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병대
기병대
상병대
포병대
베트남이 최초로 중국에게 독립하게 된 것은 939년으로 고퀜이라는 장군이 중국에게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바치당강(백등강)의 전투에서 20만의 남한의 군대를 게릴라전으로 격파해버리는 대승을 거두었고.. 후세의 그의 후예들이 그의 전술을 모방하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은 그후 딘왕조와 전 레왕조가 건국되었고 침공한 송의 군대를 두 차례나 멋지게 격퇴하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이때 대월국이라는 국호로 불렀고 짱개들은 베트남을 안남이라고 불렀습니다..
리왕조때는 당시 인도차이나 최강국이었던 크메르제국의 황제 수리야바르만1세의 군대를 두 차례나 격퇴하였으며 참파의 군대를 격파하여 계속 남진을 시도하였습니다..
친왕조때는 세계 최강국 몽골제국의 침입을 받았는데 1차 침공인 1257년에는 몽골군의 장수 우량카타이에게 황제 친카인은 패배했으나 명장 친흥타오(진흥도)가 남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는 1284∼1285년과 1287∼1288년의 두 차례에 걸친 몽골의 제2차, 제3차침입 때 훌륭한 전공을 세웠는데...
제2차 몽골의 침입으로 토곤이 이끄는 군대에게 수도 탕롱성(하노이)이 함락되고 황제까지 항복을 고려하자, 그는 격장사라는 유명한 글을 써 장수와 병졸들에게 왕조의 위급을 호소하였습니다.
그 결과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어 몽골군과 싸워 각지에서 승리하였고 전설에 의하면 그는 거북이에게 받은 검으로 군사를 지휘하여 각지에서 몽골과 싸워 이겼다고 합니다..
당시 몽골군은 더운 기후와 친하옹투의 계략에 연전연패하였고 그 당시 참전한 몽골군 부장이었던 수이게투는 전사하였습니다..
3차 몽골 침입때는 친흥타오는 바치당강(백등강)에 말뚝을 박은 후 만조 때 몽골의 해군을 상류로 유인하여 그리고는 간조 때 이들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몽골군은 하노이를 다시 점령했으나 베트남군은 팔꿈치에 살달(몽골군을 죽이자)라는 글까지 써가며 죽을 각오로 저항했다고 합니다.
결국 1293년 베트남의 황제 친년통은 쿠빌라이칸의 뒤를 이은 테무르칸과 화해를 하여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게 됩니다..
친흥타오(1213-1300) 88세까지 장수함..
베트남의 민족영웅이자 천부적인 전략가로, 초토전술과 게릴라전을 적절히 구사하여 소수의 병력을 가지고 몽골대군을 물리쳤다. 전쟁이 끝나자 그 공으로 대왕에 봉해졌으며, 사후에는 흥다오대왕으로 신격화되어 기일에는 대대적인 제사가 행해졌다. 저서에 병서요략, 만겁종비전서 등이 있는데, 모두 병법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바치당강의 해전을 묘사한 그림(붉은색 옷을 입은 군대가 베트남군 코끼리도 보이군요..)
친흥타오의 동상
이리하여 베트남은 친왕조때 전성기를 맞아 참파의 대군 6만을 격퇴하고 참파를 사실상 멸망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호쿼리라는 귀족이 친황실을 찬탈하여 호왕조를 세웠고 도망간 친황실의 귀족들이 명나라의 영락제를 개입시켜 호왕조는 명에게 망하고 베트남은 다시 중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또 하나의 영웅이 등장했으니 그의 이름은 레로이였습니다..
그는 추종자들을 모아 1418년 민병대를 일으키고 전국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하였습니다. 1419년 명나라에서 파견된 원정군에 패배, 1423년에도 랑손에서 패퇴하였으나,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 활동을 계속하여 1424년부터 공세로 들어가 게안 ·탄호아를 해방시킨 다음 북상하였습니다..
그는 최후의 일전으로 쩌릉의 전투에서 왕통이 이끈 3만의 명군을 공격하였습니다.. 그의 병사는 5만 남짓이었고 갑자기 왕통을 지원하기 위해 7만의 명군이 레로이의 뒤를 기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중과부적이었던 레로이가 승리하였으니 베트남과 중국과 전투력 차이가 심하게 나는 걸 알수 있습니다..
