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西安) |
2천년 황릉의 비밀을 간직한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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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은 옛 장안을 기초로 한 도시다. 장안이 중국의 수도였던 것은 당대가 처음이 아니었다. 유방이 세운 한(漢)왕조도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유방이 경쟁자였던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해 왕조를 연 것은 기원전 202년의 일이었다. 이 왕조는 200년 남짓이 이어오다가 왕망(王莽)에 의해 멸망했다. 그 뒤에 한의 일족이었던 유수(劉秀)가 천하를 통일해 후한을 세웠는데 그때의 장안은 왕망의 난으로 폐허가 되었기 때문에 동쪽의 낙양을 수도로 정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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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보통 유방(고조)이 세운 한을 '전한(前漢)', 유수, 곧 광무제(光武帝)가 세운 왕조를 '후한'이라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전자를 '서한(西漢)', 후자를 '동한(東漢)'이라고 한다. 수도의 위치에 따라 부르는 방법이 정해진 셈이다. 당이 멸망한 뒤 10세기 전반은 반세기동안에 '오대(五代)'로 불리는 다섯 왕조가 일어섰다가 무너진 시기였는데 그렇게 단명한 왕조 가운데도 '후한'이라는 왕조가 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동한'이라 부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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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전의 왕조였던 진의 수도도 서안 시의 바로 북서쪽인 함양이었다. 넓게 생각하면 거의 같은 지역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중국에서는 산의 남쪽이 양이고 북쪽이 음이며, 하천의 경우는 그 반대로 강의 남쪽이 음이고, 북쪽이 양이다. 함양은 구준산(九峻山)의 남쪽이며, 위수(渭水)의 북쪽에 있다. 산이든 강이든 모두 양기를 띠기 때문에 '함양'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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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이곳에 자리를 잡기 전에도 인류는 생활조건이 좋은 이 지방에 살고 있었다. 신석기시대의 앙소(仰韶)문화에서 용산(龍山)문화로 이어진 시기의 유적들이 서안 근처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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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으로 발견된 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53년에 발견되어 그 다음해부터 발굴을 시작한 반파촌(半坡村)의 유적이다. 그것은 공동묘와 구덩식 저장창고, 그릇을 굽던 가마터 따위가 있는 주거지의 흔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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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그 유적에는 철골로 된 둥근 지붕이 받치는 거대한 체육 관 같은 박물관이 있다. 발굴 현장을 그대로 견학할 수 있게 해놓아 사람들은 먼 옛날 조상들이 생활하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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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이 천하를 통일했을 때 장안과 낙양이 도읍지 후보에 올랐는데 낙양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천하'를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낙양 쪽이 천하의 중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장안을 지지했던 누경(婁敬)은 이 지방을 '천부(天府)'라고 불렀다고 한다. 천연의 보물창고라는 의미다. 유방이 장안으로 도읍을 정하 것은 누경의 주장에 장량(張良)이 찬성했기 때문이다. 유방은 장량을 전면적으로 신뢰했다. 장량이 장안에 찬성했던 것은, 낙양은 토지가 좁아 사방 수백 리에 지나지 않으며 토지도 황폐했던데 비해 장안은 기름진 평야가 천리로, 남으로는 풍요로운 음촉지방이 있고, 북으로는 호족과 대완족과 통상을 통한 이익이 있으며, 더구나 지형이 험난해 천연의 요새가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서한의 수도였던 장안도 내란이 일어나 황폐해졌기 때문에 후한은 낙양을 수도로 삼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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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장안에 다시 황금시대가 찾아왔다. 당의 수도였던 장안은 당시 세계에서 서로마와 어깨를 견주는, 동쪽 문명의 가장 큰 중심지가 되었다. 장안과 로마를 연결하는 교역로인 실크로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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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장안은 사실 지극히 짧은 동안에 이곳에 있었던, 수가 쌓은 대흥성(大興城)을 계승한 것이다. 대당(大唐)시절의 장안이라 하면 매우 화려한 느낌이 들지만, 당대 초기에는 매우 소박했다. 태종(627-649)의 시대는 그 연호가 '정관(貞觀)의 치(治)'였듯 정치가 매우 안정된 시기를 이루었다. 그다지 무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공사도 벌이지 않았다. 당시 대신으로 있던 위징(魏徵)의 집도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에 가까운 상태여서 태종이 보다 못해 닷새동안 정전(正殿)을 세워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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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궁전이나 성벽, 누문, 그 밖의 큰 건축공사가 벌어진 것은 정관의 치로 재정이 풍부해진 고종 이후의 일이었다. 특히 현종은 호화로운 것을 좋아해서 수도인 장안도 그 성격을 그대로 반영해 굉장히 호화로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당의 전성기에 장안에는 세계 여러 곳에서 상인이나 사절단이 찾아왔다. 