존립 권리를 인정하고 기존에 맺었던 평화협정을 존중하기를 바란다”며 “평화는 성취할 수 있으며, 민주적인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 또한 분명히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유는 선택하는 것이다.”

6월4일 오후 버락 후세인 오바마 미 대통령이 이집트 명문 카이로대학 그랜드홀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단에 선 오바마 대통령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채 50여 분에 걸쳐 전세계 13억 무슬림을 향해 ‘새로운 시작’이란 제목의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연설 모두에 ‘슈크란’(고맙습니다)이나 ‘앗살라무 알라이쿰’(평화가 그대와 함께하기를) 따위의 아랍어를 곁들였다. 이슬람의 성서 <쿠란>의 구절도 세 차례나 인용했다. 자신의 생부가 케냐 출신 무슬림이라거나,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개인사도 거론했다. 강당을 가득 메운 청중은 20여 차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1월 취임 이전부터 ‘이슬람권과의 화해’를 위해 ‘카이로 연설’을 면밀히 준비해왔다. 취임식 직후 외국 언론과 한 첫 단독 인터뷰의 상대로 아랍권 뉴스 전문 채널 <알아라비아방송>을 고른 것도 이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어 지난 3월 페르시아력으로 새해 첫날인 ‘누루즈’를 맞아 이란 국민들에게 축하와 화해의 메시지를 동영상에 담아 보내기도 했다.

 

또 지난 4월 초 터키를 방문해서는 젊은이들과 직접 만나 “미국과 이슬람 세계의 관계를 재건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다”며 “미국은 이슬람과 전쟁을 벌이는 게 아니며,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변화를 지켜봐달라”며 “조만간 중동 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할 것”이라고 덧붙인 바 있다. ‘카이로 연설’이 그 무대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연설 내용은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미국의 다른 대통령이 행한 게다. 때는 9.11 동시테러 5주년이 갓 지난 2006년 9월19일 오전, 장소는 뉴욕의 유엔본부, 연설을 한 이는 미국의 제43대 대통령 조지 워커 부시다.

 

그럼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은 얼마나 달랐을까? 이날 오바마 대통령은 모두 7가지 주제에 대해 폭넓은 비전을 제시했다. 첫째, 모든 형태의 극단적 폭력과 맞서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둘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강조했다. 셋째, 핵무기 보유국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얘기했다. 넷째,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밝혔다. 다섯째, 종교의 자유 문제도 거론했다. 여섯째, 여성의 인권에 대해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경제개발과 이를 위한 미국의 지원계획도 언급했다.

 

이날 연설문의 초안은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잡은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오바마 대통령은 “9·11 동시테러는 미국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줬고, 그에 따른 공포와 분노는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일부 미국의 가치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며 사실상 미국의 ‘과오’를 인정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 등 대다수 미 언론들도 “지금까지 오바마 대통령이 내놓은 연설 가운데 최고”라고 극찬했다. 그만큼 문장은 유려했고, <쿠란>과 <성서>, <탈무드>를 넘나드는 인용은 적절했으며,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했다. 부시 전 대통령의 유엔 연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두 사람이 연설을 통해 강조한 핵심 메시지가 고스란히 닮아 있다는 점이다.

 

이날 오바마 대통령은 “이슬람권에 직접 메시지를 전달하겠다. 미국은 이슬람과 전쟁을 벌이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부시 전 대통령도 유엔 연설에서 같은 언급을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어떤 형태의 정부도 본질적으로 강요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역설했다. 부시 대통령이 ‘자유’를 언급한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오바마 대통령과 부시 전 대통령 모두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감내해야 하는 “점령으로 인한 일상적인 모욕”을 언급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이란의 평화적 핵 이용권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호의적 반응의 이유 “부시가 아니기 때문”

부시 전 대통령의 유엔 연설은 쉬이 잊혀졌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에 대한 반응은 사뭇 달랐다. 미국에 비판적인 이슬람주의 정치단체들조차 “출발은 좋다”고 평가할 정도다. 대체 차이가 뭘까? 미 시사주간지 <뉴리퍼블릭>은 6월5일 인터넷판에서 “한마디로 오바마는 부시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 차례 연설로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온 불신을 뿌리 뽑을 순 없다. 오바마 대통령 스스로 인정한 바다. 전세계 무슬림들이 그의 연설에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부시 전 대통령의 발언과 대동소이한 얘기를 했지만, 결정적으로 그는 부시 전 대통령이 아니다. 바로 그 이유로 세계가 그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다. 결코 작은 성과가 아니다.”

 

방향은 옳게 잡았다. 하지만 말은 말일 뿐이다. 말의 힘은 행동으로 얻어진다. 이집트 이슬람주의 정치단체 ‘무슬림형제단’의 이브라힘 후다이비는 <로스앤젤레스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에 대한 이슬람권의 정서를 이렇게 대변했다. “이제 실행이 필요한 시점이다. 악마는 항상 디테일에 숨어 있는 법이다.” ‘새로운 시작’을 앞둔 오바마 행정부가 귀담아들을 만하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