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의 역사 | |
캄보디아의 역사는 1세기로 거슬러올라가 6세기까지 인도문명의 영향 아래 부남(扶南) 왕국이 번영하였다. 부남은 해상무역을 통하여 6세기 후반까지 발전하였으며 이어서 북방에서 일어난 진랍(眞臘)이 부남을 병합하여, 인도차이나반도의 대국으로 등장하였다. 그후 8세기 초에는 수진랍(水眞臘)과 육진랍(陸眞臘)으로 분열되었다가 9세기 초에 자야바르만 2세가 다시 통일하여, 앙코르 지방에 도읍을 정하고 앙코르왕국을 건설하였다. 앙코르왕국은 진랍의 전성기로 12세기 말까지 번영하였으며, 그 사이 인도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앙코르톰, 앙코르와트 등 거대한 건축물이 조영되었다. 이 당시 앙코르의 건축과 부조(浮彫)는 크메르 미술의 최고봉을 이루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13세기에는 타이인(人)의 압박이 시작되었으며, 14세기에 아유타야왕조의 세력이 커지자 1434년에는 앙코르를 포기하고 남쪽의 프놈펜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다. 한편, 베트남은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참파왕국을 붕괴시키고 크메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이후 크메르는 타이, 베트남 양 민족의 압박을 받아 쇠퇴해갔다. 코친차이나에 진출한 프랑스의 개입으로 1863년 타이를 물리쳤으나 프랑스의 보호국이 된 이래 90년 동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었으며, 왕제(王制)는 형식적으로 존속되었다. 1940년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하여, 노로돔 수라마리트 국왕 대신 19세의 노로돔 시아누크를 즉위시키고 한때 지배하였으나 1945년 3월 일본의 후원하에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일본 패전 후 프랑스가 지배권을 회복하였으나 1947년 5월 노로돔 시아누크는 캄보디아왕국 헌법을 공포하여, 프랑스도 1949년 11월 프랑스연합 내의 한 왕국으로 이를 인정함으로써 한정된 범위 내에서 독립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완전독립은 1954년 7월 제네바에서 인도차이나 휴전협정이 성립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였다. 독립 후에는 사실상 노로돔 시아누크의 지배체제가 이루어졌다. 노로돔 시아누크는 1955년 4월 왕정지지자 정당을 소집하여 ‘사회주의 인민공동체(상쿰)’를 결성하고 왕위는 아버지에게 양위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하였고, 같은 해 9월 국민의회 총선거에서 상쿰이 의석 전체를 독점하였다. 노로돔 시아누크는 1960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다시 왕위에 올랐고, 독립 이후 폴포트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유학파 지식인계층이 귀국하여 1963년 학생시위를 벌인 후 노로돔 시아누크의 대규모 좌익 숙청으로 지하조직화되었다.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공산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국내의 정치적 안정에 불안을 느낀 노로돔 시아누크는 1961년 타이, 1963년에 베트남, 1965년에는 미국과 단교하고 차차 용공정책으로 기울었다. 캄보디아는 1965년 월맹에게 캄보디아 동부지역에 보급로 설치를 허용하였고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캄보디아까지 확대하였다. |
캄보디아의 경제 | |
캄보디아는 1975년 이전에는 전적으로 농업, 특히 쌀과 고무에 의존하였으며, 캄퐁참 부근에 철광이 있을 뿐 지하자원은 매우 빈약하다. 1963년에 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은행의 국유화, 수출입의 국가독점, 주요 산업체의 국가관리 등의 조치를 취하였으며, 론놀의 크메르공화국은 공업화 정책을 취하기도 하였다. 폴포트, 이엥사리 정권시대에는 공산독재를 행하여 전체 생산수단의 국유화, 화폐의 폐기, 생활필수품의 소량배급제를 실시함으로써 극심한 생산의 정체를 가져왔고, 국민경제는 파탄에 이르렀으며 심각한 식량부족을 초래하였다. 이에 헹삼린 정권은 농·공업의 발전을 기초로 하는 국민경제의 회복, 시장경제에 따른 계획경제, 강제적인 ‘공동노동·공동식사’ 제도의 폐지, 강제노동의 폐지와 자발성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노동, 통화·은행·상품유통의 회복을 경제정책으로 내세웠다. 1980년 3월 25일 신통화 리엘의 유통이 시작되었으며 장기적인 내전으로 경제가 피폐해 있어 경제재건책의 일환으로 1982년 11월 앙코르와트 관광이 재개되었다. 캄보디아 인구의 80%가 종사하는 농업은 국가경제의 지주를 이룬다. 