육로인 실크로드를 통해 온 사람들도 있고 바다를 통해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지닌 사상과 문명도 함께 들어왔다. 불교는 후한 말기에 중국에 전해졌다고 하는데 역시 전성기는 당대였다. 각지에 대운사나 개원사가 칙령에 따라 건립되었다. 장안은 동서로 10km, 남북으로 9.5km였다. 장안성내는 높이 5m인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궁성의 남쪽 정문이 승천문이고, 황성의 남쪽 문은 주작문이었다. 주작문에서 남쪽으로 가는 통로가 수도의 주요 거리였으며, 주작가라 불리던 이 거리는 폭이 150m나 되었다고 한다. 이 거리를 중심으로 도시는 동가와 서가 둘로 나뉘었다 양쪽 구역은 110개 동네로 이루어졌는데 각 동네에 흥도, 광록, 무본, 태평, 평강, 연수같은 이름이 붙었다. 동서 양쪽 거리에는 동시와 서시라는 커다란 시장이 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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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은 황태자 시절에 동가의 동시 북쪽에 있는 흥경궁에 살았는데, 그곳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해 즉위한 뒤에도 그곳에 많이 지냈다고 한다. 현재의 흥경공원이 지난달 흥경궁의 흔적이다. 그 남쪽으로 교통대학교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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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에 와본 사람은 이 설명에 고개를 갸우뚱거릴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분명히 그곳은 성벽 안쪽이어야 하는데 흥경공원으로 가기 전에 이미 성벽을 나온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서안 시에는 곳곳에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그것이 명대 초기인 14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당대의 규모보다 훨씬 축소된 것이다. 당대에 서안이 수도가 된 적은 없었다. 명은 처음에는 남경을 수도로 삼았다가 북경으로 환도했다. 그렇지만 서안이 서북의 요충지라는 점은 확실하게 인식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성을 세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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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말기에 서안은 주전충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당이 멸망하기 3년 전인 904년에 절도사였던 한건이 새로운 성을 축조했지만, 그것이 황성을 중심에 둔 규모가 작은 것이었다. 명대에 이루어진 보수도 거의 그때의 규모를 따랐다. 그것을 이어받은은 것이 현재의 서안 시다. 지금 시내에 있는 종루와 고루도 명대 초기에 만들어졌고, 서안이라는 이름도 명대에 붙여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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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종루에 올라가보자. 이 커다란 건물은 해방 전에 兵舍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황폐해졌다고 하는데 지금은 문화재로 보호, 관리되고 있다. 종루에 오르면 시가지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명대의 규모를 기초로 한 서안 시는 당대 장안 규모의 6분의 1밖에 안된다. 멀리 보이는 대안탑(大雁塔)이나 소안탑(小雁塔)도 과거에는 장안성 안 한가운데쯤에 있었다. 시내는 가옥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해방 전에 50만에도 미치지 못하던 인구가 지금은 250만으로 늘어났다. 시가지는 옛 성보다 넓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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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 장안의 인구는 약 100만이었다고 한다. 그 사실로 짐작해보면 장안은 도로가 휑뎅그렁하게 넓었으며, 넓은 정원이 있다. 민가도 드문드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시대와 생활양식이 지금과는 많이 달라 현재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당의 장안을 그리워할 때는 머릿속의 회로를 조금 수정해야만 할 것이다. 중국의 역사에는 이름 높은 고승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사람은 삼장법사 현장(경·율·논의 모든 불교 경정에 정통해 삼장이라 불리기도 하는 중국의 승려. 인도에서는 목샤데바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일 것이다. 『서유기』는 지어낸 이야기지만, 현장이 18년 세월에 걸쳐 인도에 가서 중국에 없는 경문을 가지고 돌아온 것은 사실이다. 당시의 여행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는가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현장은 의지가 강한 승려였다. 그는 귀국 후에 경문을 해석하는 일에 종사했는데, 그 본거지가 되었던 곳이 '대자은사(大慈恩寺)'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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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솟아있는 대안탑에는 현장이 가져온 경문이 봉안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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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탑은 위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7충 塼塔으로, 높이는 64m나 되어 있다. 이 주황색 거대한 탑은 장식다운 장식이 거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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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층에는 아치모양의 창이 있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어진 것 같지만 안정감이 넘쳐난다. 같은 당대의 것으로, 7세기 말 대안탑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천복사탑이 세워졌는데 대자은사의 탑과 대치하기 때문에 소안탑이라 했다. 16세기 중반 명의 가정(嘉靖)연간에 일어났던 지진으로 두 쪽 나서 그 상처의 흔적이 아직까지 확실하게 남아 있다. 