명의 영락제는 몽골원정의 패배와 베트남에게 군대가 패배했다는 소식에 병을 얻어 죽고 말았습니다..
레로이는 1427년 하노이에서 즉위하면서 국호를 다이베트라 정하고 레왕조의 지배를 확립하였습니다. 국내를 5도로 나누고 모든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유학을 수용하였습니다..
레로이(1385~1433)
쩌릉에서 명군을 격파하는 레로이
당시 베트남은 중국문화권 국가 중에서는 매우 특이한 외교정책을 사용하였는데 베트남은 자기들을 제외하고는 몽땅 미개하게 본 수준낮은 중국이나 소중화사상에나 찌들어진 한반도와는 달리 약소국만 오랑캐로 봤을뿐 자신과 국력이 대등한 시암이나 미얀마와는 강국으로 유원하여 포섭하여 중국 문화권 국가 치고는 특이한 외교정책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시암과 미얀마와 베트남은 전쟁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대신 베트남은 참파와 캄보디아와 라오스로는 자주 원정을 하여 참파는 거의 멸했고 캄보디아는 격렬한 저항을 받았고 라오스는 라나타이의 원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였습니다..
당시 베트남의 군대는 중국문화권 국가에서 제일 최강이었습니다.. 덩치만 클뿐 병든 거인이나 다를빠 없는 명나라와 명에게 빌빌 기는 약소국 조선과는 전혀 다른 중국문화권 국가였습니다..
중국문화권 국가에서 베트남처럼 특이한 나라도 없으며 아랍같은 강대국의 군대와 맞서도 밀리지 않는게 베트남의 군대였습니다..
그러나 레왕조는 후에 막등용이라는 자가 레왕조의 황위를 잠시 찬탈하였으나 그의 자손은 청나라로 추방되었고 다시 북부에 딘씨가문과 남부의 느웬씨 가문이 통킹국을 세우고 레왕조의 황제를 사실상 다스렸고 이때 베트남 중부에서 쾅 트룽 느웬 반 악, 쾅 트룽 느웬 반 후에, 쾅 트룽 느웬 반 려라는 삼형제가 타이손당을 조직하여 반란을 일으켜 통킹국을 멸하고 1789년 레왕조마저 무너뜨렸습니다..
이 삼형제는 각각 베트남을 삼등분하여 나눠가지게 되었고 1789년 느웬 반 후에는건륭제가 이끈 청군 20만 마저 격퇴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나 형제간의 후예의 대립으로 싸우다가 그들에게 패한 통킹국의 후예 느웬푹안이 이끈 사이공의 군대에게 측면공격을 당하여 타이손당은 1802년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느웬 반 후에의 기마동상
느웬 반 후에
느웬 반 후에를 묘사한 그림
느웬 반 후에의 동상
이리하여 베트남에는 최후의 왕조인 느웬왕조가 건국되었고 느웬왕조는 강대국이었으나 카톨릭 탄압으로 프랑스놈들의 침공을 받아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시조는 느웬푹안으로 프랑스군에게 무기를 지원받고 시암과 동맹을 맺어 타이손당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인은 끈질긴 정신으로 단합하여 프랑스를 항복시켰고 깝치는 미국의 군대를 격퇴하여 베트남인의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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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에 찍은 느웬왕조의 궁술대회
베트남의 도검들
베트남은 키엠이라는 직검과 상아로 손잡이를 만든 다이다오라는 도를 사용하였으며 창은 대나무로 만들고 쇠촉을 꽃은 죽창과 기병은 야자나무를 두껍게 만들어서 놓은 창을 사용했다..
활은 일본처럼 대나무로 만들었고 베트남인들에게 시암인이나 크메르인이나 버마인처럼 노궁은 없었던 것 같다..
베트남의 무예 비엩보다우
비엩보다우는 베트남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속에 이어져온 무술이다. 비엩보다오는 단순히 싸움의 기술이 아니라 수많은 외적의 침략 속에서도 민족의 독립과 일체성을 지켜오기 위한 베트남 사람들의 살아 있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비엩보다오는 맨손 기술 뿐 아니라 봉, 칼, 창, 도끼 등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는 전투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말을 탄 전사나 갑옷을 입은 병사에 대항하기 위해 발전된 다양한 조르기 기술인데, 그 중에서도 상대방의 목을 겨냥한 기술을 최고의 기술로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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