주산물은 쌀인데 전체 경작지의 85%를 차지하며 메콩강과 톤레사프 주변이 중심지역이다. 그밖에 고무, 옥수수, 목화, 야자, 잎담배 등의 산물이 있다. 폴포트, 이엥사리 정권은 농지를 모두 국유화하고 주민의 대부분을 강제로 농업노동에 종사시켜 1977년 이후에는 농업생산의 회복을 선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FAO(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of the United Nations: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의 현지조사에 의하면 1982년도 쌀 부족량은 25만t이나 되었다. 한편, 톤레사프호(湖)의 담수어업도 경제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공업은 매우 낙후된 상태로, 1975년 이전에는 소규모 공장이 있었으나 대부분 농산물 가공공장이었다. 비교적 규모가 큰 공장은 국영 또는 공사(公私) 합동으로 경영하였고 중소기업은 개인기업화되어 있었으나 폴포트·이엥사리 정권은 모든 기업을 통틀어 국유화하였다. 주민을 농촌으로 강제소개시키고 강제수용, 강제노동 정책을 폈기 때문에 공업생산은 사실상 중단상태에 있었다. 헹삼린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야 겨우 기업활동이 재개되었다. 중요공업으로 방적, 알코올, 제지, 시멘트, 비료, 정미, 양조, 일용품 등의 공장이 있다. 수출의 주종은 농산물인데 쌀과 고무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시아누크 시대에는 해마다 쌀 10만∼50만t, 고무는 2만∼5만t을 수출하였으나 내전으로 급감하여 1975년 공산정권 성립 이후에는 수출이 거의 정지되었다. 시아누크 시대에는 프랑스·일본·중국·싱가포르 등이 주요 무역거래국이었고 폴포트·이엥사리 시대에는 중국이 주거래국이었다. 헹삼린 정권에서는 러시아와 동독 등이 주거래국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한때 일본과의 무역거래가 있었다. 시아누크 시대에는 주로 프랑스로부터의 프로젝트에 의한 원조가 대부분으로 프놈펜 공항의 확장, 시아누크빌항(현 캄퐁참)의 건설이 이루어졌으며, 론놀 시대에는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가 대신 이루어져 그 액수는 해마다 수억 달러에 달하였다. 폴포트·이엥사리 시대에는 중공이 원조공여의 주역이 되었으며, 1975년 8월 중국-캄보디아 경제기술협력협정, 1977년 9월 중국-캄보디아 경제원조기술협력협정 등을 근거로 주로 무상원조의 형태로 10억 달러 이상을 제공받았다. 헹삼린이 들어서고 나서는 베트남, 소련 등의 원조가 강화되었으나 한때는 국민의 반수가 기아에 시달렸다. 최근에는 식량사정이 다소 개선되는 추세이다. 1989년 시장경제을 도입한 이후 외국인 투자를 유인하려는 제도적 노력 등에 의하여 1993~1996년간 국내총생산이 연평균 5.5%로 성장하였다. 1997년 7월 훈센의 쿠데타로 인하여 1998년 말까지는 경제성장률이 1%로 떨어졌으나 1999년에는 다시 4.3%로 올라갔다. 2000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30억 9000만 달러이고, 주요산업은 농업으로 국내총생산의 36%를 차지한다. 무역부문에서는 총수출액이 10억 5000만 달러, 수입액이 14억 3000만 달러이며, 주요수출품은 봉제품·목재·고무·어패류와 대두·옥수수 등 농작물, 주요수입품은 석유제품·담배·돈·건설자재·자동차· |
캄보디아의 주민 | |
캄보디아인(크메르족)이 전 인구의 95%를 차지하며 그밖에 중국인·베트남인(人)·참족(族)·고산족 등이 있다.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중국계는 5.1%를 차지하는데, 출신지는 차오저우[潮州]·광둥[廣東]·푸젠[福建]·하이난[海南] 등이다. 베트남인은 1977년까지 4.5%를 차지하여 어업 외에 목수, 미장이, 이발, 기계수리 등의 기술적 직업에 종사하였으나, 1977년부터 베트남-캄보디아 분쟁으로 대부분 베트남으로 도피하였다. |
캄보디아의 자연 | |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 반도 남동부 캄보디아평원을 차지하며 메콩강(江)이 중앙을 관류하는 평원국가이다. 지형은 남쪽을 제외한 3방향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산지의 중앙에는 넓은 평원이 전개되어 있어 마치 얕은 대접 모양의 지형을 이룬다. 주위의 산지는 가장 높은 남서부의 카르다몸(크라반)산맥도 해발고도 1,000∼1,500m에 불과하다. 이들 산지는 중앙부를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져 있으며, 서부에서 가장 움푹 팬 부분이 톤레사프(‘큰 호수’라는 뜻)이다. 중앙의 캄보디아평원은 처음에는 해저지역이었으나 충적작용에 의해 평야로 바뀌었고, 해발고도 20m부터 수백m에 이르는 작은 구릉(프놈)이 산재하여 단조로운 평야의 경관을 깨뜨린다. 국토의 약 3/4은 삼림으로 덮여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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