서안의 하늘에 솟아 있는 이 두 탑은 당의 경치를 가장 선명하게 우리에게 전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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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나 문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섬서성 박물관을 꼭 찾아보는 것이 좋다. 그곳은 당대의 국자감이 있던 곳으로 국자감은 중앙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천하의 영재들이 이곳에 모여 교육을 받았다. 옛날의 학문은 물론 유교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학교에는 반드시 공자를 기리는 사당이 있었다. 이곳에도 공자를 모신 문묘가 있었다. 섬서성 박물관이 소장한 문물들의 전시회가 해외에도 몇 번이나 열렸다. 실크로드 문물전에도 삼채사자, 기마수렵용 등 삼채 여러 점과 정교한 백석보살상의 머리 부분, 금은이나 유리 세공품이 전시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해외에서 전시하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이곳에 있는 碑林이다. 서안 부근에는 비석이 엄청나게 많이 서 있다. 그것이 길거리에 그대로 방치되면 닳아서 글자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각지의 비석을 모아 커다란 건물 안에 들여놓았다. 비바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말이다. 죽 늘어서 있는 크고 작은 비석들이 마치 숲을 이룬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碑林이라 부른다. 이곳에 있는 비석의 수는 3000기에 가깝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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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석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당대의 13經, 大秦敎流行中國碑, 그밖에 顔眞卿이나 劉公權 등의 字帖이다. 글씨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장소다. 다만 너무 많이 있기 때문에 1기씩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 유감스럽다. 매일 이곳에 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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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 교외로 나가면 역사 유적지를 더 많이 볼 수 있다. 산과 강,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역사가 스며 있는 곳이다. 교외에 행락객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은 역시 華淸池다. 화청지는 서안의 동북 임동현에 속하며, 여산(驪山)기슭에 있는 온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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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때부터 '神女온천' 이라는 이름으로 알렸다. 당 현종이 723년에 이곳에 온천궁을 짓고 나중에 이름을 화청궁이라고 바꾸었다. 백거이가 양귀비를 노래했던 「長恨歌」에도 이런 구절이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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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추위를 녹이기 위한 화청지 온천수로 매끈매끈하게 지방 덩어리를 씻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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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거이의 이 시로 온천이 더욱 유명해져 여산 기슭의 온천을 화청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양귀비를 총애했던 현종은 여산에 모란을 심고, 마음에 드는 가신들에게 별장을 만들어 주는 등 사치스러운 궁전이나 누각을 여기저기에 지었다. 어느새 여산은 六門, 十殿, 四樓, 三閣, 五湯이 있는, 규모가 큰 별궁지대가 되었다. 현종은 화청지에서 정무를 보는 일이 잦아졌다. 호화로운 생활을 좋아했던 현종다운 행동이었다. 이윽고 정치는 부패하고, 재능도 없는 양귀비 일가가 관직에 올라 정치 싸움도 많이 일어났다. 결국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고 현종은 서안에서 탈출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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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몇백 년이 지나 지금은 당대의 건축물 대부분이 사라지고 없다. 현재의 건물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18세기 이후에 세워진 것이다. 1900년 의화단의 난으로 서태후는 북경에서 서안으로 도망쳐 와 화청지 주변에 행궁을 지었다. 현종이든 서태후든 화청지는 정권을 잃어버린 군주와 인연이 깊은 곳이 되었다. 근대사에서도 화청지에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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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 뒤 전 중국에서 일본의 침략에 항의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蔣介石는 애국적인 항일운동을 탄압하고 공산당과 대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중국공산당 쪽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그와는 반대로 항일민족통일전선정책을 했다. 장제스는 張學良을 서북사령관으로 임명해 계속 공산당과 싸우도록 했다. 張學良의 군대는 동북군으로 지난날 일본군과 싸웠던, 항일의식이 굉장히 높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연안의 공산군과 대치해 있는 동안 그 영향을 공감하게 되었다. 張學良은 蔣介石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구국을 위해 활동하라고 충고했다. 蔣介石는 물론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대 공산군 작전이 진행되지 않은 것에 화가 나 스스로 서안에 들어와 버렸다.서안에 도착한 蔣介石는 1936년12월 12일 화청지의 숙소에서 머물렀다. 張學良 일행은 蔣介石를 감금하고 내전 중지와 항일구국을 요구했다. 蔣介石도 드디어 張學良의 요구를 받아들여 12월 25일에 풀려났다. 이 일을 계기로 이른바 제2차 국공합작이 맺어졌다. 다음해인 1937년 항일통일전선에 의해 중국공산군은 '중국혁명군 제팔로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나중에 '국민혁명군 제18집단군'이라 이름이 바뀌었지만 일반적으로는 팔로군으로 알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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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합작으로 당시 국민당이 지배하던 서안 시에도 중국공산당이 사무실을 차리게 되었다. 그곳에는 '국민혁명군 데18집단군 주섬서병사처'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합작이라지만 국민당은 엄중하게 공산당을 감시했으며, 사무소 가까이에 있는 인력거꾼들도 사실은 국민당에서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항일전쟁 중에 각지의 많은 청년들이 연안으로 향했는데, 그들은 우선 서안의 사무소 간부들이 모두 연안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본래의 상태 그대로는 아니다. 그것을 복원한 것이 현재 혁명유적이 되었다. 서안이라 하면 오래 된 유적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근대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지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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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의 북쪽 기슭에는 진시황릉이 있다. 여산릉이라고도 하는 황제의 묘는 70만 명에 이르는 죄수들을 동원해서 대규모로 만들었다. 세 번에 걸쳐 지하 수맥까지 파 내려가 그 안에 궁전과 망루를 짓고, 백관의 자리를 만들었으며, 진귀한 물건들을 궁전의 창고에서 옮겨왔다. 죽은 뒤에도 제왕의 생활을 계속하려 했던 것이다. 『사기』에 따르면 묘 안에 수은을 흐르게 해서 백천(白川), 강, 대해를 만들고 기계장치로 끊임없이 수은이 떨어지게 했다고 한다. 도굴꾼이 가까이 오면 기계장치의 화살이 저절로 당겨지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사기』는 진시황릉의 전모를 설명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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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진시황릉의 동쪽에서 거대한 도용갱(陶俑坑)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최초로 발굴된 부분은 실물 크기 병사 도용이 한 줄에 72개씩 선 3열 횡대였다. 그 뒤에 40인 종대가 나란히 있어서 모두 6000개에 이르는 도용이 묻혀 있었다고 추정된다. 진시황은 죽은 뒤에도 군대가 지켜주고 있었다. 발굴은 그 뒤에 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반파박물관처럼 현장에 철골을 설치해 둥근 지붕을 덮은 대 박물관이 만들어졌다. 이곳은 서안을 찾는 사람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주는 장소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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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왕조는 각각 수도 근처에 능묘를 만들었기 때문에 서안 근교에는 진시황릉을 비롯해서 서한, 당대 왕실의 능묘가 흩어져 있다. 황제들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 따로 묘를 만들었지만, 그 안에서 잠자고 있으면 외로우리라 생각했는지 백성들을 강제적으로 묘지 가까이 이주 시켰다. 한의 무제는 살아 있을 때 자신을 위해 무릉(茂陵)을 만들면서 그곳에 재산이 300만 전(錢)이 넘는 부자들을 이주시켰다. 그와 같은 자격요건을 정하니 무릉 근처에 살지 않으면 부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이주해 갔다. 이렇게 해서 주변에 마을이 생기고 수도 근교의위성도시 형태로 변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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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문 보도에 따르면 중국정부에서 건릉(乾陵)발굴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건릉은 서안 시의 서북쪽 건현(乾縣)에 있는, 당 고 析?그 아내 측천무후가 합장된 능이다. 바야흐로 당이 가장 번성했던 시대에 만들어진 능묘라 하겠다. 흙을 덮어 만든 것이 안라, 양산(梁山)이라는 자연 산을 묘로 만들었다. 묘문의 위치가 이미 알려졌음에도 도굴 피해를 입은 흔적은 전혀 없다. 참배 길의 양쪽에 서 있는 석인, 석수의 거대함만 보아도 발굴한다면 엄청난 것이 나올 것임에 틀림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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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릉에는 작은 고분이 열일곱 개 있다. 고종과 측천무후의 아들인 장회태가(章懷太子)의묘, 손자 의덕태자(懿德太子)의 묘, 손녀 영태공주(永泰公主)의 묘가 발굴되었다. 그 가운데 영태공주의 묘는 일반에 공개되어 견학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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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는 도굴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금은보화와 같은 보석들은 나오지 않았지만, 아름답고 귀중한 벽화가 남아 있다. 오랜 동안 지하에 봉해져 있던 벽화는 바깥 공기가 닿으면 변식할 염려가 있으므로 보존설비가 잘된 것에 보관되고, 그것을 그대로 본떠 그린 벽화가 걸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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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태공주의 묘는 전체 길이가 약 88m로 여성의 묘답게 벽화도 궁녀들로 그려져 있다. 장회태자나 의덕태자의 묘 벽면에는 수렵출행도나 의장병도, 타구희도(打球嬉圖), 응장동(應匠圖)같이 남성적인 것들이 많다. 똑같은 벽화라도 영태공주묘의 궁녀도는 높이 1.86m에 폭이 4.19m로 굉장히 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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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고분에서 출토된 것들이 이렇게 훌륭한데 건륭을 발굴하면 얼마나 대단할까? 장회태자묘의 벽화 중에는 외국사절단이 그려진 그림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